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라라 소소 47
극 내향적이고 내성적이기까지 한 나 같은 독자에게 좋아하는 작가는 실체는 있으나 손에는 잡히지 않고, 다가가기에는 너무 멀고 아득한데 그럼에도 너무 아름다워 닮고 싶고 계속 간직하고 싶은 포스터 속 일러스트 같은 존재다. 어떤 때는 아이돌 같기도 해서 우연히 스쳐 지나가면 붙잡고 반갑게 인사를 건네면 좋겠는데, 그분임을 알아보는 순간 얼어붙고 만다. (작가님도 갑자기 낯선 누군가가 길을 막아서고 인사를 한다면 당황스럽기도 하겠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님들은 조곤조곤한 분들이 대부분이라 무심히 지나가는 걸 더 원하실지도 모르겠으나 그럼에도 당신을 좋아하고 당신 작품에 대한 애정을 고백하는 독자가 살포시 말을 건넨다면 고맙고 좋고 또 부끄럽기도 한 그런 다양한 기분이 마음에서 올라올 것 같다. 인사도 하고 싶고 대화도 나누고 싶고 그저 바라만 보고 싶기도 하다. 사실 내가 좋아하는 작가님들이 우리 동네 언니면 참 좋겠다.)
작가들을 만날 수 있는 자리가 있다.
보통은 새 책이 나왔을 때, 출판사에서 주최하는 사인회 및 작가와의 만남 시간이 대표적이다. 서점이나 도서관에서도 종종 작가의 강연 및 독자와 함께하는 모임 형태의 행사가 이루어지기도 한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님과의 만남 시간에 참여할 수만 있다면 그 시간을 충분히 만끽하며 작가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표정도 살피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지만, 다양한 사람이 모일 그런 자리에 타인과 함께할 엄두가 나지 않기도 하다. 온라인으로 참여할 수 있다면 집에서 혼자 조용히 즐기는 건 무조건 환영이다. 여태 독서라는 행위에만 초점을 맞추고 작가에게는 크게 신경 쓰지 않은 이유가 어느 정도는 나의 성향 탓이기도 할 거다. 나는 특히 주위 사람들에 비해서 ‘얼음’이 잘 되는 사람으로서 멈춰 버릴지도 모르는 상황을 만들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아니, 상당한 애씀이 필요한 상황이기에 너무 힘드니까 차라리 멀어짐을 택하는 편이라고 해야 옳을지도 모르겠다.
어렸을 때부터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고, 특히 소설을 좋아해서 비문학보다는 문학에 치우쳐 책을 읽었다. 대학에 들어가서는 건축을 전공하며 자연스럽게 소설과 더불어 건축 및 예술, 디자인 분야로까지 독서가 확장되었다. 또 한 해 한 해가 지나고 나의 몸과 마음이 보다 섬세해지고 더 복잡해지면서 심리 및 상담, 자연과 과학, 인문과 사회에 이르기까지 점점 더 관심사는 넓어졌다. 그 와중에도 소설을 놓지는 않았고 어느 때고 책을 골라야 할 때면 소설을 우선순위로 손에 들곤 했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비문학을 읽으면서 책의 내용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주제에 관심이 깊어졌고 기회가 닿는 한 그에 관한 강의 및 강연회에 공부하는 마음으로 참석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아무래도 건축가들의 책을 많이 읽게 되었는데 현대 건축을 하는 살아있는 외국의 건축가들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이루어지는 귀중한 만남의 시간이나, 국내의 유명한 건축가 혹은 교수님들의 책을 읽고 직접 강의를 들으며 그분들과 가까이서 만나는 시간이 특별히 마음에 다가왔다. 물론 나는 질문을 거의 하지 않았다. 하고 싶은 질문이 있어도 용기가 나지 않기도 했고 얼음이 되던 건 그때나 지금이나 별반 다름이 없어서. 건축을 공부하고 설계사무실을 다닐 때는 고집이 세고 지기 싫어하고 상당히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내향적이고 내성적인 성향을 자기 자신에게만큼은 숨길 수가 없다. 그렇다고 호기심과 의욕이 없는 건 아니어서 많은 배움이 있었고 더 목말라져 분야를 넓힌 독서로 조금이라도 단물을 마시려 했던 것 같다. 인간을 생각하고 자연과 함께하는 건축 설계를 할 때 도움이 많이 되었다. 그리고 지금, 건축을 하지 않는 지금에도 삶을 풍요롭게 해준다. 어디가 어떻게 좋냐고 콕 집어서 말해달라고 한다면 목록을 만들어서 하나씩 얘기해 줄 수는 없겠지만 나 자신이 추구하고 나아가는 방향에 있어 삶에 있어 기댈 곳이 있다는 건 확실하다. 읽는 사람으로의 정체성은 지속될 것이다.
지난주부터 입자와 파동(Particles & Waves)이라는 주제로 2024 서울 국제 작가 축제(SIWF Seoul International Writer’s Festival)가 진행 중이다.
‘서울 국제 작가 축제는 국내 독자들의 문학 향유 기회를 확대하고, 한국문학과 세계문학이 서울을 무대로 쌍방향 교류하는 토대를 만들고자 문학을 매개로 하여 세계와 언어, 삶과 문학, 작가와 독자가 이루는 다층적인 힘에 주목하여 국제적 규모와 위상을 갖춘 축제로 발돋움하고자’ 한국문학번역원이 주최하여 진행되는 행사다. 2006년부터 2년에 한 번씩 진행되다가 2018년부터는 매년 열리고 있었는데 나는 작년에 인터넷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그만큼 SNS에 가깝지 못하고 정보 또한 부족한 나였음을 알 수 있다.
작년에 참여하고 싶은 프로그램이 여럿 있었는데 시간이 맞지 않기도 했고, 시간이 되고 참여를 원하는 프로그램이 있더라도 그들은 이미 대부분이 매진 이었다. 축제가 진행되는 위치가 나의 동선과 멀리 떨어져 있어서 접근성도 편하지 않아 단 하루도 가보지 못했다. 나에게 처음이라 낯설어 주저함도 한몫을 단단히 했을 것이다. 2023 서울 국제 작가 축제가 끝나고 SNS에 올라오는 사진과 영상을 보며 그 장소에서 그곳의 분위기라도 느껴볼걸, 예매가 가능한 프로그램에 하나라도 참여해 볼걸, 하는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이런 아쉬운 마음을 갖고 있던 찰나에 최은영 작가님의 신간 소설집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가 나왔다. 출간 기념으로 규모가 큰 도서관에서 출판사 주최의 북토크가 있을 거라는 소식도 들었다. 충동적으로 예매를 했고 그 북토크가 예전의 마음을 불러왔다.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더라도 존경하는 건축가들의 얼굴과 목소리를 가까이서 듣고 나의 숨으로 만드는 작업이 일어나던 그날들의 마음이 올라 온 거다. 온라인으로 여러 번 북토크에 참여해 봤고 작가님이 말하거나 대화하는 영상을 많이 보았는데도 한 장소에서 오프라인으로 이루어지는 친밀함은 또 달랐다. 소설을 쓰고 있는 지금의 나에게 꼭 필요한 순간이었다고 해야 할까. 이날 이후에 나의 마음에 울림을 주는 소설을 쓰는 작가님들께 가능하면 가까이 다가가서 세밀한 기운을 느끼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2024 서울 국제 작가 축제는 미리 알고 있었다. SNS를 자주 살펴보았고 기대하고 있었다. 일주일 정도의 짧은 일정이지만 위치가 적당했다. 나의 동선에서 벗어나지도 않았고 익숙한 동네였다. 입자와 파동이라는 주제도 흥미롭고 국내외 다양한 작가들의 참여하는 프로그램들에 관심이 갔다. 하지만 여전히 시간을 맞추기는 쉽지 않아 잠시라도 듣기 위해 몇몇 프로그램의 라이브 스트리밍을 예매했다. 온라인 방송 예매를 받지 않는 프로그램도 있어 아쉬웠지만 그래도 조금이라도 참여할 수 있음에 감사하는 마음이었다. 그러던 중, 완독 챌린지 독파의 초대로 앞좌석에 앉아 프로그램에 참석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SIWF에 참여하려면 포기해야 하는 일이 있었고 포기하고 참여한 프로그램이 [작가, 마주보다] 황인찬 시인과 이르사 데일리워드 시인의 ‘뼈와 살의 포옹’과 최은미 작가님과 엘레나 메델 작가님의 ‘별개의 질서’이다. 오랜만에 작가님들의 책을 다시 꺼내 읽었고, 새로운 외국 작가님을 알게 되어 미리 작품도 읽고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포기한 일이 하나도 애석하지 않을 정도로 생각의 거리가 많이 있었던 시간이었다. 라이브 스트리밍으로 참여한 프로그램에서 작가님들의 말이 연결되어 나오기도 하고, 작가가 작가를 바라보는 시선과 서로의 작품과 각자의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이 인상적이기도 했다.
그중 정체성에 관한 질문과 대답에 머물러 본다.
스페인어로는 자신을 설명할 때 직업을 얘기하며 영어의 be 동사처럼 자신이 어떤 사람이라고 말한다고 한다, 예를 들어 ‘저는 작가입니다’, ‘저는 교수입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직업과 동일하게 표현한다는 얘기다. ‘작가’라는 명사에 중점을 둔 표현 방법이다. 한국에서도 이와 비슷하게 직업을 이야기하는데, 몇몇 작가님들은 자신을 소개할 때 ‘작가 누구입니다’라고 소개하기보다는 ‘소설을 쓰는 누구입니다’ 이렇게 소개하기도 하는 걸 종종 보고 들었다. 이는 앞선 표현과는 달리 ‘쓰다’라는 동사에 중점을 둔 표현 방법일 것이다.
나도 나에 대해 이야기할 때 보통은 ‘글을 씁니다’, ‘영어를 가르칩니다’, ‘책을 읽어주고 그와 관련된 활동을 합니다’, 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다. 이 모든 걸 한 단어로 선생님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있지만 스스로 그 단어를 잘 사용하지는 않는다. 선생님이라고 하면 단순히 학교 선생님을 떠올리는 경우가 많아서이기도 하고, 내가 하는 다양한 활동들은 ‘선생님’이라는 명사보다는 ‘쓰고, 읽고, 가르치고, 행하는’ 동사로 더 잘 표현된다고 생각되기도 해서다.
표준 국어 대사전에 보면 정체성은 ‘변하지 아니하는 존재의 본질을 깨닫는 성질. 또는 그 성질을 가진 독립적 존재’라고 나와 있다. 자신을 나타내고 알 수 있는 말이 정체성일 텐데, 각자의 상황과 위치에 따라서 다른 ‘나’가 나온다는 걸 잊지 않게 되는 주제였다. 순간순간 달라질 수 있는 나의 정체성을 생각하며 흔들리고 있는 요즘의 나를 굳이 정의하지는 않아도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이번 2024 서울 국제 작가 축제를 통해 나는 또다시 새로운 숨을 받아서 내쉬고 있다. 일 년에 단 한 번이라도 내가 좋아하는 작품을 집필하시는 작가님과의 내적 친밀한 시간으로 나를 다독이고 계속 쓰면서 살아갈 수 있는 용기와 힘을 받아야겠다. 나를 위해서.
나는 읽는 사람이고, 쓰는 사람이고, 가르치는 사람이고, 만드는 사람이고, 읽어주는 사람이고, 활동하는 사람이고, 결국에는 사랑하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