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라라 소소 90
8월이 시작되었다.
7월 말과 8월 초가 여름에서 가장 더울 때여서인지 사람들이 여름휴가를 많이 떠나기도 하고, 어디든 극성수기이기도 하다. 설계 사무실에서 일할 때는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을 크게 타지 않고 꾸준히 바빴던 기억이 있고, 그나마 조금 여유로울 때가 겨울이지 않았나 싶다. 그래서 선배와 스노보드를 타러 많이 다녔었나, 하는 생각이 불현듯이 드네. 어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칠 때는 여름과 겨울은 방학이 있어 아이들은 돌아가면서 수업을 빠지더라도 선생님들은 휴가 생각할 새도 없이 오히려 더 정신없던 기억이 있다. 그럼에도 원어민 선생님들은 이 방학 기간을 놓치지 않고 활용하여 휴가를 다녀오곤 했는데, 아무래도 일이 년 하는 타국 생활에서 축제도 행사도 많은 이때가 여행에는 적합해서였을 거다. 그 뒤로는 프리랜서의 삶을 살고 있어서 굳이 성수기나 극성수기에 안 그래도 어디서나 사람이 평소보다 많은데 돈을 더 지출해 가면서까지 여행이나 휴가를 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고 있다. 물론 가족 여행은 오빠 내외의 휴가 일정과 조카들의 수업이 없는 날을 기준으로 정해지므로 나의 마음이 어떻든 날짜를 정할 권한은 내게 없다.
친구 1이 휴가를 맞아 친구 2와 함께 부산으로 떠났다.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3박 4일 동안 먹고 쉬고 책 읽고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다가 오려고 생각하며 특별한 일정을 정하지 않고 떠났다. 일요일 밤부터 월요일까지 폭우가 예정이라 걱정했는데, 다행히 월요일에는 밤새 그렇게 심하게 비가 내렸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폭염이 돌아왔다.
친구 3과는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은 만나서 같이 읽기로 했던 책 얘기도 하고 한 달간의 삶 얘기도 나누곤 한다. 우연히 시작된 이 모임에 **독모라는 이름을 붙이고 뿌듯해하고 있지만 멤버는 우리 둘 뿐이고 앞으로도 우리 둘 이외에 더 이상은 늘어나지 않을 듯하다. 친구 3도 이번 주 일주일이 회사 전체 휴가라고 하며 목요일부터 일요일까지 남자 친구와 3박 4일 동안 부산으로 여행을 간다고 했다. 해운대 근처에는 숙소가 없기도 하고 너무 비싸서 적당한 호텔을 서면에서 겨우 구했다고 한다.
친구 1 & 친구 2와 친구 3은 서로 아는 사이가 아니다. 얼굴조차 모른다. 친구 3이 인스타를 거의 하지 않으므로 사진을 볼 일도 없었을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친구들이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일주일을 꽉 채워서 부산에 있는다. 그 생각만으로도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렸고 부산이 좋아서 매년 가을마다 부산국제영화제 기간을 약간 껴서 아꼈던, 아니 그간 일만 하느라 쓰지 못해서 쌓여 있던 휴가를 살짝 썼던 게 기억났다. 몇 년 후 프리랜서가 되고서는 편안히 일주일씩을 머물다 오곤 했다. 해운대 바다 근처의 게스트 하우스에서 머물면서 느긋하게 일어나서 토스트와 커피로 아침 겸 점심을 먹고, 해운대를 산책하고 책을 읽고, 툭하면 해운대 성당에 가서 머물렀던 기억. 밤에는 시장 근처에 있던 국숫집에 가고 시장 안에서는 국밥을 먹었던 기억. 전철을 타고 보수동 책방 골목에 가서 하염없이 책을 구경하다 마음에 드는 책을 발견하고는 빨리 읽고 싶어서 발을 동동 구르던 기억. 나만의 아지트라 생각한 건물의 한 북카페에서 작은 창으로 밖을 내다보며 쉬고 책을 읽었던 기억. 영화제에서 보고 싶었던 영화를 예매하지 못하면 일반 극장에 가서라도 영화를 보던 기억. 영화제 거리는 사람으로 들끓었지만 약간 외곽의 극장에는 사람이 없어서 너무나 편안하고 시원하게 영화를 보았던 기억. 예상치 못했던 무대인사로 감독과 배우들을 만나서 기쁘고 놀랐던 기억. 영화를 보며 살며시 노트를 꺼내 잊고 싶지 않은 장면을 스케치하던 기억. 부럽다고 말하던 친구들이 주말을 이용해 부산에 와서 함께 했던 그 시간들의 기억.
나는 어디를 가든지 유명한 곳이나 먹거리보다는 골목을 걷고 풍경과 사람을 바라보고 커피를 마시고 책을 읽고 바람을 쐬면서 지내는 걸 좋아하는데, 부산이 나에게 그런 걸 충분하게 가능하게 해 준 공간이었다. 숨이 막힐 때, 쉼이 필요할 때, 여유가 생겼을 때, 언제든 부산이 떠올랐다. 친구들이 오지 않았으면 부산의 곳곳을 다녀보지 못했을 텐데, 친구들 덕분에 이곳저곳 다니기도 해서 그 나름의 경험이 또 좋았다. 코로나가 터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갔던 부산 여행에는 동행인이 있었는데, 생각하면 미소가 지어지고 기쁜 기억이 대부분이지만 그 여행이 끝나고 집에 왔을 때 사고가 있었고 나는 그 이후로 혼자서 부산에 가본 적이 없다.
친구들 덕분에 마음이 아프지 않고 부산이 떠올랐다. 이런 마음, 오랜만이다.
혹시라도 친구들이 부산에 함께 가자고 했다면 어땠을까.
좋겠다고 설렌다고 말은 하면서도 결정에 있어서는 망설였겠지.
내가 다니던 시절의 부산과 지금의 부산은 많이 달라졌을 거다. 내가 걷던 길들도 서울도 풍경이 많이 변했다. 좋아하던 카페가 이탈리안 레스토랑으로 바뀌었고, 나무들이 사라졌고, 도로가 깔렸고, 흙이나 꽃이 줄어들었다. 건물이 들어서기도 했고, 오피스텔로 바뀌기도 했다. 그런 풍경에 점점 익숙해져 간다. 옛 기억은 희미해지고 일부러 기억하려 하지 않으면 무심히 지나가기도 한다. 관심과 신경이 다른 쪽을 향하여 있다가 돌아오고 또 다른 곳으로 방향을 바꾼다.
사실, 부산을 대체할 장소가 필요했다. 숨을 쉴 공간과 쉴 수 있는 공간과 여유로움을 만끽할 공간이 필요했다. 제주도에 갔을 때, 부산이나 제주도나 집에서 가는 시간과 경비가 비슷하다는 걸 알고 제주도가 나의 부산이 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부산은 부산이고 제주도는 제주도였다. 제주도가 좋았고 머물고 싶은 마음이 들기는 했는데도, 나의 마음속에서 부산이 될 수는 없었다.
다시 부산이 내 마음속의 공간으로 돌아오는 날이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