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라라 소소 85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는 질문은 저에게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는 질문과 거의 비슷하게 들립니다. 이에 저의 대답도 비슷할 거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13 예수님께서 카이사리아 필리피 지방에 다다르시자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14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 15 예수님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16 시몬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마태 16,13-16)
앞의 질문에는 “누구 시긴요, 예수님이시죠.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요. 그런데요, 예수님...” 이렇게 여러 가지 말이 덧붙여 나올 것이고, 뒤의 질문에도 “예수님을 사랑하죠. 당연하잖아요. 그런데요, 예수님...” 이렇게 똑같이 중언부언하며 대답하는 모습의 저가 눈에 선합니다. 예수님과 조금은 가깝게 느끼기 때문에 드릴 수 있는 대답이자 고백이자 응석의 한 모습일 수 있는데, 예수님과 처음부터 친했던 건 아닙니다. 그래서 제가 예수님을 마주 보았던, 어쩌면 처음으로 제대로 바라보고 마주 보며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 우리와 똑같은 모습으로 육화 되어 오신 그리스도로 인식했던 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보았습니다. 제가 가톨릭 청년성서 모임을 시작하기 전의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그들과 함께 아침을 드신 다음, 15 시몬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 16 예수님께서 다시 두 번째로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17 예수님께서 세 번째로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므로 슬퍼하며 대답하였다.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젊었을 때에는 스스로 허리띠를 매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다. 그러나 늙어서는 네가 두 팔을 벌리면 다른 이들이 너에게 허리띠를 매어 주고서,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 19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어,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할 것인지 가리키신 것이다. 이렇게 이르신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요한 21,15-19)
저는 외가가 가톨릭 신앙으로 유아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하느님 아버지가 너무 당연한 삶을 살아왔습니다. 미사를 드리든, 드리지 않든 상관없이 하느님과 늘 함께 있다고 생각하며 자랐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삼위일체 하느님보다는 하느님 아버지가 제일 저에게는 가까웠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계신 분, 성탄과 부활의 기쁨을 느끼며 그 시기에는 조금 더 생각하게 되는 분으로, 그리고 성령은 그 기운, 정도로만 인식하며 살았습니다. 집안 곳곳에 십자가가 있고 가장 가까이 제 눈앞에 예수님이 존재하고 있었지만, 예수님을 부르는 것도 예수님께 기도드리며 말씀을 건네는 것도 약간은 어색했다고 해야 할까요, 그런 느낌이 없지 않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항상 기도할 때마다 “하느님 아버지 제가요”, “하느님, 오늘은요”, 이런 식으로 말씀을 건네곤 했습니다.
저는 건축을 전공했습니다. 학교 다닐 때도 졸업하고 설계사무실에서 일할 때도 작업이나 일 핑계로 주일에 미사를 잘 드리지 않고 기도도 소홀히 하며 지냈던 날 중, 삶에 있어서 큰 시련이 다가왔습니다. 이 시련은 힘든 만큼 삶의 변화가 되기도 했는데, 예수님께 다시 돌아오는 계기가 되었던 사건이기도 합니다. 그 사건이 없었다면 어쩌면 지금도 대충대충 미사만 드리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저에게 하루를 버티기도 힘들 만큼의 큰 고통이었는데 집에서는 울 수가 없었습니다. 부모님께서 더 힘드실 수 있는 상황이었거든요. 그래서 집에서는 괜찮은 척 잘 지내는 척 행동했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렇지 않을 수가 없었죠. 연기하거나 속이지 않고 어딘가 저 자신일 수 있는 곳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갈 수 있는 곳도 생각나는 곳도 성당밖에 없었습니다. 성전에서 커다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앞에서 한없이 울었습니다. 미사를 드리면서도 울고, 성체 조배실에서도 울고 울음은 그치지 않고 계속 흘렀습니다. 조금씩 울음이 잦아들 무렵, 그제야 비로소 십자가의 예수님이 제 눈에 제대로 들어왔다고 해야 할까요. 예수님의 고통, 예수님의 사랑이 느껴졌고, 나를 지켜봐 주시고 쓰다듬어 주시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습니다. 어느 날은 한없이 고통스러운 모습으로 예수님은 저를 바라보았습니다. 다른 날에는 위로해 주는 다정한 표정으로 제 앞에 계셨습니다. 또 어느 날은 미소 짓고 있는 듯한 예수님을 느꼈습니다. 예수님은 저에게 제가 기댈 수 있는 분, 언제든 바라볼 수 있고 마음껏 울고 웃고,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봐 주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때 겪은 시련, 그 사건을 계기로 자신에 대한 분노와 원망 같은 걸 안고 있었는데 어디로 분출할 줄 몰랐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호기심이 더 생겼고 더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서 청년 성서모임 모집을 보았을 때 주저하지 않고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 몇 년이 흐르면서 많은 게 바뀌었고 건축은 하지 못하게 되어서 약간의 시간적 여유도 생겼습니다. 덕분에 성당에서 청년 활동도 하고 성서모임도 꾸준히 하고 다양한 피정에도 참석하면서 조금씩 더 예수님께 다가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신약에서 예수님을 알게 되어서 좋았고, 관상기도를 하면서 예수님을 만났고 더 가까워지게 된 것 같습니다. 예수님과 가까워질수록 “예, 알겠습니다”, 바로 대답은 하면서도 늘 “그런데요, 예수님...”하며 말을 덧붙이고 웅얼거리면서 응석도 부리고 투정도 부리고 감사의 말도 자주 하곤 합니다.
요즘은 매일 요한복음을 읽고 말씀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역시 결국에는 사랑이구나, 하는 생각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평생 느껴왔던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도우심이 저를 감싸고 있다면, 예수님은 저에게 있어서 기댈 구석입니다. 앞으로도 투닥투닥거리고 투덜투덜거리면서 예수님과의 관계를 만들어 나갈 것 같습니다. 더 깊게 예수님의 마음을 알고,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를 내 안에 모시고 그분 닮은 모습으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보살핌과 성령의 힘이 저를 지켜주리라 믿고 의탁하며 기도합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