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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츄르 Nov 17. 2021

익숙한 괴물이 찾아올 때

서른살도 중2병에 걸릴 수 있답니다

십대의 우울은 달콤했다. 그 때 내가 우울이라 생각한 감정은 내 심장을 뛰게 했고 세상을 더 예민하게 느끼게 했다. 십대의 우울은 아직까지 끈덕지게 이어지고 있는 취향을 결정했고, 약간 냉소적이고 방어적인 성격을 형성했다. 이십대의 우울은 처절했다. 그 시절의 우울은 불투명한 미래와 처참한 재정 상황, 실패한 우정이나 연애 따위와 직결돼 있는 아주 현실적인 우울이었다. 원인도 재질도 다른 이 두 종류의 우울에도 공통점은 있었다. 바로 이 감정이 나를 잡아먹고, 지배한다는 점이다. 그림자처럼 내 뒤에 따라붙은 감정은 서서히 내 몸을 타고올라와 표피부터 조금씩 나를 적셔갔다. 결국에는 내가 우울인지 우울이 나인지 모를 상태가 되어 버렸다. 

20대 초반에 나는 처음으로 이 우울한 감정이 나를 죽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직면했다. 그저 살아 숨쉬는 것 자체가 너무 힘이 들었고 그 어떤 것에도 재미를 느끼지 못했다. 정신과에서 상담을 받고 프로작도 처방받아 봤는데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살고 싶었다. 어떻게든 이 구렁텅이에서 벗어나 작은 것에 웃을 수 있는 보통의 삶을 살고 싶었다. 다행히 대학 졸업 직후, '어떻게든 돈을 벌어 생계를 해결해야 하는 상황'이 나를 이 끝없는 우울에서 건져 올렸다. 가족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뭐라도 해야 했기에, 우울해도 그렇지 않은 척 억지로 웃고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며 취업준비를 했다. 그 와중에 내 또래 사람들과 어울려야만 하는 교육과정에 참여하게 되었고, 새롭게 형성되는 관계들과 술자리들, 처음으로 가본 볼링장 따위가 나를 우울과는 아주 먼 곳으로 등 떠밀어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해줬다. 그 때의 나는 이제 막 세상에 출시된 신상품이었고, 내 발목을 잡고 있던 끈적이는 그림자 따위는 높은 값을 받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기에, 나는 그것과는 무관한 사람인 척 무뎌지고 또 무뎌졌다. 

처음 일을 시작한 스물 다섯부터 서른이 된 지금까지, 단 한번도 과거와 같은 우울이 내 발목을 잡은 적은 없었다. 잠깐 기분이 안좋더라도 금방 회복했고, 어두운 감정에 몰두하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지난 5년간 나는 화가 나거나 슬플지언정 우울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며칠 전 나는 내가 억지로 떠나보낸 오랜 친구가 다시 내 방문을 두드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슬픈 것도 아니고 화가 나는 것도 아닌데 끝없이 가라앉는 아주 익숙한 감각. 어제와 똑같은 공기가 품고 있는 수백가지 냄새가 아주 예민하게 후각을 자극하고, 어제와 같은 농도의 가로등 불빛을 내 심장이 그대로 빨아들여 가슴께가 무거워진다. 익숙하게 지나가던 풍경의 세세한 디테일에 모두 이름을 붙여주고 싶다. 그러다가 도대체 난 왜 이렇게 살지? 하는 밑도 끝도 없는 질문과 마주한다. 내 감각을 날카롭게 하던 십대의 우울과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맥없이 자기혐오에 빠져든다는 점에선 이십대의 우울과도 닮아 있다. 갑자기 나를 지배하게 된 이 감정에 어제는 힘없이 굴복해 무릎을 꿇고 말았다.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하는 지 알 수가 없고, 엉엉 울고 싶은데 그럴만한 기운도 의욕도 없었다. 하지만 서른의 내게는 이 무거운 친구와 맞서 싸우고 타협할 수 있는 나름의 노하우가 생겼다. 오늘의 나는 비타민C 두알과 하루를 시작했고, 내 우울한 친구의 긍정적인 측면을 조금이라도 사랑스럽게 여기고자 안간힘을 쓴다. 놀랍게도 우울이라는 친구에게도 장점은 있다. 모든 감각을 극도로 예민하게 만들어 조그만 자극에도 나가떨어지는 개복치 멘탈을 만들기는 하지만, 아름다움을 감각할 때도 우울하지 않을 때보다 훨씬 더 예민해진다. 때맞춰 거리를 장식하는 크리스마스 트리의 반짝임, 지나가는 사람들의 웃음소리, 빌딩 사이로 노을을 머금고 부풀어오른 분홍색 구름. 이런 것들이 모두 그대로 박제해 두고두고 보고 싶을 만큼 아름다워 보인다. 

도망치고 싶지 않다. 두려워 피해왔던 이 오랜 친구, 너무나 익숙한 이 괴물은 결국 나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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