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라라 소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 라라 소소 110

by Chiara 라라

내가 살고 있는 건물은 오래되어 삐걱거리는 게 많다.


처음 이사를 왔을 때 제일 놀랐던 건, 뜨거운 물이 잘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미지근한 물이 나오기도 하고 온수를 틀면 물이 졸졸 나와서 거품이 제대로 닦여지지 않는 기분이 들었다. 중앙 집중 난방이라 사람들이 물을 많이 쓰는 시간대나 아랫집이 물을 쓰고 있으면 뜨거운 물이 약하게 나온다고,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여름에도 따뜻한 물로 샤워하는 나로서는 겨울이 너무 길게 느껴졌고 샤워를 하며 늘 추위에 떨어야 했다. 이사 전 집을 보러 다녔을 때 수압 확인을 꼭 하곤 했는데 여기는 분명 부동산 아저씨가 물을 틀어주면서 꼭대기 층이지만 수압이 좋아서 물도 잘 나온다며 세게 나오는 물줄기를 보여 줬었다. 찬물은 언제든지 곧게 세게 잘 나온다. 이전에는 온수 문제가 크게 있었던 적이 없어서 온수로 수압을 확인했어야 하는 걸 알지 못했다. 오래된 건물이지만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도 옥상 열을 그렇게 많이 받지 않아 사람들이 말하는 만큼 불편하지도 덥지도 않을 거라고 아저씨는 말했었다. 난 부동산 아저씨를 믿었지. 그렇게 순진한 영혼도 아니면서 말이다.


이사를 온 날 주방 서랍에서 하얗고 길고 동그란 물건을 네다섯 개 발견했다. 샤워기 필터였다. 샤워기에 필터를 껴서 써 본 적은 없었지만, 몇몇 집에서 사용하는 걸 본 적이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샤워기 필터는 부유한 사람들만의 전유물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사실 최근까지도 난 샤워기 필터가 상당히 고가의 물건이라고 여겼다. 고가의 물건도 물론 있을 거지만 다이소에서도 파는 걸 알게 되었고 사람들이 손쉽게 구입해서 사용하고 있다는 것도 최근에야 알게 된 것이다. 집주인이 물에 민감한가 보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걸 쓸 일이 없을 거라 여겼다. 미련 없이 버렸다.


녹물이 종종 나왔다. 눈에 보이게 짙은 색의 녹물이 나오기도 했고, 자세히 봐야지만 미세하게 투명하지 않은 물이 나오기도 했다. 물을 한번 쏟아내고 쓰기도 하고 그냥 모른척하며 넘기고 쓰기도 했다. 다행히 내 피부는 물에 예민하지는 않아서 지낼만했다. 그런데 문제는 시간이 조금 지나면 타일이나 실리콘에 주황색으로 녹물이 쌓여 있다는 거였다. 작은 화장실 청소를 자주 하는 것도 너무 힘들었다. 이렇게 쌓일 정도인데 내 피부에는 얼마나 많은 녹물이 묻었을까, 양치질하면서 입안에도 머금는데 괜찮은 게 맞나 걱정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나의 게으름과 둔함으로 번번이 생각만 조금 하다가 다음으로 미뤘고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언니는 물의 중요성을 나에게 강조했다. 전에는 한 번도 내가 겪고 있는 여러 가지 물의 문제를 언급한 적이 없어서 언니는 모르고 있었기에 말하지 못했던 거였다. 세뇌당했고 언니는 자꾸만 물어봤다. 바꿨는지 샀는지 사용해 보니 어떤지 등등. 여차저차 차일피일 미루고 대충 얼버무리다가 한 달이 지나서야 나는 결심했다. 아, 사야겠다. 바꿔야겠다. 무엇보다 다이소에 가야겠다고.


사람을 폐인으로 만드는 데 한 달은 긴 시간이 아니다. 나는 한 사건에 휘말렸고 몸도 마음도 황폐해져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무기력하게 연말을 보냈다. 그리고 새해가 되어서도 기운이 영 들지 않았는데, 갑자기 반짝했다. 다른 건 몰라도 이걸로라도 시작해야겠다고. 그래서 다이소에 갔다. 무얼 사야 하는지 알지 못한 채 오랫동안 서성이며 살펴보다가 하나를 골랐다. 물론 비싼 걸 사지는 않았다. 그리고 집에 와서 갈았다. 샤워기 필터가 생겼다. 당장 물이 깨끗해지고 온수가 콸콸 나오고 화장실 타일과 실리콘이 제 색을 유지하는 등의 극적인 변화를 겪지는 않을 거라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나는 이 작은 하나의 움직임으로 다시 살아가야겠다는 작은 힘을 얻었다.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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