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베리아의 딸, 김알렉산드라>, 김금숙 만화, 정철훈 원작
정아야,
어제는 광복절이었어.
학교 다닐 때 국사를 좋아하지도 않았고 시험공부 말고는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아서 우리나라 역사에 대해서는 부끄러울 정도로 아는 게 없어. 조금이라도 알아야겠다는 생각을 한 게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달마다 과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에서 벌어졌고 우리나라와 관련된 어떤 사건의 때가 되면 그에 대한 자료와 책을 조금씩은 찾아 읽으려고 하고 있어. 몇 해 전부터는 여성 독립운동가에 관심이 생겨서 찾아보고 있는데 자료가 많지는 않은 것 같아. 활발히 활동한 운동가들이 분명히 있을 텐데, 그 시대의 여성은 사회적인 위치상으로도 문화적이나 대중적 인식상으로도 자유와 평등과는 거리가 멀었으니까 기록도 없고 기억에서 멀어져 가는 게 안타까워.
광복절이라고 하면 우리나라가 일제 강점에서 해방되어 독립을 한 날로 알고 있어. 1945년 8월 15일이고 올해가 78주년이라지. 하지만 독립을 하고 나서도 대한민국 정부는 그로부터 3년이나 지난 뒤인 1948년에 수립이 되니까 2차 세계대전의 종식, 일본의 물러남, 정도로 생각이 드는 것 같아. 그래도 그게 어디야. 일제의 강압에서 벗어난 거. 지금의 삶으로는 상상이 가지 않아. 조부모, 증조부모 세대가 직접 겪은 그 시대를 우리는 그들에게 듣고, 책을 읽고 영상을 보며 이론적으로만 알고 있게 되는 거야. 아무거에도 관심이 없거나 즉흥적인 즐거움과 눈앞의 희로애락에 더 관심을 두는 대다수 현세대를 바라보고 있자면, 관심을 두고 알고자 하는 이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크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냥 알기만 해도 되는 걸까 싶기도 하고, 이런저런 생각도 많이 올라와.
역사에 관심이 없었으니 할머니에게 그 당시를 물어보지도 않고 자랐어. 할머니도 먼저 말씀을 꺼내신 적이 없었고, 이미 오랫동안 과거의 일, 우리와는 관련이 없는 일인 듯이 지냈던 것 같아. 나와 지금, 직접 관계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피하고 외면하고 신경 쓰지 않고 지내는 날들이 아직도 많지. 역사적 사실이든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든 사회적인 논쟁거리든, 직접 경험하고 나서는 절대로 그냥 넘어가 지지가 않는 그런 일들이 세상에 참 많은데 말이야. 알고 있고, 알아서 혹은 경험으로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고 하더라도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없고 나설 수 있는 깜냥도 안되기 때문에 여성 운동가에 대해 관심을 갖는 걸지도 몰라. 그녀들의 그 기운을 본받고 싶은 걸지도 모르고, 대리만족 같은 걸 하거나 자책하는데 몰입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올해는 어떤 책을 읽을까 고민하며 도서관을 둘러봤어. 검색대에서 ‘여성 독립운동가’라고 입력하니까 나오는 책이 거의 없더라. 그래서 ‘여성 독립’을 검색했는데도 늘어나는 건 없었어. 할 수 없이 ‘독립운동’을 검색해서 주욱 나오는 책들을 둘러보다가 여성이 나오는 두 권의 책에 눈길이 갔어. 한 권은 그래픽 노블인 <시베리아의 딸, 김알렉산드라 : 모두가 평등한 세상을 꿈꾸었던 조선인 최초의 볼셰비키 혁명가>이고 다른 한 권은 <비꽃>이라는 만화야.
그래픽 노블이라는 단어, 들어본 적 있어? 요즘 꽤 많이 나오고 있는데, 그래픽은 만화를 얘기하는 거고, 노블은 말 그대로 소설을 말하는 거야. 소설처럼 글과 내용이 담겨있는 만화라고 손쉽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아. 우리가 어린 시절에 많이 봤던, 아니 커서도 나는 만화를 꾸준히 보기는 했다만, 만화는 그림을 더 주의 깊게 보게 되는 것 같아. 지금도 내가 좋아하는 만화책들은 내용도 좋지만 그림체를 더 좋아하기도 해. 그래픽 노블은 그림이 다소 거친 것도 있고 아름답거나 작품성이 돋보이는 그림도 있고 다양한 것 같아. 특별히 그림체가 마음에 쏙 들지는 않더라도 일반 만화보다는 조금 더 내용이 깊어서 그림보다는 내용을 중심으로 보게 되니 요즘에 종종 읽고 있어. 그래픽 전기라고 어떤 한 인물에 대한 일생을 그림과 이야기로 풀어놓은 책도 있는데, 어떤 책은 꽤 마음에 들어서 소장하고 있기도 해.
<시베리아의 딸, 김알렉산드라 : 모두가 평등한 세상을 꿈꾸었던 조선인 최초의 볼셰비키 혁명가>. 제목이 참 길지. 볼셰비키 혁명가라는 강인한 단어에 흠칫하기는 했지만 평등한 세상을 꿈꾸던 조선인 여성 혁명가는 어떤 일을 했을지 궁금하더라고. 이 그래픽 노블을 읽기 전까지는 알지 못했던 인물이야. 노동자들, 농민들이 천시받던 시대, 일한 만큼 땅과 소득을 조금이라도 얻을 수 있었던 러시아로 목숨을 걸고 이주한 사람들이 많았던 그 시대. 살기 위해서 러시아로 건너갔지만 말이 제대로 통하지 않아서 억울하게 불평등 대우를 당하던 노동자들을 대변하고 통역해 주었던 여성이 김알렉산드라였어. 노동자, 농민, 여성, 남성, 누구든지 평등한 세상, 아이들에게 평등한 세상에서 살게 해 주고 싶었던 엄마로서의 마음도 약해지지 않고 멈추지 않고 강해지는 데 한몫을 한 것 같아. 말로는 많이 들어봤던 단어들과 역사적 사건들, 시대적 배경들이 우수수 지나가는데 머리가 복잡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래픽 노블이기에 조금은 덜 부담스럽지 않았나 싶어. 조선 독립과 이름 들어본 독립군들도 나와서 조금 더 확장해서 인물들에 대해 알아봐야겠다는 생각도 들더라. 이렇게 생각하고 알아보고 읽고 해도 내년 이맘때쯤이면 다시 도돌이가 되겠지만 그래도 자꾸 알아보려고 해. 정아 너도 크게 관심을 갖고 있지 않는 역사고 과거지만 네 사건을 겪고 나서는 더욱더 외면하지는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건 필시 지금 사회적인 것에만 국한되는 게 아닐 거야. 마음의 문제라고 생각되거든. 알고자 하는 마음. 알고 있는 마음. 어떻게 하지는 못하더라도 무어라도 해야겠다는 마음을 지니고 있는 것. 그건 너에 대한 나의 죄책감, 일종의 성찰이자 평생토록 지니고 갈 나의 고해일 거야.
많은 동지들을 구하고 대신 잡힌 그녀가 재판에서 여성으로 자신의 범죄를 뉘우치고 호소하면 자유의 몸이 될 거라고 재판관이 회유했을 때 했던 말이 인상적이었어.
여성으로서? 당신의 표현은 나뿐만 아니라 이 세계 인구의 반을 점하는 모든 여성을 모독했어요. 당신은 여성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고 있지요. 계급투쟁에 나뿐만 아니라 수만 명의 여성이 참여하고 있어요. 당신은 그 모든 여성에게 자신의 활동을 뉘우치라고 얘기할 건가요? 잘 들으세요. 몇 년 뒤에 극동에서, 조선에서, 중국에서, 전 세계에서 여성이 남성과 나란히 사회주의 혁명 운동에 참가할 것입니다. 내가 해 오던 일은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수만 명의 여성 가운데서 전개되어 나갈 것입니다. 만약 내가 당신의 말대로 여성으로서 자신의 범죄를 뉘우친다면, 나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배신하고 전 세계 여성 앞에 죄를 범하는 게 될 것이다.
1918년 9월 16일 향년 33세에 하바롭스크 아무르강 변에서 일본군과 백위군에게 총살당한 김알렉산드라. 백여 년 동안 수많은 김알렉산드라의 투쟁으로 우리는 이렇게 평등을 가장한 채 살아가고 있어. 완벽한 평등은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았고, 여성은 남성에게 있어서 약하고 억누를 수 있는 존재이기는 하지만 그건 또 이 사회가 풀어야 할 문제가 되겠지. 여성이 남성보다 육체적인 힘으로 비교했을 때는 약할지 몰라도 충분히 이겨나갈 수 있을 거야. 맘먹고 덤빈다면 할 수 없는 경우도 많겠지만. 요즘 너무 무분별한 폭력이 많이 벌어지고 있어. 자신보다 약자에게 약해 보이는 대상에게 그 폭력을 행사하는 게 눈에 보이는데 해결할 방법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게 현실인 것 같아서 마음이 쓰리다.
내가 여성임에, 우리가 여성으로 태어나서 싫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는 것 같아. 우리는 여성임을 오히려 즐겼을지도 몰라. 혼자가 아니라 함께여서 그렇게 의지하고 잘 지냈을지도 모르고, 엄마도 할머니도 우리 주위에 여성뿐이라 여성으로서의 삶이 애달파 보이지만 그래도 살만하다고 여기며 살아왔을 수도 있어. 남성이라는 존재에 대해서 좋은 마음을 갖거나 든든해하거나 기댈만한 곳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며 살아온 우리 배경에도 우리가 여성임을 부끄러워하거나 아쉬워하지 않았던 큰 이유가 될 수도 있을 거야. 오히려 든든한 배경이라는 남성이 없는 가정이기에 모범이 없었던 게 문제이기도 했겠지만 늘 그렇듯이 세상의 모두가 그런 건 아니니까. 그리고 우리가 아무리 잘한다고 하더라도 완벽할 수는 없는 거잖아. 눈에 뭐가 씌이기도 하고, 잘못된 판단을 하면서도 옳다고 여기기도 하고, 안타깝게도 그 결과는 당장 알 수가 없고.
평등하게 단단하게 씩씩하게 누가 보기에도 좋은 모습으로 당당히 살고 싶었어. 기대고 싶을 때도 있었고, 기대기도 했었고, 종종 기댈 구석을 찾기도 하지만 지금은 잘 모르겠어. 그게 남성이든 여성이든 상관없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여성으로 살아가는 게 좋았는데, 잘 모르겠어.
김알렉산드라는 아이들에게 평등한 세상을 주고자 했어, 그리고 표면상으로는 지금이 평등한 세상이고. 그렇지만 표면상이잖아. 재력과 권력이 있는 사람들에게 평등은 그들 세계에서만 이루어지는 일이고, 노동자들,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은 여자와 남자는 평등하지 않잖아. 이 시대에도 김알렉산드라가 분명 존재하고 있겠지. 과거와 역사를 돌아보며 현재와 미래를 바꾸고 싶어 하는 혁명가가 있겠지. 나는 왜 그렇게 하지 못할까. 약자를 지키기는커녕, 나 자신조차도 너무나 위태로운 상태에 있어버리게 되는 걸.
네가 승진했을 때, 팀장으로 있었던 그 남자가 너를 잡아먹지 못해서 안달 났던 게 떠올랐어. 남자 후배만을 키우려고 했고, 노력해서 따 낸 석사 학위도 무히사고 학사는 지방대라며 더 무시했고, 뭐든지 트집을 잡았던 그 사람. 팀장이라면 팀을 잘 이끄는 게 자신의 몫이었을 텐데, 팀의 분란을 조장했고 여성과 남성을 편 가르기 했고, 성희롱도 보이지 않게 퍼부었던 구시대적인 사람. 아니, 있어서는 안 되는 사람. 넘어가고 넘어가고 넘어갔기에 그런 사람들이 아직까지도 회사에서 월급이라는 걸 받아먹고사는 거지. 결혼은 어떻게 했는지 가정으로 돌아가서는 그렇지 않은 좋은 아빠의 모습을 하고 자기 딸은 세상에서 가장 평등하게 자라야 한다고 우쭈쭈 해주고 있겠지. 갑자기 화가 났어. 나 오늘 왜 이러지.
하루종일 네 생각만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이 정아 너에게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게 나의 머릿속인 것 같아. 나라가 독립을 하고 여성의 권리가 신장되고 세상이 바뀌고 있다고 해도 눈에 보이지 않고 드러나지 않고 드러나더라도 묻히는 일들이 너무 많아서, 그래서 난 자꾸 화가 나. 전에는 그러지 않았는데, 모른 척 했는데, 그렇게 내가 외면해 온 세월들이 쌓여서 너에게 이런 일이 벌어진 것 같아서 난 또 슬퍼지고 말았어.
보고 싶어, 사랑해 정아야.
미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