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생애>, 이승우
정아야,
지난번 편지의 시작이었던 말, 기억나?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의 숙주이다.”
이승우 작가님의 장편소설 <사랑의 생애> 첫 문장이라고 얘기했었지.
장애아동 복지관에서 그 사람을 만난 얘기를 하고 있었어. 첫인상이 비호감이었다는 얘기. 그렇게 비호감으로 첫 대면을 하고 하루 종일 봉사하는 동안에는 별로 마주칠 일이 없었어. 각자의 맡은 바가 있었고 그거에 충실하느라 옆을 돌아볼 겨를은 없었던 것 같아. 또 오랜만의 나들이라 아이들도 어른들도 한껏 들떠 있었거든.
비호감이 호감으로 바뀌는 순간이 찾아왔어. 그의 선한 눈동자. 호감의 발화.
그가 인상을 쓰고 있었던 건 허리 통증 때문이었대. 봉사를 하기로 한 날 얼마 전에 허리를 다쳐서 통증이 있었던 거야. 아프지만 봉사는 하고 싶었고, 이미 날짜가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무책임하게 안 한다고 할 수 없었던 것도 또 다른 이유였더라고.
복지관에서 준비하는 큰 행사 중의 하나가 장애아동 캠프인데. 코로나 때문에 몇 년간을 나들이조차 가지 못했다고 해. 규제가 많이 풀려서 모두가 기쁜 마음으로 나들이를 준비하게 되었고, 봉사자들이 많이 필요하게 되었던 거야. 장애아동들을 야외로 데리고 가려면 힘이 있는 어른이 필요한데, 아이가 무겁다기보다는 힘을 어떻게 조절해야 하는지 모르는 아이들도 있고, 무방비 상태로 축 늘어지는 아이도 있으니까 그 아이들을 안전하게 지탱해 줄 견고한 힘이 필요해서야. 평소보다 많은 봉사자들이 참여했어. 평소에는 복지관 안에서 여러 가지 담당으로 나누어서 봉사를 진행하는데, 청소나 설거지, 빨래 같은 일도 있고, 아이들과 놀아주거나 씻기거나 다른 활동들을 함께 해주는 그런 봉사도 있고 다양해. 캠프나 나들이를 준비할 때에는 힘을 쓸 수 있는 봉사자들을 더 모집하거나 주위의 지인들을 더 데리고 오거나 해서 평소에 마주친 적이 없거나 처음인 봉사자들도 함께하게 되거든. 그도 그렇게 처음 온 봉사자 중의 하나였어.
가톨릭 재단에서 운영하는 복지관이라고 해도 직원들과 봉사자들이 모두 가톨릭 신자는 아니야.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아도 장애인 복지에 관심이 있거나 전공을 한 사람들이 일을 하거나 봉사를 하러 오기도 하거든. 복지사라는 직업은 그렇게 복지가 좋은 편도 아니고 일도 많아서 직원들이 힘들어한다고 하더라. 그래서 봉사자들의 도움이 정말 많이 필요하다고도 들었어. 꾸준히 봉사를 오는 봉사자들도 있지만 일반 봉사보다 장애인들과 함께하는 봉사다 보니 궂은일도 해야 하니까 오래 오지 못하고 한두 번 만에 그만두는 경우도 많다고 했어. 나는 어떤 봉사자일까.
그 사람은 가톨릭 신앙을 가진 신자였어. 성당을 나서서 주위를 둘러보면 신앙인들이 그렇게 많은 것 같지는 않아. 개신교인들은 많이 보았는데 천주교인들은 유독 더 눈에 띄는 것 같지 않거든. 그 사람이 눈에 띄는 몇 안 되는 천주교 신자 중의 한 명이었던 거지.
같은 신앙을 가졌다는 것은 사랑에 큰 장점이야. 사람을 그냥 믿게 되는 것도 있어. 상대가 어떤지 오랫동안 재면서 지켜보기보다는, 일단 신앙이라는 단어 하나만으로 믿음이 생기는 거지. 같은 신앙을 가지고 같이 기도하고 같이 봉사하면서 하느님 나라로 나아가는 것. 대부분 젊은 봉사자들의 꿈일지도 몰라. 함께라는 단어와 사랑과 신앙이 하나로 이루어지는 완벽한 조화. 나도 그런 조화를 꿈꿨어.
꿈꾸는 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지는 않는 것 같아.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인연을 인간이 끊을 수는 없다고 하지만, 인간은 부족하고 미흡한 존재여서 언젠가는 그 끈을 끊어내고야 말아. 끊기지 않고 오래오래 한 신앙 아래서 사랑하며 살아가는 사람들도 분명히 있지만 내 경우는 그랬네, 그렇게 끊겨버렸네. 어쩌면 그 인연이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것이 아니고 인간들끼리 이기적으로 생각해서 맺은 인연이어서 그렇게 쉽게 끊어지는 걸지도 모르겠어. 누군가에게는 쉽고 누군가에게는 참 어려워. 나는 후자인데 나에게만 어려운 걸까.
한쪽, 끊어내는 한쪽은 쉬울 것 같아. 반면에 다른 한쪽, 끊음 받은 다른 한쪽은 어려울 거야. 끊어내는 쪽이 더 힘들고 어렵다고 징징댈지도 모르겠어. 미안한 감정이 더 깊다는 등의 변명을 하면서. 하지만 몸의 일부가 베어 상처가 났을 때 살이 붙어있을 때와 떨어지고 나서는 완벽하게 다른 존재라고 생각해. 살이 몸에 붙어있으면 아직 살아있는 것이지만, 살이 일단 떨어지고 끊어져 나가면 그건 살아있지 않고 죽어있는 거야. 그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게 나머지 한쪽, 끊음 받은 쪽일 텐데 끊어내는 쪽은 그걸 모르는 걸까. 끊어내는 쪽은 그냥 아픔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잖아. 새살이 돋아나면서 언젠가는 그 상처가 아물겠지. 흔적이 조금은 남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아물기는 하잖아. 하지만 떨어져 나간 쪽은 새살로 바뀌지도 않을뿐더러 다른 어느 곳에 달라붙지도 못해. 그냥 그렇게 까맣게 타들어 가다가 죽어버리는 거야. 사라지지도 않아. 그냥 죽은 살덩어리로 그렇게 평생을 지내야 해. 아픔은 그런 거야. 상대는 절대로 느끼지 못하고 알 수도 없는 그런 것, 당한 자만이 알 수 있는 그런 것.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의 숙주라고 했던가.
사랑이 있기에 살아갈 수 있다는 의미 같았어. 사랑이라는 게 존재하려면,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야 할 것이고 그로 인해서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갈 수 있다는 의미. 아프든 행복하든 기쁘든 슬프든 그건 사랑이라는 그 자체만으로도 살아갈 수 있고 버틸 수 있는 거야. 어느 면에서는 제대로 된 사랑이 있을 수 있고, 또 다른 면에서는 있으니만 못한 사랑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이미 그에 속해 버렸기 때문에 숙주가 사라지면 그도 존재할 필요가 없어져 버려. 숙주가 없으면 기생은 사라지겠지. 죽음을 맞이하게 되겠지.
사랑은 사람에게 삶을 줄 수도 있고 죽음을 줄 수도 있어.
삶과 죽음이 사랑이라는 흔해 빠진 한 단어로 정의된다는 것이 우습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그래, 정말로 그런 것 같아. 삶이 곧 사랑이고 죽음이 곧 사랑이야. 그만큼 우리는 사랑하고 사랑받고 그렇게 살고 있어. 단지 그것을 느끼지 못하고 알아차리지 못할 뿐이야. 사랑을 느끼고 또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사랑하는 이가 사라졌을 때, 숙주가 사라졌을 때 기생생물인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냥 죽어버리면 되겠다. 죽고 다시 살아나는 것.
정아야, 앞에서 내가, 끊겨버린 살은 죽어버리고 다시는 살아나지 못한다고 말했어. 죽음에 머물러 버리는 거야. 그렇다면 다시 살아난다고 하는 건 모순이 아닐까. 그렇네, 모순이네. 우습게도 모순이기에 다시 살아나야 하는 거라고 나는 또 말하고 있어.
어둠이 있으면 어느 곳엔가 빛이 있잖아. 다만 내가 어둠 속에 있어서 뒤를 돌아보지 않으니까 뒤에 밝은 빛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할 뿐일지도 몰라. 죽음에 속해있으면 그곳에 계속 함몰되는 경향이 있어. 살아나려는 의지도 없고, 의지라는 것을 가질 수가 없는 거야. 누군가의 도움도 사실 당사자에게는 크게 도움이 되지는 않아. 시간이 다 해결해 줄 거라는 말은 개소리고 헛소리야. 당해보지 못한 사람들이, 새살이 돋아나서 살만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소리지. 시간은 지날 뿐이고 나의 고통은 사라지지 않아. 다만 시간이 지날수록 기억이 조금씩 흐려지는 것은 있더라. 아픔, 고통, 죽음, 그것만 생각하며 그 모든 것에만 몰두하면 확실하게 또 선명하게 기억할지도 모르겠지만 그건 뇌를 혹사시키는 일이 되어버릴 테니 그만하기로 하자.
정아야, 재미있는 걸 읽었는데, 우리의 뇌는 옛날의 일들을 자꾸 기억하면 할수록 더 노화된다는 연구 결과도 있대. 과거의 일을 일부러 기억해 낼 필요는 없는 건가 봐. 그렇게 하지 말라는 연구 결과니까. 그냥 그 살점이 떨어져 나간 기억에서 조금씩 멀어지게 되는 때도 오는데 그렇다고 슬픔이 사라지지는 않더라. 다른 사람으로 치유할 수 있다는 말도 듣고 싶지 않아. 하고 싶지도 않아. 믿지 않으니까. 소용없으니까. 치유, 가능하긴 하지. 치유라는 말을 써도 된다면 말이야. 하지만 병이 아닌데 치유라는 단어는 어색하지 않나. 고통과 통증은 누군가가 사랑으로 감싸 안아 주었을 때 감소 된다고 하는데 내 경험상 감소되지는 않는 것 같았어. 그저 그 새로운 사랑에 감사하는 마음이 생길 뿐. 이렇게 진하고 깊은 어둠에 싸여 있고 죽어가는 나에게 사랑을 전해주는 그 상대에게 감사할 뿐. 그러면서 그 감사가 호감이 되고 또 다른 사랑으로 변화되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다는 건 나도 알아. 사랑은 그런 거니까.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면 그 이전의 아픔이 떠올라서 두려울 거야. 그래도 사랑으로 감싸 안아질 부분도 있어. 더 큰 사랑이 있을 수도 있고, 또 다른 아픔이 존재할 수도 있어. 그런 모든 것을 끌어안고 다시 시작하는 거야. 정말 큰 용기가 필요할지도 몰라. 사랑의 숙주가 되고 사랑하는 사람을 다시 만들게 되는 것.
여기에서 잠깐 깊이 들여다보면, 사랑의 숙주가 되었을 때, 상대를 내꺼화시키려는 즉 물건처럼 소유하고 싶어 하고 집착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생기기도 하는 것 같아. 그런 걸 조심해야 하지. 상대는 내가 약하기 때문에 나의 약한 모습을 보고 어렵게 생각하지 않고 접근했을 수도 있거든. 그런 약자에게서 강하거나 집착하는 모습이 보이면 그건 자신이 생각했던 내가 아니라고 생각할지도 몰라. 변했다고 말하는 순간이 이런 순간일 수도 있어. 누구나 자신이 완전히 약해 있을 때 에는 자신의 참모습이 나오지 않는 것 같아. 하나씩 기운을 차리면서 자신의 본모습이 나오는 것 같아. 그런 모습을 보여 줄 수 있을 때, 상대가 나의 본모습과 모든 모습을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사랑은 완성이 되는 거라 생각해.
근데 정아야, 사랑의 완성이 있을까?
하나씩 생겨나고 또다시 무너지고 또다시 그 무너진 곳을 메우는 작업을 계속해야 할 텐데, 끊임없이 말이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점이 떨어져서 죽는 아픔보다는 덜 할 것이기에 그렇게 사람들은 오늘도 사랑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 같아.
사랑이 어떤 건지 알면서도 사랑을 하고 싶은 생각이 간혹 들기도 해. 너와 나의 모습을 다 지켜봤고 그런 사랑이 지나갔는데도 다시 사랑이라는 말이 자꾸 입가로 올라오기도 하고, 머릿속에 맴돌기도 해. 사실 사랑을 하고 싶다기보다는 사랑을 받고 싶고 챙김을 받고 싶어. 내가 불안정할 때 내 옆에서 내가 안심할 수 있도록 있어만 주어도 좋겠어. 머릿속에 다른 생각을 할 수 없고 너무 혼란스럽고 화가 나고 숨조차도 쉴 수가 없을 때, 그때 그가 내 옆에 있어 줬어. 한숨을 쉬는 나의 몸을 기댈 수 있도록 어깨를 대 주었어. 캐묻지 않고 그냥 옆에 있어 주었어. 공원의 의자에서 우리는 나란히 앉아서 있었어. 나는 그의 어깨에 고개를 기대고 있었어. 같이 미사를 드렸고, 같이 기도를 드렸어. 나에게 그게 사랑이었어. 사랑은 사라졌고, 난 죽음을 선택했어. 다른 사랑은 여전히 무섭고 두려워.
미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