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문장이 아직도 머릿속에 남아 있다. "네가 선택하지 않은 것들이 너를 만든 부분도 있잖아." 그녀가 와인잔을 내려놓으며 말했고, 나는 입을 벌린 채 멈췄다. 이태원 경리단길 끝자락의 작은 와인바, 목요일 밤 열 시. 우리 테이블 위에는 반쯤 비워진 레드와인 한 병과 마른 치즈 몇 조각, 그리고 서로의 말이 만들어낸 보이지 않는 것들이 놓여 있었다.
그녀를 만난 건 오후 여덟 시였다. 회사에서 바로 온 차림이었고, 나도 마찬가지였다. 서로의 얼굴을 보자마자 "피곤해 보인다"를 동시에 말하고 웃었다. 자리에 앉아 와인을 주문하고 첫 잔을 따르는 동안 우리는 별 의미 없는 이야기를 했다. 요즘 날씨가 이상하다, 지하철이 고장 나서 늦을 뻔했다, 그런 것들. 대화에는 준비 운동이 필요하다. 바로 깊은 이야기로 들어가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나는 먼저 목소리의 온도를 확인하고 싶은 쪽이다. 오늘 이 사람의 목소리가 어떤 높이에 있는지, 웃음이 자연스러운지, 눈이 어디를 보는지. 그것을 파악하고 나서야 말문이 진짜로 열린다.
첫 잔이 반쯤 비었을 때 내가 먼저 꺼냈다. 요즘 일이 맞지 않는 것 같다고. 사 년째 같은 일을 하고 있는데, 잘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그냥 익숙해진 것 같기도 하고, 그 차이를 모르겠다고. 그녀는 와인을 홀짝이며 들었다. 끄덕이지도, 바로 대꾸하지도 않았다. 그냥 눈을 맞추고 있었다. 그 침묵이 좋았다. 내 말이 공중에 떠 있는 시간을 견뎌주는 사람. 성급하게 건져 올리지 않는 사람. 그런 사람 앞에서는 말이 스스로 착지할 자리를 찾는다.
그러다 입을 연 건 내가 말을 멈추고 와인잔을 만지작거리고 있을 때였다. "너 그거 알아? 잘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 사이에서 헤매는 건, 둘 다 가지고 있는 사람만 하는 고민이야."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건조했는데, 그 건조함 안에 단단한 것이 있었다. 위로가 아니라 관찰이었다. 내 상황을 좀 더 정확한 위치에 놓아주는 말. 나는 그런 종류의 말에 약하다.
와인 한 병이 비었고, 우리는 한 병을 더 시킬까 잠깐 고민하다가 시켰다. 두 번째 병이 열리면 대화의 온도가 바뀐다. 첫 번째 병이 표면이라면 두 번째 병은 표면 아래다. 그녀가 자기 이야기를 꺼냈다. 서른일곱의 무게에 대해. 결혼도 안 했고 아이도 없고, 주변에서 걱정하는 시선이 무거워지는 시기라고. 하지만 걱정의 무게보다 그 시선에 맞춰 설명해야 하는 피로가 더 크다고. 나는 들었다. 그녀가 나에게 해준 것처럼, 성급하게 반응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손가락이 와인잔 다리를 천천히 돌리고 있었고, 촛불이 그 위에 작은 그림자를 만들었다.
그때 그 말이 나왔다. "그래도 너는 본인이 선택한 거잖아, 후회 없지 않아?" 하고 물었을 때,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네가 선택하지 않은 것들이 너를 만든 부분도 있잖아." 선택하지 않은 것들. 그 말이 내 안에서 조용히 퍼졌다. 우리는 선택한 것들로 자신을 설명하는 데 익숙하다. 이 직장을 선택했고, 이 도시를 선택했고, 이 사람을 선택했다고. 하지만 선택하지 않은 것들, 포기한 것들, 지나쳐버린 것들, 용기가 없어서 잡지 못한 것들. 그것들이 만들어낸 빈자리가 오히려 지금의 나를 설명해주는 부분이 있다. 그녀는 그걸 한 문장으로 집어냈고, 나는 그 문장 앞에서 한참 멈춰 있었다.
좋은 대화는 이런 것이다. 상대의 말이 내 안에 작은 구멍을 내고, 그 구멍으로 바람이 들어오는 것. 막히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막혀 있었던 곳,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괜찮지 않았던 곳. 좋은 문장 하나가 그런 곳을 건드린다. 아프지는 않다. 날카롭지만 다정한 바늘 같은 것. 찔리고 나서야 거기 무언가가 고여 있었다는 걸 알게 된다.
밤 열두 시가 넘어 우리는 가게를 나왔다. 경리단길의 밤공기가 차가웠고, 와인의 따스함이 아직 몸 안에 남아 있어서 추위가 오히려 상쾌했다. 나란히 걸으며 한동안 말이 없었다. 좋은 대화 뒤에는 이런 침묵이 온다. 말을 다 쏟아내고 나서 비어 있는 시간. 그 빔이 불편하지 않다. 오히려 충만하다. 내리막길을 걸으면서 서울의 야경이 발아래 펼쳐졌다. 불빛이 보석처럼 흩어져 있었고, "예쁘다" 하고 작게 말했다. 나도 "응" 하고 대답했다. 그 두 마디가 오늘 대화의 완벽한 마침표였다.
택시를 잡아 그녀를 먼저 태워 보냈다. 택시가 모퉁이를 돌아 사라진 뒤 나는 잠시 거기 서 있었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골목의 간판 빛을 보면서, 아까의 문장을 되새겼다. 선택하지 않은 것들. 그 말은 내 안에 자리를 잡았다. 앞으로 며칠간, 어쩌면 몇 달간, 불쑥불쑥 떠오를 것이다. 샤워하다가, 출근길 지하철에서, 잠들기 직전에. 좋은 대화가 남기는 건 결국 이것이다.
당장은 소화되지 않는 하나의 문장. 오래 씹어야 하는 질긴 맛. 그 맛이 천천히 변해가면서 나도 조금씩 달라지는 것.
택시를 잡으려고 손을 들었다가 내렸다. 조금 더 걷기로 했다. 내리막길을 내려가며 찬 공기를 깊이 마셨다. 폐 안에서 와인의 온기와 이월의 냉기가 만났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구두 소리가 골목에 울렸고, 그 사이사이에 그녀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목소리는 점점 작아지겠지만, 문장은 남을 것이다. 그렇게 목소리는 잊어도 문장은 남는 밤이 흘러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