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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츄르 Feb 14. 2021

11_드레스룸 겸 파우더룸 만들기

 ‘드레스룸’이나 ‘파우더룸’이라는 단어를 보면 마리 앙뚜아네뜨가 떠오른다. 정확히는 소피아 코폴라가 연출한 영화 <마리 앙뚜아네뜨>의 유명한 장면 속, 마리의 발 옆에 노골적으로 배치된 하늘색 컨버스 운동화가 떠오른다. 매우 뜬금없는 연상이다. 그만큼 내게는 ‘드레스룸’이나 ‘파우더룸’이 ‘소녀감성’ 그 자체로 느껴진다. 즉 ‘예쁨에 대한 욕망’인 것이다. 여기에서 ‘예쁨’은 꼭 외모의 예쁨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예쁜 물건이나 아기자기한 문구류에 대한 욕망을 포함한다.

드레스룸은 아기자기하고 예쁜 공간으로 만들어야지.

나는 드레스룸의 컨셉을 쉽게 정했다.

실은 드레스룸을 가지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집을 산 뒤, 옷을 수납하는 용도 외에는 딱히 쓸데가 없는 아주 작은 방이 생겼을 뿐이다. 미니멀리즘을 실천한답시고 갖고 있는 옷의 80%를 버린 뒤 모든 계절의 옷을 옷장 하나에 수납할 수 있게 되었다. 여기에 속옷과 잠옷을 합친다해도 서랍장 하나만 더 있으면 된다.

처음에 구상한 심플한 드레스룸

처음부터 이랬던 건 아니다. ‘꾸밈’에 몰두하며 한껏 꾸민 외모로 받는 주목과 칭찬, 또래집단의 인정을 갈구하던 시절도 있었다.

책 좋아하고 이상한 음악만 들으니 고등학교때까진 별종(아싸 혹은 찐따라고도 한다) 취급을 받다가 스무살넘고 꾸미니까 또래 친구들이 무시하지 않고 무리에 끼워줘서 아주 신이 났었다. (물론 그렇게 사귄 친구는 다 떨어져나가고 지금은 내가 쌩얼에 안경써도 창피해 하지 않는 착한 친구들만 남았다.) 그 땐 매일 과한 화장을 했고 옷도 많아서 옷장 대신 행거를 썼다.

옷이 끔찍하게 많았던 20대 초중반. 이 시절 옷 수납 사진이라곤 이것밖에 없다. 상당한 면적을 옷으로 채워넣고 살았다.

한쪽 벽에 행거를 두줄, 세줄 설치하고 옷을 꽉채워 걸었다. 옷이 넘쳐 터져버릴 것 같은 5단 서랍장도 두 개나 있었다. 계절옷은 별도의 상자에 수납해서 옷을 얼마나 갖고 있는지도 파악하지 못했다. 내가 특이한 경우는 아니다. K-POP 성장기에 청소년기를 보낸 내 세대에게 외모에 대한 과도한 관심은 크게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런 분위기에 동참하지 않으면 동년배들과 어울리기 힘들었다. 그러니까, 라떼는 말이야...

미니멀리즘에 심취해 옷을 줄이던 시절에 찍은 사진. 저 중에서 지금도 남아있는 옷은 두 벌 밖에 없다.

어느 순간 삶에서 꾸밈을 확 덜어낸 데 특별한 계기는 없다. 그저 나이 먹고 회사를 다니다 보니 대학생 때만큼 또래집단과 어울릴 일이 별로 없었고 그렇다보니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빡세게 꾸밀 이유가 없어졌다. 내가 외모로 돈을 버는 일을 하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자연스럽게 청소년기의 디폴트값, '맨얼굴에 안경쓰고 바지만 입는 인간'으로 돌아갔다.

입는 옷만을 갖고 있게 된지는 한 2년 되었다. 세탁할 때마다 옷상태를 살피며 보풀이 일거나 낡은 옷은 바로바로 헌옷 수거함에 넣고 매주 1회 이상 입지 않을 옷은 사지도 않았다. 그렇다보니 갖고 있는 옷의 양과 매주 세탁하는 옷의 양이 크게 다르지 않다. 여름에 입는 얇은 상의는 겨울에는 이너로 입고 그 위에 사계절 착용가능한 두께의 남방을 입는다. 여름에도 입을 수 있는 슬렉스 안에 집에서 잠옷처럼 입는 레깅스를 내복대신 입고 겨울을 난다. 이런 식이다보니 아웃터 외에는 계절옷이라고 할 것도 별로 없다. 아마 ‘드레스룸이 필요 없는 인간’의 순위를 매긴다면 상당히 상위권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시트지가 군데군데 벗겨져 버린 예전 옷장. 혼자 밖에 내놓느라 죽는 줄 알았다.

이왕 생긴 드레스룸 예쁘게 꾸며보자 마음먹고 나니 옷장이 문제였다. 예전 집에서 쓰던 옷장은 시트지가 벗겨지고 부서져서 내다 버린지 오래였다. 가로 800의 그 옷장에는 내가 갖고 있는 옷이 모두 들어가기는 했지만 손님용 이불을 수납할 공간이 없었다.

눈이 돌아가게 예쁜, 수납공간이 넉넉한 옷장을 사겠어!

나는 엄지손가락 지문이 닳도록 수많은 옷장을 검색하고 살펴보았다. 하지만 딱히 마음에 드는게 없었다. 옷장이라는게 사각형이 다인, 원채 투박하게 생긴 물건이다보니 화려하게 꾸며진 건 촌스러웠고, 깔끔한건 지나치게 미니멀했다. 내가 원하는 섬세한 아름다움을 가진 옷장이 없었다. 옷장 없이 이사는 왔겠다, 출근할 때 옷은 입어야 하니 한시가 급했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 옷장과 쉽게 타협하기는 싫었다. 결국은 거의 2주 가까이를 세탁 배달업체에서 받은 비키니장에 코트를 넣고 그 외의 것들은 창틀과 문손잡이 등 걸 수 있는 곳에 모조리 걸어놓고 버텼다. 지금의 옷장은 빅데이터가 물어다줬다. 인스타그램을 하는데 마켓X의 광고가 뜬 것이다.

마켓X 옷장 기간 한정 세일!

아무 생각없이 링크를 클릭했다 떠오르는 옷장의 이미지에 첫 눈에 반하고 말았다. 작은 방 나무시트 샷시와 잘 어울릴 것 같은 차분하고 고급스러운 나무 옷장이었다.

얇은 널빤지들을 비스듬히 세워둔 것 같은 문짝의 모양도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그런 모양을 뭐라고 부르는지 몰랐는데, 엄마가 보더니 ‘갤러리장’이라고 했다. 옷장 2개가 연결된 형태라 수납공간도 넉넉했다. 원래 50만원대를 30만원대에 판매한다고 하니 진실 여부를 검증할 겨를도 없이 일단 구매 버튼을 누르게 되었다.

충동적으로 구매한 옷장을 받아보니 예쁘기는 정말 예뻤다. 하지만 아무 개념 없이 원목일 거라 생각한 나무무늬가 그저 고급스러운 시트지인걸 보고 충격받았다. 조립비까지 합쳐서 40만원대였기 때문에, 내 딴에는 정말 큰 금액이라 당연히 원목일 거라 생각했는데 시트지가 웬 말인가. 16만원에 원목 책상을 샀던 경험이 있었기에, 40만원대 옷장이 시트지인건 정말 용서하기 힘들었다. 시트지에 합판이라면 전에 갖고 있던 8만원짜리 옷장과 다를 게 뭔가 싶었다. 가성비와의 전쟁에서 이렇게 철저히 패배당하다니. 하지만 디자인 자체는 눈이 돌아가게 예뻤으므로 용서하기로 했다. 청년기의 대부분을 월세내는 자취생으로 살다보니 집에 두는 가구에 대한 가격대 기준이 지나치게 낮아진 탓이다. 옷장의 수납력은 만족스러웠다. 옷과 손님이불을 다 수납하고도 옷장이 남아돌아서 옷장을 사면 버리려 했던 비키니 장까지 넣었다.     

서랍장은 10만원대로 구입했다. 정면의 서랍부분은 반짝이는 하얀색 하이그로시고 옆과 위는 나무무늬의 시트지인 우드&화이트 서랍장이었다. 전에는 본가에서 가져온 10년도 더 된 서랍장을 썼었는데, 시트지가 다 들뜨고 서랍 윗부분은 마감이 안되어 있어 손을 찔리곤 했다. 새로 산 서랍장은 마감이 깔끔한 편이었고 서랍도 잘 여닫혔다. 우선 새것이라는 것만으로도 예전 서랍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서랍장 맨 윗칸엔 여분의 화장도구(화장솜, 스페어 선크림 등)를 넣고 두 번째 칸에는 속옷과 양말을 넣었다. 세 번째 칸에는 수면잠옷, 자주 안 입는 바지 등의 ‘접는 옷’을 넣고 네 번째 칸에는 네일 용품과 생활 잡화, 다섯 번째 칸에는 문구류를 넣었다. 갖고 있는 물건의 양 대비 서랍장이 큰 편이라 공간이 여유롭게 남았다.

나는 이 서랍장 위를 ‘소녀감성 존’으로 꾸미기로 했다. 마티스의 파란 여인이 인쇄된 국민 액자와 향수를 놓고, 친구가 선물해준 조개 모양 액세서리 수납함에 얼마 되지 않는 액세서리를 놓았다. 정면 벽에는 예쁜 엽서를 붙이고 오른쪽 옆 벽에는 부착형 고리를 달아 반지와 팔찌를 걸었다. 엄마가 내 사진으로 만들어온 애물단지 나무액자까지 붙이니 그럴싸했다. 여기에 마지막으로 다이소에서 3천원 주고 산 디퓨저를 놓았다. 이렇게 ‘예쁜 쓰레기’를 모아놓은 소녀감성존이 완성되었다.

점점 물건이 늘어가고 있는 소녀감성 존. 인어공주 액자와 어릴 때 갖고놀던 오래된 바비인형, 개구리 저금통, 아이돌 잡지화보 활용 액자 2탄을 더 놓았다.

이 소녀감성존의 연장으로 예전 집에서는 책꽂이로 쓰던 선반장식장을 꾸미기로 했다. 이 마켓X 선반장은 마티스 액자보다도 더 흔한 어느 집에나 있는 국민템이다. 이 집의 전주인 할머니 댁도 똑같은 선반장을 거실에 두시고 신발장으로 쓰고 계셨다.

자취방에서 특히 많이 쓰는 국민템 사다리 선반장

흔한 물건일수록 꾸미기 나름. 내가 정한 컨셉은 유치할 정도의 소녀감성+예쁨존 이었다. 물론 내게는 이 진열장을 채울, 미니멀리즘에 심취해서도 버리지 못한 ‘예쁜 쓰레기’들이 많이 있었다. 맨 윗칸에는 야금야금 모아온 디즈니 인형들을 두었다.

디즈니 베이비돌 커스텀이 취미였던 적이 있는데 돈이 너무 깨져서 그만두었다.

내가 구입한 인어공주 에리얼과 포카혼타스 베이비돌, 친구들이 스물아홉 생일선물로 준 엘사 베이비돌, 경의선 책거리를 산책하다 ‘솔메 핸드메이드’ 공방에서 보라색 피부에 홀려 구입한 우슬라 인형이다.

내일배움카드로 영상편집 학원 다닐 때 만든 인형 리뷰인데 어디 쓸 데도 없어 여기에 올려본다. 오그라듬에 면역력이 없다면 재생하지 않는 것이 좋다

 베이비돌 3체는 유튜브를 보며 직접 안구를 넣고 속눈썹을 붙이는 커스텀까지 진행했기 때문에 아마 평생 버리지는 못할  같다.  번째 칸에는 빛에 따라 색이 변하는 알루미늄 장미를 넣은 금색 화병과 엄마가 오랫동안 들다가 내게 넘긴 핸드백을 두었다.  아래 칸에는 <금발이 너무해> 연상시키는, 밖에 절대 들고나가지 못하는 핑크색 핸드백을 두었다.

사진 속 왼쪽에 걸어둔 다이아몬드 옷걸이에는 양말을 말리고 있는데, 보통은 안경닦이와 사원증을 걸어둔다.

쓸데는 없지만 예쁜 물건들을 한데 모아놓고 나니 볼 때마다 기분이 좋다. 예쁘고 아기자기하고 쓸데 없는 것들의 쓸모는 여기에 있다. 그냥 보면 기분이 좋아지는 것. 햇빛 속에서 즐겁게 웃는 사람들을 볼 때처럼 몽글몽글하고 따뜻한 기대감 비슷한 것이 허파를 꽉 채우는 것. 프라모델이나 피규어를 좋아해본 적은 없지만 그런걸 모으는 사람들도 이런 기분 때문에 모으는게 아닐까 싶다.

화장대는 놓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대학시절 화장을 공부하듯 책으로 배우고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내 얼굴을 가장 이상적으로 강조하는 화장법을 익혔으나 솔직히 출근할 때나 하는거지 썩 즐기진 않는다. 엄마가 뷰티 블로거 수준의 코덕(코스메틱+덕후)이라 얻어온 색조화장품이 여럿이긴 한데 립스틱을 모아두고 행복을 느끼진 않는다. 아이섀도는 내눈에 가장 어울리는 색상의 팔레트를 쓰는데 산 지 5년이 되었다. 전문가들이 들으면 입에 거품을 물겠지만 자주 쓰지 않아 그런지 피부에 아무런 문제도 없다. 립스틱은 거의 다 얻어온 건데 평생 다 쓰지 못할 것 같다. 마스카라는 10년째 같은 제품만 사고 있고 아이라이너는 다이소에서 샀다. 파운데이션은 아무거나 써도 큰 문제가 없는 듯 해서 떨어지면 드럭스토어에서 세일하는 제품을 산다. 셰이딩도 그냥 세일하는 걸 쓰고 볼터치는 하지 않는다.

화장대가 필요없었기 때문에 매일 아침 옷상태를 체크하고 선크림을 꼼꼼히 바르기 위한 문걸이 거울을 샀다. 2만원대 제품이라 고급스러울 거라는 기대는 안했지만 받자마자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단단한 종이에 유리를 끼워 넣은 퀄리티가 충격적이었다. 가성비인줄 알았는데 비지떡에 당첨된 것이다. 문에라도 잘 걸렸으면 용서가 됐을 터이나, 문에 걸어두니 이리저리 흔들리며 문이 잘 닫히지 않았다. 거울이 필요하긴 하니 버릴 수는 없고, 벽에 붙일까 고민하다 문득 거실에 두고 쓰던 이동식 테이블이 생각났다. 테이블에 필기구를 놓을 수 있는 직선 홈이 있었는데, 테이블을 벽에 붙이고 그 홈에다 거울을 고정한뒤 벽에 기대면 안정적이지 않을까 싶었다. 내 예상은 딱 맞아떨어졌다. 거울이 상당히 안정적으로 고정된 데다 옷장과 선반장 사이 공간에 테이블 크기도 딱이었다. 그런데 막상 해놓고 보니 화장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 쓰는 스툴을 가지고 와 앉아보니 높이도 화장대로 제격이었다.

화장은 안하지만 이왕 이렇게 된거 화장대 만들지 뭐.

나는 엄마가 준 애물단지 립스틱을 죄다 꺼내고 갖고있는 색조 화장품을 탈탈 털어 테이블에 늘어놓았다. 그렇게 해놓으니 제법 화장대 느낌이 났다. 화장대를 만든 후에도 화장을 자주 하지는 않는다. 그래도 매일 아침 선크림을 바를 때 기분이 좋다. 화장대에 앉아서 꼼꼼히 바르는데 무슨 의식을 치르는 것같은 차분한 즐거움이 있다. 부어있어도 부스스해도 괜찮다. 어떤 모습이든 그게 나니까. 그야말로 야매 화장대지만 그 앞에 앉아 나 자신과 마주보고 있으면 스스로를 더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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