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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iara 라라 Nov 08. 2023

목욕탕은 몽글몽글

- 라라 소소 3

목욕탕에서 미끄러져 머리를 바닥에 꽈당 부딪힌 적이 있다. 어렸을 때다. 아마도 초등학교 저학년이나 그 아래쯤 되었을 때가 아닐까 싶다. 미끄덩 넘어지는 그 찰나의 순간, 쪼그만 두뇌를 통과하는 수많은 생각들 중에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건 ‘걱정’이었다. ‘나 지금 미끄러져서 넘어지네, 엄마한테 혼나겠다!’ 다칠 것을 무서워하는 게 아니라 혼날 생각에 걱정을 먼저 하게 된 거다. 그러면서 엄마가 알아차리기 전에 일어나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행동해야겠다는 다짐까지 하면서 미끄러졌다. 그 짧은 시간에 생각하고 걱정하고 다짐까지 하다니. 행동으로까지 이어졌다면 과연 좋았을까. 그건 미지수다.


어쩌면 이런 결과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짧은 치마에 하이힐을 신고 또각또각 자신 있게 걸어가다가 갑자기 무언가에 걸리거나 발을 헛디뎌 발목이 꺾이면서 넘어질 때, 크게 다칠 수도 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벌떡 일어나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도로 가던 길을 걸어가는 한 사람. 넘어지면서 어디가 다쳤는지, 얼마큼 아픈지 통증이 느껴지기도 전에 주위 시선을 신경 쓰며 몸이 먼저 자동으로 반응을 하는 거다. 넘어지는 걸 누가 본다면 정말로 창피하겠다는 생각에 벌떡 일어나서 넘어지지 않은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행동해야겠다는 생각, 혹은 걱정, 혹은 작용과 반작용. 사실 난 넘어지면 벌떡 일어나는 그런 타입도 아니고 운동신경이 그리 발달한 편도 아니어서 잘은 모르겠지만 그런 것과 결이 비슷하리라 생각했다.


어린 나, 그리고서 어떻게 되었을까? 미끄러졌고 넘어졌고 머리를 바닥에 콩하고 찧었으며 너무 아파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넘어지는 과정에는 생각이 들어갔지만 넘어지고 나서는 생각이란 걸 바로 할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벌떡 일어나는 행동도 없었다. 다짐은 소용없었고 다만 통증이 밀려왔다. 나는 그때부터도 재빠르게 반응하는 신경 같은 건 없었나 보다. 목욕탕에서 뛰어다니면 위험하다고 주의에 주의를 받아왔다. 놀라기도 했겠지만, 그 와중에 울면 더 혼날 것만 같아서 가만히 누워있었을 것이다. 아이가 넘어졌으니 괜찮은지 살피러 주위에 있던 벌거벗은 어른들이 다가왔다. 그 몸들이 눈에 들어오면서, 그저 눈을 꿈뻑이고 있었는데, 그 사이로 나타난 놀란 눈의 엄마를 보는 순간 나는 눈물이 왈칵 쏟아져 버렸다지. 엄마는 나를 안아 일으켰고 괜찮은지, 놀라지는 않았는지 다독이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엄마 살이 닿았을 때의 그 따스함, 그리고 안도감. 엄마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중에 하나이다.


외상은 없었다. 병원에 가지는 않았지만 지속적인 두통이나 구토 등 다른 증상이 없었던 것으로 보아 뇌진탕도 아닌 것 같았다. 혹이 생기거나 뇌세포가 적잖게 죽어서 머리가 약간 나빠졌을 수는 있겠다. 더 해맑아졌을지도 모른다. 며칠이 지나고 아무렇지도 않게 멀쩡히 헤헤거리며 또다시 뛰어다니는 나를 보며 엄마는 갑자기 화를 냈다. 그러기에, 목욕탕에서 뛰어다니지 말라고 했지, 넘어지면 큰일 난다고 위험하다고 엄마가 계속 얘기했었지, 머리 깨졌으면 어쩔뻔했어, 그런 얘기를 수도 없이 들었다. 후폭풍. 그 뒤로는 목욕탕 갈 때마다 그때 아팠잖아, 이젠 뛰어다니지 말자, 하는 자아 성찰의 소리가 내 귀를 통과하는 메아리처럼 목욕탕 안을 울려 퍼졌다. 다시는 목욕탕에서 뛰어다니지 않았을까? 뛰지는 않았지만 빠르게 걸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그건 나도 잘 모르겠다. 목욕탕에서 뛰어다닐 일이 뭐가 있겠는가. 왜 그렇게 뛰었을까, 꼬맹이 적의 나는.


어린아이들에게는 솟아나는 에너지가 많은데 몸이 작아 그 에너지를 감당하지 못해서 뛰어다니며 발산하는 건 아닌지 종종 생각해 보곤 한다. 아무리 얌전하고 소극적이더라도 기쁨을 표현할 때 방방 뛰는 아이들을 자주 보았다. 놀이터에서 미끄럼틀을 한번 타고 또다시 타러 갈 때 최선을 다해서 뛰어가는 모습도 목격한다. 천천히 걸어가는 아이는 어디에도 없다. 그런 에너지와 목욕탕의 습한 기운이 만났으니 아이들은 흥분을 하고 어른들은 차분해지는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목욕탕은 물이 많아 습하다. 뜨거운 욕탕에서 피어오르는 따스한 안개. 곳곳에 송골송골 맺혀있다가 눈물처럼 떨어지는 물방울들. 목욕탕이라는 장소의 그 습한 따뜻함은 세상에 나오기 전 엄마의 뱃속을 헤엄쳐 다닐 때를 느끼게 해 주어서 그렇게 좋아했을지도 모르겠다. 무의식에 존재하는 그 느낌. 목욕탕은 엄마 품 같아서 좋았나 보다. 갑갑하기도 하고 뜨겁기도 하고 어른들이 너무 많아 다소 호기심 섞인 두려움을 느끼기도 한 곳이지만 그곳에서만큼은 엄마를 독차지할 수 있었고, 편안하게 오래오래 수영하면서 놀 수도 있었다. 뜨거운 물에는 발만 조금 담그고 있었고, 따뜻한 물에서 때를 불렸다. 찬물은 수영장처럼 넓은 직사각형 욕탕이었는데 너무 차가워서 물속을 깡충깡충 뛰어다니다가도 눈치를 보며 주위에 아무도 없으면 손으로 물을 튕기기도 하며 혼자서도 잘 놀았다. 어른들은 – 주로 다니던 목욕탕에는 어른들의 대부분이 할머니들이었다. - 주로 뜨거운 물에서 큰 소리로 대화를 나누며 오랫동안 앉아 계셨다. 혼자 오신 분들도 간혹 있었지만 모두가 친구 같았다. 지금 다 커서 느끼는 거지만 어른들은, 아니, 연세 많으신 분들은 연륜 때문인지 삶의 농도 때문인지 타인과 대화를 거리낌 없이 나눈다. 집에서는 한마디도 없다가 밖에 나와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분들에게 말을 건네는 아버지를 보면 어쩌면 그건 외로움 때문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한다. 집에서도 그렇게 웃으면서 말을 건네고 식구들의 말을 들어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툴툴거리는 마음이 올라온다. 


아무튼, 할머니들은 나에게도 서슴없이 말을 거셨다. 몇 살이니, 눈이 참 크네, 머리가 까맣다, 씩씩하구먼, 혼자서도 잘 노네, 누구랑 왔니, 등등. 엄마는 가끔 찬물에서 수영을 알려주었다. 발차기하는 법, 물 위에 떠 있는 법, 무서워하지 말고 몸에 힘을 빼는 법. 손을 배나 등 아래에 대고 받쳐 주기도 하셨다. 그러면 나는 정말 수영을 잘하고 앞으로 나아가고 물 위에 떠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주 아기였을 때와 아장아장 걸어 다닐 정도의 나이가 되어 보이는 나를 안고 강가와 바닷가에 서 있는 아버지의 사진이 앨범에 있다. 나는 자지러지게 울고 있고 아버지는 미소를 짓고 있다. 아버지는 젊었다. 나는 처음 본 순간부터 물을 많이 무서워했다고 한다. 혼자서는 강에 발도 담그지 못했다고 한다. 엄마 손을 잡고도 바들바들 떨 정도로 두려움이 컸다고 한다. 차가운 맨 발의 닿음이 싫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집에서도 슬리퍼를 신는 사람이니까. 여름에도 샌들보다는 양말에 운동화를 즐기는 사람이니까. 그래도 지금은 물을 좋아한다. 산보다는 물이 좋다. 강도 바다도 계곡도 가리지 않고 좋다. 고요하고 잔잔하고 넓고 파도치며 고여있는 듯해도 어딘가에는 흐름이 있는 물이 좋다. 꾸준한 엄마의 지도 덕분에 수영도 곧잘 한다. 목욕탕의 기억을 지닌 그 어린 나이 때부터 조금씩 물에 대한 공포가 사라진 것 같다.



목욕탕에 가면 한참 있었다. 찬물에서 오래오래 놀고 오래오래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때를 벅벅 밀었다. 때는 밀어도 밀어도 또 나왔다. 아픈데도 엄마는 계속 밀었다. 나도 엄마의 등을 밀어주었는데 엄마 등은 참 하얗고 맨질맨질했다. 엄마는 지금도 피부가 곱다. 나도 엄마 피부를 닮았으면 좋았을 텐데 제일 큰 아쉬움이다. 그렇게 오랫동안 목욕을 즐기고 나올 때쯤에는 머리가 조금 아팠다. 재미있게 놀고 나서 머리가 아프다고 하는 나를 보며 엄마는 의아하게 생각하곤 했지만, 알고 보니 뜨겁고 습한 환경에서는 혈관이 확장되어 저혈압 증세가 더 심해질 수도 있다고 한다. 나는 저혈압이고 엄마는 고혈압이다. 두통은 저혈압인 내가 고혈압인 엄마와 함께 오랫동안 위험하게 목욕탕에서 시간을 보내고 난 후유증이라고 할 수 있겠다. 너무 다른 두 모녀는 중간의 정상 사람들의 혈압처럼 목욕탕에서 합일점을 찾는다. 근데 어렸을 때도 저혈압이었을까?


어느 순간부터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욕조에 몸을 담고 있는 게 좋다.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예민한 감각을 누그러트린다. 소심한 내가 하루고 일주일이고 한 달이고 어느 시간을 살아내려고 애썼을 내 몸에 보상을 주는 시간이다. 눈을 감고 생각을 버리려 노력한다. 몸의 감각에 귀를 기울인다. 토닥토닥 다독여 주기도 하고 스담스담 쓰다듬어 주기도 한다. 그렇게 이완된 몸과 마음으로 좋아하는 책을 읽는 걸 제일 좋아하는데 목욕탕에서는 그렇게 할 수가 없다. 개인 욕조에서만 할 수 있는 호사다. 내가 처음 집을 나와 혼자 살게 되었을 때, 엄마가 제일 먼저 화장실을 보며 했던 말씀이, 여기는 화장실이 너무 작아서 욕조를 넣을 수가 없겠네, 였다. 요즘은 반신욕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아주 작은 간이 욕조도 많이 있는데, 그것도 들어갈 수 없을 만큼 작은 화장실이었다. 엄마는 그걸 안타까워하셨다. 집을 나가는 것도 걱정이고 탐탁지 않은데 좋아하는 욕조마저 들어갈 자리 한편 없는 그런 화장실이 있는 작은 집이라니. 작은 화장실이 딸린 작은 방이라고 해야지 맞는 말일 것이다. 그래도 나는 내가 조금 더 자유롭게 숨을 쉬고 조금이라도 독립적인 여성으로 살아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언제까지나 부모님 곁에서 있을 수만은 없을 테니까.


욕조가 있는 부모님 집에 살 때도 종종 목욕탕에 다녔다. 혼자 살게 된 이후로 욕조가 없으니 더 자주 목욕탕에 갈 것도 같은데 손꼽아 보면 그러지는 않았다. 비슷했던 것 같다. 두세 달에 한 번씩 목욕탕을 찾았고, 오랜만에 따뜻한 기운을 담뿍 안고 힘은 들이지 않으면서 효율적으로 때도 밀고 습식 사우나도 하면서 그렇게 오래오래 천천히 시간을 보낸다. 목욕탕의 마무리는 역시나 두통. 두통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온다. 차갑거나 뜨거운 커피를 마시며 쉰다. 그렇게 하루는 지나간다.


넉넉한 하루가 허락하지 않는 한 목욕탕에 갈 여유를 만드는 건 쉽지 않다. 혼자 사는 삶에는 타인이 눈치챌 수 없는 빡빡함이 늘 존재하기 마련이고, 혼자라는 편안함 사이에 미세한 긴장감이 쉴 새 없이 몸을 파고든다. 부모님과 함께 살 때는 알 수 없었던 것들이 많다. 이제는 경험해 보지 않은 일에 대해서, 나도 알 것 같아, 그래, 그런 느낌일 거야, 맞아, 이해해, 이런 말을 섣불리 입 밖으로 발산하지 않는다. 혼자 살면서 하나씩 알아가게 되는 것들을 통해 공감이라는 건 쉽게 해서는 안 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입으로 하는 빠른 위로는 위험할 수 있고, 어떤 말을 건네는 것보다 그저 고개를 끄덕이거나 손을 맞잡아 주는 행동만으로 상대에게 더 큰 위로를 받을 수 있다는 걸 깨닫는 중이다.


목욕탕에서는 조금 더 진솔해진다. 몸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아서 일 수도 있고, 공기가 희미해서 그 분위기에 이끌려 거름 없이 통유리에 비친 그대로의 모습으로 표현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런 이유로 친한 친구와는 목욕탕에 같이 갈 수 있다. 때가 나와서 부끄럽기도 하지만, 안 밀어줘도 된다고 각자 밀자고 말하기도 하지만, 서로의 등을 밀어주며 온기를 느낀다. 친밀함이 더해진다. 뜨거운 탕에 들어가서 몸의 반은 바깥으로 걸치고 반쯤은 몽롱하게 말하려는 생각이 없었던 말을 나도 모르게 하고 있다. 서로 어긋난 시선으로 입만은 상대를 향해있다. 자신도 모르게 친구도 하려던 말이 아닌 자기의 말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너무 밝은 목욕탕에서는 – 요즘에는 찜질방으로 운영되는 목욕탕이 많아서 천장이 높고 목욕탕 안은 밝고 바닥이나 벽의 타일도 세련된 느낌이 나는 곳이 많다. – 그 정도의 진솔함보다, 조금은 단장을 하고 말하게 된다. 거리낄 게 생기는 거다. 그러고 보니 친구와 목욕탕에 다녀온 지도 오래되었다. 목욕탕 친구는 멀리 떠나 버렸다. 그 이후에 다른 목욕탕 친구를 찾지 못했다. 목욕탕 친구는 아무래도 가까이 사는 게 중요한데, 동네 친구들이 하나둘씩 떠나고 친구 없이 나만 있는 동네가 되어 버렸다. 우리 동네가 아니라 내 동네가 되어 버린 기분이 들어 외롭고 울적하고 목욕탕에 가고 싶어 진다. 어른이 되어 마음이 통하고 위로를 주고받으며 의지할 수 있는 새로운 친구를 사귀는 건 쉽지 않다. 어린이의 삶도 녹록지 않지만 어른의 삶은 쉽지 않은 걸 해결하는 순간의 연속이라 곤혹스러운 일이 많다.


아무래도 앞으로 목욕탕에는 혼자 다녀야겠다. 나도 이제 컸으니까, 엄마에게나 친구에게 보다는 나 자신에게 진솔해도 된다. 그러려고 목욕탕에 간다. 나의 따뜻함을 내가 느끼고, 내 안에 있는 나에게 말을 걸기 위해서. 오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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