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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iara 라라 Nov 01. 2023

반려 실내화의 털갈이

- 라라 소소 2

여름이든 겨울이든 봄, 여름, 가을, 겨울 사철 모두 아무리 좁고 작은 내 방이라고 하더라도 집안에서는 슬리퍼를 신고 다니는 걸 좋아한다


여름에는 샌들보다는 운동화나 스니커즈 같은 다른 신발을 선호한다. 발바닥이 맨땅이나 맨 신발에 닿는 그 기분이 나를 묘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언제부터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거의 평생을 그랬던 것 같다. 어떤 특수한 이유를 가지고 있지는 않는 걸로 보인다. 어렸을 때부터 엄마가 양말을 잘 신도록 챙겨주어서 그럴지도 모른다. 엄마 덕분에 생긴 습관 중의 하나는 손수건을 가지고 다니는 거다. 거의 매일 손수건을 가지고 다닌다. 매일 빨지는 못하고, 매일 바꾸지도 못하지만 내 가방 속에는 대부분 손수건이 들어있다. 손을 닦고 나면 손에 묻은 물을 내 손수건으로 닦는다. 땀이 나면 손수건으로 땀을 닦는다. 눈물이 흐를 때도 마찬가지다. 물론 얼른 닦아내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다시 뚱한 표정으로 돌아가기는 하지만. 화장을 하고 있을 경우에는 – 코로나 이후에는 마스크 덕분에 그전보다 더 화장을 하지 않기는 하지만 – 땀을 닦기 위해 들었던 손이 약간 망설여지기도 한다. 격식을 차리고 화장하고 외출을 하게 되는 그런 때는 대부분 하얀색이 들어가거나 밝은 색의 손수건보다는 약간의 색이 있거나 패턴이 들어간 손수건을 사용하려고 노력한다. 손수건이 없으면, 특히 여름에 손수건이 없으면 난감해진다. 땀을 편안하게 닦을 수 없어서 허둥지둥 대기도 하고, 얼음이 가득 담긴 커피를 마실 때 컵 밖으로 물이 줄줄 내려와 바닥에 떨어지는 걸 바라보며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누구에게 미안한지는 잘 모르겠다. 떨어지는 물방울인지, 뭔가와 연상이 되는 환경인지, 아니면 축축해질 바닥인지, 어쩌면 떨어지다가 묻을지도 모르는 내 운동화에게 일지도. 아이스커피 컵 표면에 생기는 물방울이 손수건의 표면에 닿아 손수건을 촉촉하게 만들어 주고, 그 손수건을 접어서 물이 스며든 반대쪽 천으로 이마를 한번 훔치면 그렇게 상쾌할 수가 없다. 아, 손수건을 안 가지고 나오면 불안했던 이유가 여기에도 있었다. 더운 여름 그 상쾌함을 느끼고 싶은데 손수건이 없으면 당황해 버리고 마니까. 커피를 담을 수 있는 플라스틱 물통을 가지고 나오면 그게 가능하고, 보온보랭병이나 뚜껑이 있는 텀블러를 가지고 나온다면 표면에 배어 나오는 물방울은 없다고 볼 수 있다. 단지 얼음이 천천히 녹아서 더 오래 시원하게 마실 수 있을 뿐이다. 그건 또 그거 나름대로 나에게 행복과 상쾌함을 가져다준다. 여름은 덥지만 나름의 소소가 있는 계절이다. 지금은 가을이고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기 일보 직전이다. 가을 날씨라고 하는데 어떤 날은 초겨울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싸늘함을 넘어서서 춥다는 느낌까지 받는다. 실제로 온도가 어느 정도인지는 확인을 해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다. 아, 손수건과 계절로 이야기가 빠져버렸다.


내가 하고픈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면 맨발에 무언가가 닿는 – 아마도 뭐든 닿는 걸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 차갑고 오염이 되어있을 수 있다고 생각이 되는 그런 무언가 일 것이다. 신발을 신으면 그 안에 고무나 밑창의 싸늘함이 될 수 있겠고, 집안에서는 방바닥 어딘가에 돌아다니고 있을 먼지와 기타 이물질 등의 닿는 느낌이 될 수도 있겠다 – 그 느낌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너무 예민한 거 아니냐고 의아해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건 약간의 강박과도 같은 행위이다. 그렇다고 완전히 강박에 사로잡혀 있는 건 아니다. 나도 샌들이나 슬리퍼를 신고 외출을 하거나, 집에서 맨발로 다니기도 한다. 종종은 아니고 가끔씩. 집에서 맨발로 바닥을 디디고 다니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볼 수 있겠지만 그래도 가끔은.


강박은 누구나 다 가지고 있다. 잠시 하던 걸 내려놓고 생각을 해보자. 내가 특히 무언가를 할 때 집중하는 요소가 있지 않은가? 의식 같은 것도 강박의 한 종류가 될 수도 있겠다. 예를 들어 회사에 출근해서 자리에 앉자마자 믹스 커피를 한 잔 타서 마지시 않으면 두뇌 회전이 잘되지 않는다든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기지개를 크게 켜지 않으면 온몸이 찌뿌둥해서 어디 아픈 것 같은 느낌이 든다든지, 식사 전 기도를 하지 않고 밥을 먹으면 죄를 짓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든지, 그런 것들 말이다. 강박이라는 어휘의 어감이 상당히 강하다고 느낄 수 있겠지만 나는 그런 것들도 다 강박이라고 생각한다. 그 강도만 약할 뿐이지. 습관이나 의식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뿐이지. 강박에 빠지면 그 행위를 하지 않고서는 온몸이 근질거려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게 된다. 회사에서는 하루 종일 멍, 하게 있다가 아, 내가 오늘 허둥지둥 출근해서 하루의 시작을 믹스 커피로 하지 않았구나! 깨닫는 동시에 믹스 커피를 타 먹으면서 하루의 활력을 되찾을 수 있고, 하루 종일 온몸이 찌뿌둥해서 몸살 기운이 있는 건가, 의심하다가 아, 오늘 아침에 기지개를 크게 켜지 않았구나, 지금이라도 켜야지! 하면서 온몸을 쭈욱 늘리고 나면 모든 근육이 이완되어 내 몸이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기도를 하지 않고 밥을 먹어 밥 먹다 말고 죄책감이 느껴진다면 먹으면서 잘 먹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기도하면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지고 식사 후에 식후 기도를 제대로 해야지, 하며 마음을 다잡게 된다. 그러면 맛있게 냠냠 밥을 먹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것들이 약간의 습관과 의식과 강박에 들어가는데 나에게 있는 강박은 맨발로 맨바닥을 밟고 서는 게 그것이다. 그렇다면 양말을 신고 있으면 되지 않은가?, 하고 의문을 가질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는 양말을 좋아한다. 양말 자체도 좋아하고 양말 신는 것도 좋아하고 그 감촉도 좋아한다. 하지만 집에서 날도 더운데 – 겨울에는 목 긴 양말이나 수면양말을 종종 신고 있다 – 답답하게 양말을 신고 있는 것도 별로 자유로운 기분은 아니어서 양말을 잘 신고 있지는 않게 된다.


나는 손과 발이 차가운 축에 속하는 사람이다. 이를 수족냉증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나는 수족냉증이라는 진단명을 받아본 적은 없다. 이 일로 병원이나 한의원에 가보지 않아서 그런 것 같다. 손발이 차기도 하고 몸속이 차기도 하다. 무슨 말을 하려고 했을까. 수족냉증이라는 단어를 생각하다가 흐름을 놓치고 말았다. 어쩔 수 없지. 아무튼 양말로 다시 돌아가야겠다. 양말은 집에서 신고 있으면 약간 답답하게 느껴질 때가 있어서 신었다 벗었다 왔다 갔다 한다. 그게 귀찮아서 신지 않게 되는 것 같다. 그 대신 내가 집에서 사용하는 건, 슬리퍼다. 보통 집 안에서 신는 실내용 슬리퍼는 대부분 천으로 되거나 폭신한 질감으로 된 슬리퍼로 신는다. 크게 가리지는 않는다. 겉으로 보기에 예쁜 슬리퍼를 신기도 하고 선물 받은 슬리퍼를 신기도 한다. 한번 신으면 오래오래 신는다. 보통은 엄마가 다 달아서 나달 나달 해진 슬리퍼를 보면 그게 보기 안쓰러워서 어떤 슬리퍼든지 간에 인터넷으로 주문해서 택배로 보내주시곤 한다. 다시 한번 더 얘기하자면 나는 그렇게 예민한 사람이 아니다. 특히 예민하게 구는 면이 몇몇 있다는 건 인정하지만 이쪽 면에 있어서는 아니라는 말이다. 그저 발이 차가운 면에 닿는 걸 별로 선호하지 않는 사람일 뿐이다. 


오랫동안 강아지 슬리퍼와 함께했다. 거의 일 년은 아니 일 년 넘게 신은 것 같다. 양 귀가 길게 늘어져 있고 눈도 코도 입도 모두 ‘나는 강아지입니다’,라고 알려주고 있는 슬리퍼다. 색이 갈색이라 푸들 같기도 하지만 푸들은 아니다. 외국 강아지 느낌인데, 어떤 영화나 애니메이션에서 본 적이 있는 캐릭터 같기도 하다. 이 강아지 슬리퍼와 잘 지냈다. 폭신했고, 포근했다. 여름에도 발에 땀이 조금 나기는 했지만, 집이 넓은 것도 아니고 맨날 서서 지내는 것도 아니니까 괜찮았다. 하지만 몇 달 전부터 이 아이가 수명을 다하기 시작했다. 한쪽 바닥의 뒤축이 갈라지면서 바닥 안쪽에서 내 몸을 지탱하며 폭신하게 해 주었던 바닥판이 삐져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얼굴은 멀쩡한데 속이 곯기 시작한 불쌍한 아이. 그래도 나는 너를 보내줄 수가 없어. 너도 소중하지만 내 발도 소중해서 이렇게 무방비 상태로 너를 보낼 수는 없다. 또 너와 정든 시간이 길잖아. 그런 상태로 강아지 슬리퍼를 신고 또 신었다. 나름 수술도 해 주었는데, 뒤 축에 스테이플러를 박아서 바닥판이 튀어나오는 것을 조금이라도 막을 수 있도록 예방하는 그런 수술이었다. 그 수술 후 안정을 되찾았으나, 나머지 한쪽도 조금씩 뒤 축이 갈라지려는 모습이 보였고 나는 마음이 아팠다. 새 식구를 찾아야 하는 걸까. 그 시간이 다가온 걸까. 때마침 엄마가 지인들과 식사를 하고 그 근처에 있던 모던 하우스에 들어가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곳에는 털이 복슬복슬한 실내용 슬리퍼가 자리하고 있었고, 그 모습이 엄마의 마음에 쏙 드셨던 것이다. 또 매일 두통에 시달리고 눈이 아파서 어쩔 줄 몰라하는 딸을 위한 눈 찜질용 안대도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엄마는 기쁜 마음으로 색만 다르고 디자인은 똑같은 슬리퍼 두 개와 찜질 안대를 사 가지고 귀가하셨다. 주말에 부모님 집을 방문했을 때 내 책상 위에는 – 부모님 집에는 내 방이 아직도 거의 그대로 있다 – 슬리퍼 두 개와 수면 안대와 커다란 봉지 감자칩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와아- 감사합니다! 슬리퍼가 두 개인 이유는 하나는 부모님 집에서 신으라고, 또 하나는 집에 가져가서 신으라고, 이렇게 배려를 해 주시는 엄마다. 엄마 사랑해요. 사실 슬리퍼가 내 취향은 아니에요. 하하하.



신기하게도 방구석구석으로 눈만 돌리면 어느새 먼지가 쌓여 있다. 여기를 치우면 저기에서 보이고 저기를 치우면 또 그 너머에 먼지가 있다. 집이 큰 것도 아니고 작은 방에 불과한데 어디서 이렇게 먼지가 나오고 쌓이는 건지 통 모르겠다. 어느 날부터인가 서서히 먼지보다는 조금 더 선명하고 뭉침이 있는 털 같은 형태의 것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이곳저곳에 붙어 있었다. 내 옷에도 조금, 바닥에 깔아 놓은 작은 카펫에도 희미하게, 패브릭 의자에서도 여기저기, 발견되었다. 처음에는 먼지를 털어내듯이 눈에 보이는 그 털들을 손으로 떼어내고 뭉쳐서 휴지통에 버렸다. 하지만 어디에선가 조금씩 그리고 끊임없이 나타났다. 이상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너는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거니?


아무리 생각해 보고 찾아보아도 이렇게 털이 나올 곳이 없다. 털이 있는 반려동물은커녕 털이 없는 반려동물도 없다. 집에는 손바닥만 한 작은 다육이 하나와 살아 숨 쉬는 ‘나’라는 적당한 크기의 동물이 하나 있을 뿐이다. 내 몸에서 나오는 털은 머리카락 정도 같은데, 눈에 띄는 이 털은 검거나 진한 갈색의 내 머리카락은 절대 아니고 강아지 털보다는 조금 더 빳빳하지만 나름대로 복슬복슬한 고양이 털 같이 생겼다. 색도 약간 밝은 회색이나 투명하지 않고 약간 어두운 흰색 그 언저리에 있다. 고양이와 함께 사는 친구를 만날 때 친구의 옷에 딸려 오는 고양이의 흔적 같은 그런 털이다. 고양이가 있는 친구 집에 놀러 갔다가 집에 오면 내 옷 어딘가에 붙어서 내 공간으로 침투해 오는 그런 털 같아 보였다. 범인은 단 하나. 당신.


아무래도 실내화가 털갈이를 하고 있는 것 같다.


강아지도 고양이도 햄스터도 아니고 실내화의 털갈이를 함께 하고 있다니. 여기저기. 털이 뭉텅뭉텅. 어린 시절에 강아지나 햄스터와 함께 살 때에도 크게 털갈이 없이 지나갔었는데 이제야 다 커서 실내화의 털갈이를 마주하게 되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털이 있는 반려동물과 함께 살고 있는 것 같이 포근한 마음이 들면서도 살아 숨 쉬는 그런 생명체의 따뜻함은 느껴지지 않고 그저 생생하다고 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동물은 아니지만 지식이 부족하니 ‘반려동물 털갈이’를 검색해 보았다. 주로 봄, 가을 변화하는 계절에 적응하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라고 어떤 신문기사에 나와있었다. 추운 겨울을 나기 위해서 하는 가을 털갈이. 그렇다면 내 실내화의 털갈이도 나의 겨울을 더 따뜻하게 해 주기 위한 털갈이로 생각하고 감사히 여겨야겠다. 반려 동물 털 관리법이라든지 쌓인 털을 효율적으로 청소하는 노하우라든지 그런 기사도 함께 있었다. 다들 거창하여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어 보였다. 그저 눈에 보이면 지금처럼 손으로 떼어내고 뭉치고 휴지통에 버리기, 먼지 제거용 테이프를 사용하기, 발을 뽀송하게 유지하기, 나의 노하우가 벌써 생기려 하고 있다.



털갈이를 도와주려고 – 아니, 사실은 이 털갈이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은 나의 개인적인 불손한 마음을 담뿍 지니고 - 손으로 실내화 가장자리의 털을 살포시 뽑아 보았다. 안 뽑힌다. 털갈이는 누군가의 도움으로 되는 것이 아닌가 보다. 자연의 순리대로 또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당사자 스스로 서서히 진행되는 것인가 보다.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리며 긴 겨울을 나야 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다가올 긴 겨울 동안에 반려 실내화에서 떨어지는 털과 내 몸 어딘가에 붙어있을 그 털들을 보며 어느 순간에는 혼자가 아님을 느끼게 될지도 모르겠지. 그런 겨울이 될지도 모르겠다.


겨울아, 조금만 더 기다려줘. 내 반려 실내화도 나도 아직은 겨울 당신을 맞이할 준비가 덜 된 것 같아. 우리 시간을 두고 나중에 더 반가운 마음으로 만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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