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라라 소소

나는 정말 네가 좋아,

- 라라 소소 92

by Chiara 라라


신용카드의 연회비 12,000원이 청구되었다. 신용카드의 사용 여부와는 상관없이 신용카드를 소지하고 있으면 유효 기간 동안에는 일 년에 한 번, 연회비를 내야 한다. 은행에서 발급받은 두 종류의 신용카드를 가지고 있다. 이전에는 혜택에 따라서 다르게 사용하는 신용카드가 더 있었으나, 이제는 다 거래를 중지하고 딱 필요한 카드만 남겼다. 신용카드를 거의 쓰지 않는다. 몇 년 전, 생활이 불안하게 흔들리면서부터 되도록 체크카드를 사용하고 있다. 체크카드의 사용은 통장에 들어 있는 만큼, 많이 넘치지 않도록 지출을 조절하는 데 도움이 된다. 물론 통장에 잔고가 없거나 병원비 등으로 큰 지출이 생길 때는 어쩔 수 없이 신용카드를 사용한다.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럴 때는 신용카드의 존재가 감사하게 느껴진다.


지금은 8월. 올해 신용카드 사용 내역을 살펴보면 1월 말 응급실에서 병원으로 연결해 주어 여러 번 검사차 병원에 다니셨던 아버지의 진료비가 있다. 다행히 수술은 보류되었지만 2월에 병원에서 받은 검사만 해도 수차례이고 처방받은 약도 종류별로 다양했다. 날이 풀리고 5월에는 아버지 생신, 어린이날, 어버이날이 초에 비슷하게 몰려 있어서 제주도로 가족여행을 다녀왔다. 부모님과 오빠 내외, 그리고 쌍둥이 조카들 둘에 나, 까지 일곱은 적은 숫자가 아니다. 조카들이 초등학교 2학년이고 워낙 씩씩한 남아여서 성인과 맞먹는다. 이때 비행기 티켓과 숙소 등, 곳곳에서 신용카드를 사용했다. 7월 말에는 조카들 학교가 방학을 했다. 유치원 다닐 때부터 조카들은 여름과 겨울 방학에 일주일씩을 서울집에서 보낸다. 무얼 하고 놀아야 할지 어디를 가야 할지 늘 고민이 되는 조카 돌봄 주간이다. 올여름은 일주일이 채 되지 않아 캠핑을 갔으니 평소보다 짧았는데 신용카드 사용은 비슷했던 것 같다. 이렇듯 봄, 여름, 가을, 겨울 한 차례씩은 신용카드를 사용할 일이 생기곤 한다.




대학 친구 썬과는 취향이 비슷하다. 우리는 종종 둘이 따로 만나곤 했다. 책을 좋아해서 읽은 책 얘기하는 데만 하루가 훌쩍 지나기도 하고, 미술이나 전시회에도 관심이 많아 괜찮아 보이는 전시가 있으면 미술관이나 박물관에 함께 찾아가기도 했다. 이십 대의 어느 날, 우리는 서울 시립 미술관에서 하는 전시에 가는 중이었다. 시청역에서 만나 점심을 먼저 먹고 덕수궁 돌담길을 천천히 걸어 미술관을 향했다. 날씨가 쨍하니 하늘이 맑고 구름이 예뻤다. 서로의 얼굴이나 옷차림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데, 날씨만은 선명히 기억난다. 약간의 단풍이 시작되고 있는 가을의 어느 날이었을 거라 생각된다. 아니면 여름이 지나가려는 무렵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덕수궁 정문의 왼쪽에서 시작하는 돌담길을 따라 예스러워 정감 있는 돌담과 하늘에 걸려있는 우아한 기와를 보며 천천히 걷다 보면 정면으로 아름다운 정동교회가 눈에 들어온다. 정동 제일 교회는 우리나라 최초의 개신교 교회 예배당인데 건축을 전공하던 우리는 이미 공부했던 교회이기도 했고 이전에도 여러 번 와 봤던 곳이기도 했다. 그 당시에 나는 학과 건축 사진 동아리의 일원이었고, 출사를 핑계로 궁궐도 미술관이나 박물관도 성당이나 예배당도 많이 찾아다니곤 했다. 모두가 모여 있는 곳이 덕수궁길이고, 시립 미술관은 이곳에 있고, 썬과 나는 정동 교회 건너편에 있는 시립 미술관의 입구로 방향을 틀어 올라가려고 하고 있었다.


그때 어떤 여성분께서 우리에게 말을 걸었다. 롯데 카드를 설명해 주시며 이 카드를 발급받으면 그날 전시하고 있는, 우리가 마침 관람하려고 하는 시립 미술관의 전시회 입장권을 준다고 했다. 가입한 해와 그다음 해의 연회비까지 면제해 줄 것이고, 이런저런 문화 혜택이 많은 카드이니 만들면 좋지 않겠냐고 하셨다. 혹시라도 사용하다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으면 연회비를 내기 전에 해지해도 되니 만들면 서로에게 이득이라고 우리를 설득했다. 요즘에는 신용카드 발급받기조차도 조금 까다로운 것 같던데, 그때는 그런 게 덜 했던 모양이다. 우리는 혹 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 미리 예매를 하지 않고 무작정 찾아왔던 전시회의 입장권을 받을 수 있었고, 연회비를 당장 내지 않아도 되니 손해를 볼 게 전혀 없었으니까. 이것저것을 작성하고 카드가 생겼다. 우리 둘 모두에게 롯데카드가 없었는데 그때부터 생기게 되었다.


우리는 이 카드를 꽤나 쏠쏠하게 사용하였다. 그다음 해였던가, 아무튼 그리 오래지 않아 부산 여행을 갔는데, 부산에서 평소에 쓰던 교통카드를 사용할 수 없어 난감하던 차에 그때 발급받은 롯데카드 사용은 가능하던 걸 알게 된 것이다. 문화 관련 혜택이 있던 카드여서 예술 문화 쪽 할인도 받을 수 있었고, 많이는 아니었지만 롯데 포인트가 쌓여서 그걸 사용할 수도 있었다. 그렇게 몇 년을 사용했다. 그리고 혜택이 달라지고 다른 카드로 바뀌고 한 번 더 발급받아서 사용한 후에 나는 롯데카드와의 거래를 끊었다. 지금은 롯데카드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로부터 십 년이 지나 삼십 대의 어느 날, 썬과 나는 예쁜 카페에서 맛있는 커피와 조각 케이크를 먹으며 책 얘기를 나누었다. 카페에는 오래된 소품들이 있었고 분위기가 예스러웠다. 우리 둘 다 건축에서는 멀어졌지만 여전히 좋아하는 건 비슷했고, 관심사도 조금 더 넓어졌을 뿐, 많이 바뀌지는 않았다. 그 분위기 속에서 시간을 보내고 근처에 있는 서점에 갔다. 서로를 위한 책을 골라서 선물로 줄 샘이었다. 계산대 앞에 선 썬이 꺼낸 건 롯데카드였다. 아직도 썬은 그 카드를 사용하고 있었다. 십 년이 넘도록 변하지 않는 썬 앞에서 ‘나는 정말 네가 좋아’, 하고 소리 지를 뻔했지만, 마음으로만 수십 번 부르짖었다.




1만 2천 원의 연회비가 청구된 신용카드는 2025년에 단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카드였다. 8개월 동안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는데, 앞으로 쓸 일이 있을까. 지난겨울, 봄, 그리고 여름까지 사용한 카드가 있는데 그걸로 괜찮지 않을까. 단돈 1만 2천 원을 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며 신용카드가 과연 나의 삶에 필요한지까지 생각을 해보게 된다. 그리고 썬을 떠올리며 미소를 짓게 해 준 것만으로도 수확이 있었다고 생각하기로 한다. 신용카드를 쓸 일이 없으면 좋겠지만, 여름을 마무리하고 곧 다가올 가을과 겨울에 – 겨울에는 엄마 생신이 있다! - 신용카드 사용할 일이 생기면 이 카드를 써야겠다고 쓸데없는 다짐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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