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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츄르 Nov 23. 2021

숨쉬는 데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평범한 인프피의 동절기 우울 극복기

또 시작됐다.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 

하루에 수백번도 넘게 외치며 자괴감에 빠져드는 시기가 말이다. 되돌아보면 나는 항상 둘 중 하나였다. 자기계발이든 노는 거든 무언가에 깊이 중독돼 한 방향으로 내달리거나, 아니면 삶을 낭비하고 있다는 죄책감에 빠져 최악의 기분으로 죽지 못해 살거나.

의욕이 넘쳐 무언가 시작할 땐 영원히 그 일만 할 것처럼 미친듯이 빠져들다가, 나자신에게 지나치게 가혹해져 모두 포기해버리고 다시 우울의 시기로 넘어가곤 했다. 뭘 하나 열심히 할 때는 '독하다'는 말을 들을만큼 몰두하고 심지어 잘해내지만 그걸 꾸준히 해내 평생 가져갈 무기로 만드는데 성공한 적은 없었다. 가장 최근 몰두했던 취미인 등산만 하더라도, 주말마다 도봉산 수준을 다니는 것으로 꾸준히 했다면 좋았을 텐데, 욕심이 과해져 '불수사도북'이라는 타고난 내 체력으로는 절대 감당하지 못할 목표를 세우고는 어느 순간 모두 놓아버렸다. 어린시절부터 그나마 영어는 시간 투자 대비 남들보다 더 잘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5년도 더 전 취업을 위한 토익점수를 만드는데 성공한 이후로 완전히 놓아버리고는 지금은 기초적인 단어 조차 스펠링이 생각나지 않는 수준이 되어버렸다. 글쓰기 역시 마찬가지다. 글은 왠만큼 멍청하지 않고서야 남들보다 잘 쓸 수 밖에 없는 환경에서 자라났고, 심지어 전공하기까지 했는데 지금은 브런치 글 하나 올리는 것도 큰 결심이 필요한 인간이다. 

내가 나 자신에 대해 이 말까지는 하지 않으려 했는데, 조금 솔직해져 보겠다. 나는 뭐가 그리 잘났다고, 콧대 높게 웹소설이니 독립출판이니 모두 외면하며 고고하게 굴다가 등단도 못하고 평범한 직장인이 되어버렸다. 물론 대학원에 진학해 계속 글을 쓰고 싶었으나 생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안정적인 삶을 선택했다는 핑계가 있기는 하다. 어린 시절부터 가난한 작가들을 너무 가까이서 많이 봐왔고, 문화예술업 종사자였던 부모 슬하에서 과일 한 조각 못사먹을 정도의 극단적인 가난과 (내 딴엔) 소화하기 힘들 정도의 부유함도 겪어 봤기에 돈의 중요성을 어린 나이에 깨달았다. 물론 내 부모님은 문화적 소양과 교양이 돈보다 백만배는 중요하다고 믿는, 너무나 한국인스럽지 않거니와 나이브하기 짝이 없는 경제관념이 기본 베이스인 이들이었기에 정작 인생에서 중요한 재테크에 대해서는 전혀 배우지 못했지만 말이다. 돈없이도 우아하게 살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정말 인생의 승자라고 생각하지만, 나는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되지 못한다. 

대체 나라는 인간은 왜 이렇게 못났을까? 최악만은 피하기 위해 내 나름대로는 영리한 선택을 했다고 믿어왔지만 결국엔 애매한 지점에서 진정 원하던 것은 아무것도 손에 넣지 못한 기분이다. 그리고 이렇게 기분이 최악일 땐 살면서 이유없이(분명 이유는 있었겠지만) 나를 배척하고 미워했던 사람들이 하나 둘 떠오르면서 그 사람들이 나를 얼마나 비웃을까, 하는 밑도 끝도 없는 패배감과 열등감이 나를 덮친다. 

다들 떠올리는 노래 있죠? 이이언의 무심한듯 흐느끼는 보컬로 따라해 보세요.

나의~~절마앙을~~바라는~당시인에게에~~

물론 이런 내게도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부분은 있다. 바로 예민하기 짝이 없는 성격을 순전히 내 의지로 다듬고 다듬어 최소한 사회생활에 있어서만큼은 꽤나 무던한 성격으로 만들었다는 점, 그리고 서른 살까지 자살하지 않고 나름대로는 건강하게 잘 살아왔다는 점이다. 그리고 사실 이렇게까지 피의식을 갖는 건 다 내탓이라는 것을 나도 알고 있다. 내 마음 가장 음습한 구석에는 평범함은 곧 열등함이라는 아주 저열한 선민의식이 있다. 그런데 그 이상한 선민의식의 기저에는 또 신기하게도 모두에게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데 조금이나마 기여하고 싶다는, 말도 안되게 순진하고 이상적인 바람이 있다. 어릴 때 나는 이런 나 자신이 너무 징그럽고 싫어서, 나자신이 그나마 좋을 때는 나를 둘러싼 이 세상의 거대한 모순들이 너무너무 끔찍해서, 살아있는 것 자체가 너무 힘들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그런 걸 느껴서 초등학생 때는 숨을 안 쉬고 계속 버티면 죽을 수 있겠지, 하면서 숨을 참았었고 좀 더 커서는 창밖을 바라볼 때마다 뛰어내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초등학생 때 가장 좋아하던 소설이 헤르만 헤세의 <황야의 이리>였는데, 거기 '자살자'라는 단어가 나온다. 잘 기억은 안나지만 끊임없이 자살에 대해 환상을 가지고 몰두하는 사람을 뜻했던것 같은데, 내가 바로 그런 아이였다. 그 시절에는 문학과 철학에 심취했기에 지금 이렇게 유치하게 표현하는 것들을 아주 유려하고 현학적으로 써내거나 그림을 그렸고, 그런 게 재능이라 착각하고 예술가를 꿈꿨다. 스물 일곱 무렵부터는 그 시절의 나 자신을 그 시절의 내가 세상을 혐오했던 것 만큼이나 혐오하게 되었다. 이제는 영원히 그 시절과는 무관해졌다고 믿게 되었다. 참 다행인 일이다. 만약 계속 그런 상태였다면, 지금쯤 나는 등단은 했을지 몰라도 살아있지는 못했을 것 같다. 아직도 그 시절의 나에게서 완전히 헤어나오지는 못하고 있지만 말이다.

MBTI가 대한민국을 지배하기 이전에는 과거의 나자신이 지금보다도 더 싫었는데, 요즘은 단 한 단어로 쉽게 정의할 수 있게 되어 그나마 좀 편해졌다. 말해 뭐해, infp. 사실 내가 '인프피'라는 것과 인프피들은 거의 다 나같다는 것도 최근에 알게 되었다. 유행을 거부하는 고고한 인프피적 태도 덕에 최근 들어서야 MBTI 관련 글들을 찾아보며 제대로 뒷북을 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멀쩡히 살아 잘난 것 하나 없는 삶이나마 영위하고 있는 것은 다 행복을 느끼는 법을 어릴 때부터 꾸준히 훈련시켜준 엄마 덕분이다. 

세상 엄마들을 극단적으로 나누면 두 종류가 있다. 한 부류는 길거리 노숙자를 보고 '공부 안하면 너도 나중에 저렇게 돼.'라고 말하는 엄마이고, 나머지 한 부류는 천원이든 만원이든 주머니를 털어 돈을 건내며 '저 아저씨 정말 춥겠다, 얼른 가서 공손하게 인사하고 이거 드리고 와.'라고 하는 부류다. 우리 엄마는 두번째 부류였다. 솔직히 이건 절대 칭찬이 아니다. 아마 첫번째 부류의 엄마들이 나를 키웠다면 내 연봉이 지금보다 높았을 것이다. 게다가 그 노숙자가 동정받기를 싫어하는 사람일 수도 있고, 혹은 살인자나 성범죄자였을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러니까 이건 좋고 나쁨을 판단하고자 하는 말은 아니다. 그저 엄마가 자신을 가득 채운 따스함을 남들과도 나누고 싶어하는 사람이라는 말을 하고 싶다. 

엄마는 '어린아이가 누리는 행복'에 대해 굉장히 진심인 나머지, 나를 초등학교 3학년때까지 산타를 믿는 순진한 아이로 키워냈다. 상냥한 말과 다정한 마음, 동화책 속의 화려하고 풍성한 판타지 세계, 군것질의 달콤한 맛, 아무 조건없이 꼭 안아주는 엄마 품속의 따뜻함. 디즈니 만화영화보다 컬러풀하고 솜사탕보다 보드라운 그 세계를 나는 지금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고, 내가 소중히 여기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 달콤하고 따뜻하고 편안한 감각을 나눠주고 싶다. 우리 엄마가 내게 그래주었듯이 말이다.

물론 나는 엄마와는 조금 다른 사람이다. 내가 엄마에게 물려받은 따뜻함을 나눠주고 싶기는 하지만 인간의 선함이나 세상의 아름다움을 진심으로 믿지는 않는다. 그나마 순진했던 대학생 때는 세상의 모순과 싸우고자 분투했으나 우리를 데모장소로 끌고가던 어른들이 20대 여자애들의 성을 착취하고 깨끗한 척은 다 하면서 돈과 명예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것을 보면서 많이 달라졌다. 지금 나는 (진짜 어쩌다보니) 자본주의의 최전선에 있는 회사(의 작은 부서)에서 매출을 고민하는 일을 하고 있고, 솔직히 세상을 더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자본주의를 전복하는 것보다 인류를 멸종시키는 것이 훨씬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더 이상 생산하지 않으면 서서히 멸종할테니 그 얼마나 평화로운가, 하는 생각이 간혹 들기도 하고 말이다. 어린 시절 내가 결코 되지 않을 거라 믿었던 부류의 사람이 된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창과의 마수에서 벗어난 나는 '하지만'과 '그럼에도'와 '불구하고'를 함께 쓰면서도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당당한 사람이 되었다! 하하!) 나는 내가 이렇게 살아있어서 너무 좋고, 기쁘다. 어쩌면 살아있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는 사실이 내가 스스로에게서 가장 높게 치는 점인지도 모른다. 

예전에 대학생때 어떤 선생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그 자도 틈만 나면 여대생의 성을 착취하려 혈안이 된 인간이었다. 나 역시 집요하게 노렸던 시기가 있었는데 보기좋게 실패했었다.) 

너희 스스로 착하다는 착각은 절대 하지 말라, 사춘기때 자살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너희는 이미 착한 건 아니다.

그 자리에서 그 말을 나만큼 깊게 이해한 사람은 없었을 거다. (라고 그 자리에 있었던 모든 인프피 문창과생들은 생각했을 것이다. 참고로 문창과라는 비효율적인 전공을 선택한 사람들은 대부분 인프피다. 아 물론 의외로 취업이 잘되더라,라든가 드라마 작가가 되야지 등등의 계획이란 게 있었던 이성적인 분들은 제외하고.)

나는 지금도 그 말에 공감한다. 착한 사람들은, 너무나 쉽게 죽는다. 그걸 생각하면 멍하니 길을 걷다가도 눈물이 난다. 착함과는 거리가 먼 이성적인(?) 어른인 내게 남아 있는 유일한 이타적 바람이 있다면, 자살하는 사람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순전히 내 기분을 좋아지게 하기 위해 한 시간 째 영양가라곤 1도 없는 헛소리를 타이핑하고 있는 지금의 나처럼 살아있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사람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숨쉬기에는 정말,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하다. 건강한 정신으로 자살하지 않고 살아가는 일은 하루에 스쿼트를 천 개 하고 새벽 4시 반에 일어나 자기계발을 하는 것만큼 멋진 일이다. 그렇게 자기계발을 하는 사람들도 아마 '남들보다 우월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가 없는 사람'이기에 그렇게 노력하는 게 아닐까? 조금 솔직해져 보자구요? 

자기계발을 하는 잘난 사람들은 너무나 멋있지만, 그 사람들은 그 사람들이다. 삶에 점수를 매기는 일은 참 부질없고 또 위험한 일인 것 같다. 사람을 죽이는 것은 빚이나 실직일 수도 있지만 아마 세상이, 또 자기자신이 스스로의 삶에 매기는 그 잔인한 점수가 아닐까? 

숨쉬며 살아가는 나 자신, 그리고 이 헛소리 읽고 있는 고마운 누군가, 우리는 정말 잘하고 있고, 기특하다. 지금 이렇게 존재하는 것 그것말고는 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충분히 사랑스럽다. 지금 내가 바라는 건, 나를 포함해 오늘이 힘든 모두가 이 동절기의 밑도 끝도 없는 우울을 극복하고 각자의 방식으로 멋지게 살아있는 거다. 자살율 1위의 대한민국이라지만 오늘 밤 만큼은 아무도 자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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