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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츄르 Feb 20. 2021

12_살면서 바꿔가는 집, 현관문 페인팅

폴리싱 타일 공사로 뽀얗고 반듯한 바닥을 만들고 벽과 천장을 하얗게 칠했지만, 지금도 우리 집은 완벽하지는 않다. 주의를 기울이면 몰딩과 벽 사이 들뜬 부분이 보이기도 하고 천정에는 예전에 조명이 있던 자리들에 구멍이 숭숭 뚫려 있다. 문고리를 전부 내가 교체해서인지 닫았을 때 너무 헐거운 문도 있다. 도저히 개성이라는 좋은 말로 귀엽게 포장할 수 없는, 명백한 하자들이 분명히 남아있는 것이다. 나는 이런 부분들을 살면서 조금씩 손봐나가고 있다.

가장 거슬렸던 부분은 드레스룸의 천장 몰딩이었다. 천장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한 구석의 몰딩과 천장 사이에 울룩불룩한 틈이 있었다. 천장 자체가 살짝 들린 모양새라 손을 대자면 단순히 몰딩 교체만으로 끝나지 않고 천장 공사를 해야할 판이었다. 하지만 누수가 있는 것도 아니고, 기능적으로는 별 문제 없는 천장을 예쁘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손댈 만큼의 경제적 여유는 없었다. 그래서 비닐장갑을 끼고서 다이소 출신의 하얀색 틈새 매꾸미를 열심히 발라 틈을 메꾸었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시커멓게 틈이 보이던 이전보다는 훨씬 보기 좋았다. 벽과 천정의 구멍들도 이 틈새 매꾸미를 이용해 틈틈이 손보고 있다. 

두 번째로 거슬렸던 건 누렇게 변색된 조명 스위치들이었다. 이 역시 보기는 싫었지만 기능적으로는 문제가 없었다. 그래서 거실에 있는 스위치들만 새것으로 교체하고 나머지는 페인트로 칠하거나 와펜을 붙였다. 가방이나 청자켓에 와펜 붙이는 게 유행하던 시절에 와펜을 많이도 사놓아서 붙였을 뿐, 코팅된 예쁜 엽서로 가려도 큰 문제는 없을 것 같다. 보이는 게 문제면 보이는 부분만 손보면 되지 굳이 손아프게 교체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스위치를 교체하는 건 어렵지는 않지만 손 힘이 많이 들어가는 작업이고, 처음에는 두꺼비집을 안 내리고 교체하다가 약하게 감전되어 지옥을 맛본 적이 있었다. 안할 수 있다면 최대한 안하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세 번째로 거슬렸던건 현관문이었다. 이 빌라 건물 전체의 현관문은 십장생이 새겨진 지나치게 고풍스러운 검은색 철문이다. 십장생이란 해, 산, 물, 돌, 소나무, 달또는 구름, 불로초, 거북, 학, 사슴을 말하는데 장수를 상징한다. 고려시대부터 유행한 범접할 수 없는 스테디셀러 인테리어다. 십장생에 유감은 없지만, 한 마디만 하겠다. 

요즘 세상에 장수라니??

수명이 점점 늘어나는데 60에 정년퇴직만 무사히 할 수 있어도 신의 직장 소리를 듣는 이 100세 시대에, 장수라니... 작년 기준 여성의 평균 수명은 86.3세인데, ‘살’이 아니라 ‘세’가 붙어있는 나이는 우리나라 나이가 아니라 만 나이가 아닌가... 그렇다면은... 나는 12월 생이니 만 86살까지 살면 88살이 평균... 여기에 ‘장수’라고 불릴 만큼 더 살게 된다면 최소 십년은 더 살테니 98살... 회사라는 것은 아무리 오래다녀봤자 현실적으로 55살 정도면 땡, 그렇다면 무려 43년을 월급없이 살아야 한다. 

43년을 월급 없이...?

나는 프리랜서 가정에서 자라나 월급 없는 삶의 고충을 안다. 프리랜서는 돈을 많이 벌면 지자체에서 정말 야무지게 보험료며 세금을 약탈해 간다. 적게 벌면 적은 수입조차 들쭉날쭉해 생계를 안정적으로 꾸려나가기가 정말 힘들다. 더군다나 루틴한 업무가 정해져 있는 게 아니라 자신의 재능만으로 돈을 버는 거라 해보지 않은 사람은 이해하기 힘든 고충이 있다. 재능에 운이 따라 전성기를 누리는 자는 모든 시간과 감각을 일로 꽉 채워 일 외의 삶이 없다. 운이 부족해 전성기조차 누리지 못하면 평생 가난과 자괴감에 시달린다. 

단 돈 백만원이라도 고정수입이 있어야 한다.

회사원의 고충은 잘 모르고, 프리랜서의 고통은 너무나 잘 알아서 나는 회사원을 선택했다. 이 삶은 이 삶 나름대로 (대단히X100) 뭣같지만 어쨌든 나의 선택이니 후회는 없다. 그런데 월급없이 보내는 인생 후반부의 43년 플러스 알파라니. 장사에는 재능도, 경험도, 보고들은 것도 없는 나같은 사람이 월급없는 43년 플러스 알파라니! 생각하면 할수록 현관문의 십장생 무늬가 불길하게 느껴졌다. 

"장수는 됐고요, 건강하게 평균수명보다 몇 년만 덜 살게 해주십쇼. 제발 십장생!" (욕처럼 느껴진다면 그대의 착각이다.)

담고 있는 의미(장수)도 불길한데다 디자인은 더 불길했다. 올블랙이라면 차라리 나았을 텐데 장수를 상징하는 십장생님들이 금색으로 강조까지 되어있었다. 센스있게 잘만 배치하면 힙할 수도 있겠지만 그 힙하고 센스있는 집은 대놓고 공주풍인 우리집과는 거리가 멀었다. 거실을 바라보며 미소를 짓다가도 현관문만 보면 기분이 팍 상했다. 폴리싱 타일과 페인트칠로 모든 것이 하얘지고 나니, 시커먼 현관문 안쪽이 몹시 음침해보였다. 

현관문과 방문 페인팅 전의 우리집. 물건이 그렇게 많이 나와있는 것도 아닌데 엄청 지저분해 보인다.

혹시 저것도 하얘지면 조금 나으려나?

일단 십장생님들의 존재감이 조금만 작아져도 만족스러울 것 같았다. 더 고민하는 시간도 아까워서 일단 엄지손가락을 놀려 현관문에도 칠할 수 있는 멀티페인트를 주문했다. 현관을 꼼꼼하게 비닐로 보양한 뒤 우선 젯소부터 칠하기 시작했다. 요즘은 페인트가 잘 나와서 젯소칠이 필요없다지만 이 시커먼 철문은 예외였다. 올록볼록한 양감이 있어 젯소를 아끼지 않고 팍팍 칠했다. 시커먼 번호키도 보기 싫어서 함께 칠했다. 

젯소를 잘 말린 후, 페인트도 아끼지 않고 듬뿍듬뿍 칠했다. 거의 페인트를 부어놓고 붓으로 퍼뜨리는 식이었다. 보양을 잘 하지 않았다면 재앙이 일어났을 거다. 주말 반나절을 꼬박 바쳐 페인팅이 끝났다. 

칠해놓고 나니 대만족이었다. 꼴보기 싫던 십장생님들이 화이트를 덮자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매력을 발산했다. 고풍스러운 십장생 무늬가 올화이트로 절제되자 우아함이 폭발한 것이다. 이 절제된 십장생 문이 레트로한 골드 센서등과 어우러지자 식민지풍의 묘한 분위기가 생겼다. 식민지풍이라는 말이 조금 꺼려지기는 하지만 동서양이 혼란스럽지 않고 우아하게 뒤섞인, 국적을 알 수 없는 분위기에 가장 잘 어울리는 말이다. 이 묘한 현관문 덕분에 빌리엔젤 시청점을 모델로 무작정 화려하게 꾸민 우리 집에 개성이 생겼다.      

결혼한 회사 선배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말한다.

“신혼 때 인테리어하고 집 꾸밀때가 인생의 가장 행복한 시기였어.”

맞는 말이다. 처음으로 생긴 내 공간에 색깔을 채워넣고 물건을 사나르는 것보다 행복한 일이 어디 있을까? 꼭 돈을 쓰지 않더라도 공간을 바꿔나가는 재미는 그 무엇으로도 대체하기 힘들다. 우리 집은 완벽하지 않기에 살면서 계속 행복할 수 있다. 조금씩 손 보고 하나하나 바꿔가는게 수천만원을 들여 내부를 갈아엎고 전문가가 선택한 가구들을 놓은 집에 몸만 들어가는 것보다 더 재미있다. 

화장실, 샷시, 보일러실...

우리 집은 아직 건드릴 곳이 많이 남아있어 기쁘다. 완성한 침실과 서재, 드레스룸도 살면서 조금씩 분위기를 바꿔가며 재미있게 지낼 예정이다. 돈 없는 자의 자기위안이라 얘기하면 할 수 없지만, 나는 내일 당장 로또에 당첨되도 낡은 공간을 손보고 꾸미는 재미는 계속 누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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