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라라 소소 27
어린아이들은 노래와 춤을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모든 아이가 좋아하는 건 아니라는 걸 문득 알게 되는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니지만 아이도 각각 고유의 개체성이 있으니, 어른과 마찬가지로 춤도 노래도 좋을 수도 있고 별로일 수도 있으리라.
어린 시절,
아마도 기억하기로는 첫 번째 꿈이자 오랜 꿈으로, 발레리나가 되고 싶었다.
살색 타이즈에 까만색 연습복을 입고, 머리는 단정히 위로 올려 망에 감싸여 있었다. 머리카락 한두 가닥 정도는 동작과 함께 자연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아라베스크를 했을 때의 그 아름다움이란.
선이 이렇게 아름답구나, 처음 느꼈고, 그 장면은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내 눈에 선연하다.
어쩌면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아름답게 포장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언니는 나보다 겨우 3살이 많았다. 나는 3학년이었고 언니는 6학년으로 예술 중학교 입시를 준비하고 있었으니까 그래봤자 둘 다 초등학생이었던 거다. 하지만 저학년에 속하는 초등 3학년 생의 눈에는 최고 학년인 6학년 언니가 다 큰 어른으로 보였다. 다른 언니오빠들에 비해서 입시를 준비하고 있는 언니오빠들은 확실히 다른 면모를 가지고 있기는 했다. 고등학교 입시와 대학교 입시도 만만치 않은데 초등학생 때 입시를 준비한다는 건 여간한 아이는 아니라는 증거이기도 하다. (물론 초등생의 입시는 부모에 의해서도 많이 좌지우지되는 실정이다.) 언니는 예중 입시를 준비하는 다른 언니들과는 또 다른 특별함을 가지고 있었다. 어린 내가 보기에도 그 특별함은 언니를 빛나게 했고, 언니를 보며 나도 발레리나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먹는 걸 좋아하는 어린이였다. 잘 먹기도 했고 열심히 먹기도 했다. 평범한 아이들과 비교하면 정상체중에 평범한 몸이었는데, 발레를 하는 아이들 틈에서는 통통해 보이는 아이였다. 신기하게도 발레를 배우러 오는 아이들은 대부분 마른 체형이다. 아이가 원해서 오는 걸까, 부모가 원해서 오는 걸까. 둘 다겠지. 나는 언니의 연습을 본 그날 이후로 내가 원해서 발레를 시작했다. 엄마가 나중에, 얘기해 주었는데 발레는 커서 어디에도 쓸모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 발레보다는 악기를 배울 기회를 주고 싶었다고 하셨다. 그 당시에는 플루트가 유행이었는데 나는 플로트가 마음에 들지 않았고 단 한 번도 불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입으로 부는 걸 선호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엄마의 얘기를 들은 후, 어느 하루는 바이올린을 배워두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지금은 기타를 내 맘대로 딩가딩가 치고 있다. 관악기보다는 현악기가 나를 조금 더 끌어당기나 보다.
아기들을 보면 몸을 이리저리 동그랗게 말기도 하고 데굴데굴 구르기도 하며 굉장히 유연한 모습을 보인다. 한 살 두 살 뼈가 단단해지면서 유연성이 조금씩 줄어드는 게 아닐까 싶은데, 나는 커서도 뼈마디가 흐물흐물한 것처럼 유연했다. 사실 발레를 하기 전까지는 누구나 다 그런 줄 알았지만 유연하지 않아서 유연성을 기르느라 힘들어하는 아이들도 많았다. 초등학생에게 유연성은 하나의 특기였다. 특히 손가락을 앞이나 뒤로 잡아당겨 손목 앞쪽이나 뒤쪽에 닿게 하는 건 누구나의 관심을 받았고, 장기 자랑으로 선보일 수 있을 정도였다. 덕분에 손을 많이 혹사시켰다. 크게 아프지는 않아서 다행이었지만 외할아버지께 물려받은 이 긴 손가락을 피아노나 다른 악기에 사용했다면 지금쯤 그쪽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을지도. 긴 손가락은 피아노 선생님의 욕심과 목표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선생님의 열정만큼 내 열의가 생기지 않아서 오래 하지 못했을 뿐. 피아노를 칠 줄 알면 좋겠다. 지금 그때 제대로 배우지 못한 걸 후회하면 뭘 하나, 후회하지 않고 잘 배운 발레를 기억하자. 나는 그 당시에 발레를 배웠다. 열심히 그리고 재미있게 발레를 했다.
유연성은 발레 동작을 하는데 도움을 준다. 발레 덕분에 자세를 바르게 하는 습관도 들었다. 발레는 몸의 힘이 아닌 배의 힘으로 다리를 올리고 버티고 견디고 해야 하는데 복근이 없어서 연습하느라 낑낑 애를 썼던 기억이 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 그래봤자 4학년부터, 발레 외의 춤에도 관심이 생겼다. 발레를 하면서 다른 춤 동작들도 큰 어려움 없이 무난히 따라 하게 된 거다. 유행하는 댄스 그룹의 안무를 따라 하고 연습하기도 했고, 5학년 때에는 수련회에서 친구들과 춤을 추기도 했다. 그때는 지금보다 겁이 없었나 싶기도 하고, 주목받고 싶었나 싶기도 하다. 무엇보다 재미있었다.
쌍둥이 조카들이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초등학교는 가장 긴 5교시 수업을 해도 2시 전에 모든 정규 수업이 끝난다. 유치원 하원 시간이 5시 전이었던 걸 생각하면 3시간이나 빠르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돌봄 교실에 들어가려고 하는데, 쌍둥이는 단 한 번의 뽑기 기회가 주어진다. 한 명이 뽑히면 나머지도 함께 뽑히는 거지만 한 명이 탈락하면 나머지도 함께 탈락을 하게 되는 그런 구조였다. 돌봄 교실 뽑기 하는 날이 엄마 (주 양육자인 둥이들의 할머니) 생신이었는데 오빠(둥이들의 아빠)가 뽑기를 했고, 똑 떨어졌다. 엄마의 생일 행운을 믿고 엄마가 뽑았어야 한다며 우스갯소리로 얘기했지만 집에는 비상이 걸렸다. 조카들은 방과 후에 무어라도 해야 헸다.
둥이 조카들은 코로나가 한창일 때 어린이집과 유치원을 다녔다. 집을 제외한 실내에서는 마스크를 쓰고 지냈다. 어린이집과 유치원에서는 부모 초대나 발표회, 야외로 나가는 행사도 거의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춤이나 연극 같은 걸 하는 발표회를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나는 둥이들 어렸을 때부터 집안 사정에 의해서 육아에 조금 참여하게 되었는데, 둥이들에게 책을 읽어주고 책과 관련한 활동을 하고 함께 노래를 부르고 춤도 추곤 했다. 그럴 때마다 아이들이 열심히 하고 즐기고 있지만 특별히 음감이나 리듬감이 있다고 생각을 해 보진 못했다. 우리 조카들은 열심히 하는 아이들이구나. 약간은 뻣뻣하기도 하고.
유치원 졸업식 날 작은 발표가 있었다. 몇 달 동안 열심히 연습하더니 노래에 맞추어 춤을 춘 거다. 우리 조카들은 열심히 했다. 오빠가 우리 둥이들은 열심히 춤추는 로봇 같았다고 웃으면서 말했다. 박자 감각이나 유연성이 그다지 높지 않아도 열심히 즐기면서 하는 게 최고지!
아파트 주민 센터에 K-POP 댄스 수업이 새로 생겼다.
돌봄 교실이 떨어져서 비상이 걸린 집에 새로 생긴 K-POP 댄스 수업은 졸업식 발표회 때 아이들을 보며 미소 지었던 어른들의 흥미를 유발했다. 아이들의 리듬감도 길러주고 몸을 움직여서 에너지도 소모할 수 있으니 더없이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들어, 아이들에게 K-POP 댄스가 엄청 재미있을 것 같다고 고모도 하고 싶다고 하면서 아이들의 흥미를 끌었다. 한 아이는 뭐든지 다 하고 싶다고 했고, 다른 아이는 별로 흥미를 보이지 않았는데, 나중에는 함께 하겠다고 해서 그렇게 시작되었다. K-POP 댄스!!
재미있어한다. 2주 정도에 한 곡씩 중심 안무를 배우는 모양이다. 내가 가는 화요일과 금요일에 새롭게 배운 안무를 보여준다. 안무가 완성이 되면 완성 영상을 찍기도 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 곡을 다 하는 게 아니고 보통은 군무나 후렴구에 나오는 안무 중심으로 배우고 있다. 조카들이 신나게 춤을 추고 있는 걸 보며 나의 어린 시절이 생각났다. 발레리나가 되고 싶었고 유행하던 댄스를 연습하던 어린 나의 모습. 그저 신이 났던 그 어린 날의 내 모습.
지금은 텔레비전도 보지 않고, 음악도 듣지 않는 나.
둥이들 덕분에 매주 K-POP 댄스 수업에서 하는 음악을 찾아서 듣는다. 요즘에는 유튜브에 안무를 알려주는 영상도 올라와 있어서 그런 영상도 유심히 살펴보곤 한다. 둥이들도 고모가 그 노래를 알고 있고 안무를 알고 있으면 더 신나서 설명도 해 주고 춤도 추고 그런다. 나도 둥이들과 더불어 재미있고 신난다.
초등학교 이후로는 발레를 계속할 수 없었고, 선생님은 발레보다는 기계체조를 하는 게 더 좋겠다고 추천해 주셨다. 일반 중학교에 입학한 나는 발레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마음속으로는 계속 품고 평범한 학생으로 미래를 꿈꿔야 했다. 발레리나 말고도 다른 꿈들이 몇 번씩 바뀌면서 청소년기를 보냈다. 한번 나를 흔들었던 사건이 있었는데, 고등학교 무용 선생님이 몇 번의 수업 후에 나를 따로 불러서 일 년만 입시 준비하면 발레는 힘들더라도 한국무용은 가능할 거라고 관심 있는지 물어본 적이 있어서였다. 심지어 나는 이과 학생이었다. 흔들리지 않았다면 거짓이다. 하지만 발레가 아니었고, 이미 때는 늦었다는 (이과 학생의 머릿속에 담긴 이성적인) 생각이 들었다. 또 나의 목표와 꿈은 건축으로 굳혀진 때였다. 그때 무용을 했으면 입시에 성공할 수 있었을까. 나의 삶은 지금과 조금이라도 달라졌을까. 후회하지는 않는다. 좋은 기억이다. 나를 인정해 주고 믿고 내 의견을 물어봐 주었던 선생님이 계셨다는 게 지금 생각해 보면 큰 힘이었다.
가끔 궁금해서 초등학교 때 나를 발레로 이끌어 준 - 언니는 알지 못한다. 내가 말한 적이 없고, 언니와 가까이 지낸 적도 없다. 언니는 입시로 바빴고 내가 가까이하기에는 너무나 높고 커다란 사람이었으니까 - 언니를 검색해 보곤 했다. 언니는 한국의 떠오르는 신예 발레리나였다. 그리고 해외로 유학을 가서도 주목을 받고 있는 듯했다. 언니가 발레리나여서 행복하기를 바란다.
이번 주는 베이비몬스터의 ‘SHEESH’를 배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손동작을 섬세하게 해야 한다며 조카가 거듭 강조해서 말해 주었다. 영상을 찾아서 유심히 살펴본다. 나도 오랜만에 춤을 춘다. 재미있다. 몸이 생각만큼 잘 움직여지지는 않지만, 아직 유연성은 많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 나는 춤을 좀 출 줄 아는 어린이였다.
이제는 춤을 좀 출 줄 아는 라라 고모가 되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