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서울을 걷는 일에 대하여
가끔 퇴근길에 시청역에서 종각역까지 걸어간다. 밤의 서울은 무대화장을 한 듯, 낯의 햇빛보다 훨씬 진한 인공불빛들에 감싸여 있다. 맨 처음 마음을 사로잡는 건 야간개장중인 덕수궁이다. 오래된 궁은 이 도시를 뒤덮은 21세기의 건물들보다 훨씬 땅과 가까운 곳에서 나와 눈을 맞춘다. 노란 빛이 새어나오는 궐문 앞을 옛 복식을 갖춰 입은 사람들이 지키고 서 있고 그 앞에는 대학생으로 보이는 어린 연인이 손을 맞잡고 이야기를 나눈다. 이따금씩 들려오는 다정한 단어들, 붙잡아 촉감을 느껴보고 싶은 보드라운 단어들을 곱씹다 나는 다시 발걸음을 옮긴다.
걷다보면 ‘스프링’을 지난다. 스웨덴 출신의 팝아티스트 클래스 올덴버그의 작품으로 이 작품의 이름은 몰라도, 매우(다채로운 비속어로 부사어를 대체할 수 있겠다.) 비싸서 욕먹었던 청계천의 알록달록한 소라라고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이명박 정부때 34억이라는 제작비 때문에 어마어마한 비난을 받았던 게 아직도 기억난다. 그 시절에는 34억이라는 돈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느껴졌는데, 지금은 작은 부서의 1년 매출 목표 정도구나 싶어서 별 것 아니게 느껴진다. 나 개인으로는 평생 만질 수 없는 크기의 돈인데도.
이런 기만적인 착각을 할 때마다 내가 어린시절 상상하던 ‘어른’이라는 막연한 존재가, 이제는 정말 되어버리고 만 거구나 생각한다. 긍정적인 의미에서의 성숙한 어른이라기 보다는 미하엘 엔데의 <모모> 속 ‘회색 신사’나, <매트릭스> 속 스미스 요원들 같은 그런 어른이다. 이러한 이미지들은 이제 지나치게 상투적이게 된 나머지 오히려 신선하게 느껴진다. <모모>가 우리나라에 번역 출간된 해와 <매트릭스> 1편이 우리나라에서 개봉한 해는 모두 1999년이다. 그래서일까, 나는 개성없이 같은 얼굴을 지닌 무채색의 어른들, ‘회색 신사’와 ‘스미스 요원’을 떠올릴 때마다 90년대 특유의 미니멀한 스타일과 세기말의 우울하고 퇴폐적인 분위기가 뒤섞인 묘한 세계를 상상한다.
내 감성 일부는 그 시절에 저당잡혀 있다. 곳곳에 맥락없이 스며든 회색, 톤다운된 파랑, 티백을 오래 담궈둔 찻물처럼 씁쓸한 맛이 날 것 같은 빛 바랜 햇빛, 엉성하게 포장된 아스팔트 길, 색채 없이 명도로만 형태가 구분되는 높은 빌딩들. 생각나는 풍경들은 그때그때 다르지만, 대부분 레옹 속 마틸다의 칼단발이 가진 절제미와 <가타카> 속 난시가 바라보는 밤의 도시 그 사이 어디쯤에 자리잡고 있다. 어쩌면 90년대 초반생인 나는 유아기에 ‘어른’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에 막연한 동경을 품고 있는지도 모른다.
두 개의 보수언론사를 지나 광화문 교보문고까지 나는 걷고 또 걷는다. 귓구멍을 틀어막은 블루투스 이어폰에서는 취향을 직업으로 삼은 이들이 고심해 선정한 플레이리스트가 재생된다. 귀에 거슬리지 않고 시대착오적이지 않으며 적절히 세련된 음악들이다. 지나가는 사람들 모두 나처럼 블루투스 이어폰을 끼고,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다. 이 끔찍하기만 한 마스크에도 좋은 점은 하나 있다. 이 마스크 때문에 내 젊은 시절의 한 시기를 훗날 쉽게 떠올릴 수 있을 것 같다. 평화롭고 행복한 시간보다 지루하고 고통스러운 시간이 기억에는 더 짙은 흔적을 남긴다. 나는 블루투스 이어폰을 빼 주머니에 집어 넣는다.
차갑게 굳어 있던 발가락이 따뜻하게 데워질 때까지 나는 멈추지 않고 걷는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건물들을 채운 음악소리가 필터를 한 번 거쳐 걸러낸 것처럼 맑고 매끄럽게 들린다. 세련된 취향으로 무장된 음악이 걷어지니 도시를 채우는 온갖 소음들이 마치 좋은 음악처럼 심장을 뛰게 한다. 나는 시간여행자가 된 기분이다. 더 없이 낭만적인 기분으로 한 걸음 떨어져서 이 도시를 관조하는 것 같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혹시 지구 멸망까지 앞으로 남아있는 날들 중에서
지금 이 시절이 가장 낭만적인 게 아닐까?
엄지손가락보다는 열 손가락으로 타자를 두드려 기록을 남기는 것이 더 편한 마지막 세대가 아직 젊은이인 이 시절이. 어쩌면 지구 멸망 직전 타임머신을 개발한 우리의 후손들이 시간 여행을 와서 나와 함께 이 밤의 도시를 걷고 있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