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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츄르 Feb 11. 2021

09_나의 로망, 침실 영화관

    

침실은 당신에게 어떤 공간인가요?


나는 이 질문에 두 가지 답이 있다고 생각한다. 잠의 공간, 그리고 꿈의 공간.

‘잠의 공간’을 정답으로 하는 사람들은 침실에 있어 ‘휴식’을 최고의 가치로 여긴다.

이들에게는 침실은 잠만 자는 공간이어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이 있다. 침실에는 커다란 침대, 푹신한 매트리스, 촉감이 환상적인 좋은 이불만 있으면 충분하다는 것이다. 이들의 침실에는 조도가 낮은, 잔잔한 빛을 발하는 조명이 설치되어 있고, 안경이나 액세서리를 놓을 수 있는 협탁 외에는 가구도 장식품도 없다. 물론 오로지 잠을 자는 데에만 집중한 이런 침실도 멋진 침실이다. 하지만 나의 ‘침실 철학’은 이런 스타일의 ‘조용하고 편안한 휴식 공간’과는 정 반대의 지점에 있다.

내게 침실이란 ‘꿈의 공간’이다. 침실은 편하게 뒹굴며 다른 세계를 꿈꾸는 공간이다. 좋게 말하면 창의력과 상상력을 증진시키는 놀이공간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어린 시절, 어린이집에서 억지로 낮잠을 재울 때가 내게는 가장 놀고 싶은 시간이었다. 밤에도 더 놀고 싶은데 9시에는 자야하는 게 제일 억울했다. 그래서 대학생이 되어 자유를 손에 넣자마자 ‘올빼미’가 되었다. 자취방에서 친구들이랑 술판 벌이기, 혼자 이어폰 귀에 꽂고 옛날 드라마 몰아보기, 인터넷 쇼핑하기... 무엇이든 하며 밤에 놀았다. 밤새 놀다가 아침 9시에 1교시 수업에 간 적도 많다. 직장생활을 시작하고는 밤을 새는 자유(그리고 체력)를 잃어버렸지만, 오히려 잠들기 전까지의 밤 시간은 더욱 소중해졌다. 회사 일을 잊고 마음편히 즐길 수 있는 하루의 유일한 자유시간이기 때문이다.

잠들기 전까지의 네 다섯시간은 영화도 볼 수 있고, 책도 볼 수 있다. 만화책을 보거나 게임을 즐기는 것도 가능하다. 한 마디로 ‘노는 시간’인거다. 그래서 나는 침실을 실컷 내가 좋아하는 걸 하며 놀다가 스르르 잠들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고 싶었다.

침대가 있는 영화관 겸 만화방.

그게 내가 바라는 가장 이상적인 침실이었다. 반지하에 살던 시절에도 침실을 영화관으로 만들고자 ‘대륙의 실수’라는 별명이 붙은 저렴한 중국산 빔프로젝터를 샀던 적이 있다. ‘대륙의 실수’라는 별명은 ‘이걸 사면 대륙처럼 커다란 엄청난 실수’라는 뜻이었던 걸까?

대륙의 실수로 재생한 영화 <문라이트> 화질도 나쁘지만 항상 저렇게 사다리꼴로만 영상이 재생되었다.

결과는 처참했다. 어떤 영상을 틀어도 지나치게 푸른 빛이 돌았고, 화질이 너무 나빠서 도무지 집중할 수 없는데다, 영상이 비뚤어지지 않도록 각도를 조절하는 것도 끔찍하게 어려웠다. 그 때 깨달았다. 세상에는 가성비만 따져서는 안되는 물건도 있다는 걸 말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엘모 전자에서 나온 60만원짜리 빔 프로젝터를 구입했다.

주문 버튼을 누르면서 손끝이 덜덜 떨렸다. 60만원은 내게는 무척 큰 돈이고, 집을 구입하는데 현금을 다 쓴 덕에 그 마저도 빚을 내야했다.

전에 샀던 저렴이 빔프로젝터랑 큰 차이 없으면 어떡하지?

60만원의 가치가 없으면 어떡하지?

하루에도 몇 번씩 이런저런 걱정에 마음이 쿵쿵 내려앉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번에 산 빔프로젝터는 비싼 몸값을 톡톡히 했다.

내 침실은 문을 열면 맞은 편에 커다란 창이 있고 문과 창문 사이에 빈 벽 두 개가 마주보는 구조다. 그래서 문을 열고 보이는 오른 쪽 벽에 퀸 사이즈 침대를 붙이고 침대의 중간쯤 오는 벽에 거치 선반과 빔프로젝터를 설치해서 맞은 편 벽에 영상이 비치도록 했다. 그리고 침대에 비스듬히 앉아 영화를 볼 수 있도록, ‘집순이 쿠션’이라고 불리는 빅사이즈 등받이 삼각쿠션을 샀다. 침대의 중간 쯤, 등받이 쿠션에 편히 기댄 몹시 방만한 자세로 처음 빔프로젝터를 켜봤을 때의 감동을 잊지 못한다. 빔프로젝터 내부에 넷플릭스와 왓챠가 탑재된 시스템이라 넷플릭스와 왓챠가 잘 들어가지는지부터 확인하고, 넷플릭스의 ‘빨간머리앤’ 드라마 1화를 켰다.

주황색도 갈색도 아닌 앤의 머리색과 주근깨가 선명히 보였다. 시골 마을의 풍경도 얼마나 생생한지, 큰 화면으로 보니 정말 그 안에 들어있는 기분이었다. 나는 너무나 감동한 나머지 오열할 뻔했다.

세상에 돈이 이렇게 좋구나!

고퀄리티의 화질을 누리게 해준 건 내 돈이 아니라 빚이라는 것을 잠시 잊고, 나는 감격에 차서 외쳤다.

그 날부터 나는 매일 밤 벽면 가득한 큰 화면으로 넷플릭스나 왓챠를 본다. 미드 <와이 우먼 킬>, <트루 블러드 시즌 1~7>, <빅 리틀 라이즈>를 정주행했다. 이상하게 미드는 집중이 잘 안돼서 정주행에 성공한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빔프로젝터 덕분에 정말이지 어마어마한 양을 보게 된 거다. 특히 <트루 블러드>는 2008년부터 2014년까지 방영된 대장정 시리즈인데, 매일밤 한두 편씩 찔끔찔끔 보다보니 어느새 완결편이었다. 열심히 미드를 보다보니 예전보다 영어 리스닝이 더 잘되고 발음도 좋아진 기분이었다. 특히 거친 미국남부가 배경인 <트루 블러드>를 보다보니 각종 일상적 비속어를 원어민 수준으로 발음하게 되었다. 지쟈스 크롸이스트~  같은 것들 말이다. 문법도 익혔다. ‘f*ck’을 문장의 어디쯤에 위치 시켜야 그 문장을 강조시킬 수 있는지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참으로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는 영어실력 향상이지만 나중에 영어권 외국인에게 기분 나쁜 말을 들으면 시원하게 욕 한마디를 뱉어줄 수 있을 것 같다.

커다란 창에는 암막커튼을 설치해서 이제는 낮에도 영화를 볼 수 있다. 커튼을 쳐놓고 영화나 드라마를 보다가 멈추고 커튼을 걷어 햇빛을 받는 것도 즐거움 중의 하나다. 밤에는 커튼을 걷고 영화를 틀어놓은 채로 창문을 다 열어 환기를 시킨다. 그러면 창밖으로 아파트들과 고가도로가 크리스마스 트리처럼 반짝반짝 빛난다. 영화와 그 광경을 동시에 보고 있으면 더없이 환상적인 기분이다. 때로는 맥주나 와인을 곁들인다. 창문 앞에 의자를 두고서 창턱에 와인잔을 놓고 창밖을 바라보면 요즘 유행하는 ‘홈바’ 같기도 하다. 그렇게 영화와 풍경을 즐기다가 스르르 잠이 올 때쯤 리모콘의 전원 버튼을 누른다. 내가 하루를 기분 좋게 마무리하는 방법이다.

빔프로젝터 덕분에 ‘침대가 있는 영화관 겸 만화방’이라는 이상적인 침실을 절반은 완성했다. 침대는 대나무 깔판에 매트리스만 얹어서 방을 넓어보이게 만들었다. 그리고 침대 머리맡에 있는 벽 공간에는 좋아하는 액자와 포스터를 잔뜩 붙였다.

아트나인 특별 상영에 가서 굿즈로 받은 <패터슨> 포스터는 거실의 풍경이다. 패터슨이 소파에 앉아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광경인데 색깔 조합이 아주 예쁘다. 앳나인필름 플리마켓에 가서 산 <캐롤> 포스터는 여관방의 침실 풍경이다. 주인공들이 누워있는 침대 두 개가 보인다. 오늘의 집에서 산 국민템, 마티스 포스터는 내 이불과 비슷한 노란색이라서 붙였다. 가장 포인트가 되는 손가방은 무슨 티벳 어린이들을 돕는 바자회에서 샀다는 정체모를 물건인데, 내가 산 건 아니고 선물받았다. 동양적이고 고풍스러운 디자인에 광택있는 소재가 너무 잘 어울린다. 일상생활에서 들고 다니기는 아까워서 가장 잘보이는 곳에 걸어두었다. 그리고 조명 스위치에는 앵무새 모양 와펜을 접착제로 붙였다. 불을 끄고 켤 때마다 매끈하고 부드러운 앵무새 깃털을 만질 수 있어서 기분이 좋다.

마지막으로 조금 부끄럽지만, 왼쪽에 큼지막하게 붙인 포스터는 나이 서른먹고 푹 빠져버린 아이돌의 모 서점 특별 굿즈다. 올해 아이돌 앨범을 태어나서 처음 사봤다. 나이 서른에 평생 관심도 없던 아이돌에 뜬금없이 입덕한 것도 어린 시절 공주옷을 안입으면 나중에 공주풍 취향을 갖게된다는 낭설과 맥을 같이 한다. 한창 아이돌에 심취했어야 할 십대 시절의 나는 ‘힙스터 병’(‘중이병’의 버터바른 버전이랄까) 중증 환자였기 때문에, 아이돌을 좋아하는 일은 내 인생에 결코 없을 거라 굳게 믿었다. 그 때 앨범을 소장하고 있던 가수들은 주로 인터폴, 아케이드파이어, 디 엑스엑스, 선셋 럽다운(외 관련 인디밴드들) 등등 이제는 이름조차 잘 기억나지 않는 영미권 인디 밴드들이었다. 그때 내 엠피쓰리(옛날 옛적에는 그런 물건이 있었다.)에 들어있는 가수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데이빗 보위였다. 그때 나는 시니컬하고 반항적이고, 난해하고 복잡한 사고를 했으며, 이상한 철학책을 읽고 지금은 기억조차 나지 않는 어려운 단어들을 썼었다. 누구나 겪는 사춘기를 폭력에 연루되거나 하는 것보다는 덜 해로운 방식으로 겪었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이렇듯, 내 침실엔 좋아하는 것들이 잔뜩 붙어 있다. 편안하고 고요한 휴식과는 거리가 먼 컨셉인 것이다.


이제 내 침실에서 남은 건 ‘만화방’을 만드는 것 뿐이다. 내가 초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만화 대여점’이 성행했었다. 비디오를 함께 빌려주는 곳도 있고 만화책만 빌려주는 곳도 있었다. 대여점에 가서 만화책을 잔뜩 빌려오는 토요일 밤을 일주일 내내 기다렸었다. 엄마는 내가 빌려온 만화책을 미리 검수해 키스신과 베드신을 내가 못보게 테이프로 붙여버렸는데, 못보는 장면이 많은 만화일수록 더 재미있었던 기억이 있다. 초등학교 때 좋아했던 만화책들을 구매해 책꽂이 하나 가득 꽂아두는 게 나의 소원이다. <젤리빈즈> <나나> <펫 숍 오브 호러즈>  <프린세스> ... 어린시절 좋아했던 만화책들은 제목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뛴다. 지금은 자금 사정이 여유롭지 못해 당장은 못하고 있지만, 올해가 가기 전에 나만의 추억 만화방을 꼭 침실에 마련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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