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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츄르 Nov 29. 2021

속눈썹은 기를 수 있는 털이었다

서럽고 지난한 속눈썹 관리의 세월을 지나

요즘 길을 걷다 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아기들을 보면 속눈썹이 하도 길고 풍성해서 정말 나와 같은 동양인이 맞는지 유전자 검사를 해보고 싶을 정도다. 속설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시대의 아이들은 공기 질이 좋지 않은 환경에서 잉태되기 때문에 태어날 때부터 속눈썹이 길다고 들었다. 나는 경상도 산골짜기 출신 부모를 둔 덕에 유전자부터 공기 질이 너무 좋았던 모양이다. 분명히 공기 질이 최악인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잉태되어 그곳에서 태어났는데도 속눈썹이란 내 몸에 자라나는 가장 존재감이 약한 털이었다. 

숱이 적은 건 물론이고 길이도 짧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눈썹도 짙고 두꺼운 편이고, 머리카락도 조금 과장을 보태자면 우동 수준인데 무슨 저주를 받은 건지 유독 속눈썹만 형편없었다. 게다가 내게 이런 빈약한 속눈썹을 물려준 엄마는 뷰러를 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말려 올라간 길고 풍성한 속눈썹을 가지고 있었기에, 속눈썹을 들여다볼 때마다 병원에서 애가 바뀐 건 아닌지 의심했다. 

자연스레 미용에 처음 눈을 뜬 무렵부터는 화장을 할 때면 속눈썹에 가장 공을 들였다. 

마스카라는 당연히 섬유가 들어가 원래 속눈썹 위로 길게 달라붙는 일본 제품을 썼고 화장에 조금 익숙해지자 그조차 성에 차지 않아 인조 속눈썹을 사용했다. 그러다 보니 인조 속눈썹 기술의 대가가 되어 일반적인 인조 속눈썹은 쳐다도 보지 않게 되었다. 이십 대 초반의 나는 항상 인모를 사용한 풍성한 인조 속눈썹을 까만 색소가 들어간 속눈썹 전용 풀을 사용해 감쪽같이 붙이고 다녔다. 인조 속눈썹 없는 밍밍한 눈이 부끄러워 그날의 일정이 편의점에 들러 과자를 사 오는 것 밖에 없다 해도, 외출할 때는 무조건 인조 속눈썹을 붙였다. 피부 화장은 전혀 하지 않고 인조 속눈썹만 붙이는 날도 많았다. 그래서 그 시절의 나는 나이에 비해 조금 성숙해 보였고 화려한 인상이라 그 나이 때 돋보이는 풋풋하고 귀여운 매력이 전혀 없었다. 

민낯일 때도 속눈썹이 있었으면 좋겠다.

이건 그 시절 나의 간절한 염원이었다. 그래서 이식 수술 빼고는 안 해본 것이 없었다. 이식 수술을 하면 속눈썹이 머리카락처럼 계속 자라나 강남 여자들은 미용실에서 머리카락과 함께 속눈썹도 커트를 받는다는 괴이한 소문이 아니었다면 수술도 고려했을지 모른다. 물론 그럴만한 돈이 없는 것도 문제였지만.

처음 접했던 것은 속눈썹 영양제다.

고등학생 때부터 그 당시 한국에는 개념조차 생소했던 속눈썹 영양제를 고가에 구입해서 사용했다. 조금이라도 길어지거나 풍성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매일 아침저녁으로 발랐지만 눈만 따갑고 전혀 효과가 없었다.

대학생이 되고 제대로 화장을 시작한 뒤엔 속눈썹 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일자로 축 처진 속눈썹을 머리카락 파마하듯 컬을 줘 위로 올리는 시술인데, 원래 속눈썹이 빈약한지라 뷰러를 할 필요가 없다는 것 외에는 별 장점이 없었다. 다만 펌을 하고 나면 따로 뷰러와 마스카라를 하지 않고 바로 인조 속눈썹을 붙여도 자연스러워서 그거 하나는 편했다.

마지막으로 접했던 건 속눈썹 연장 시술이다. 

속눈썹 한가닥 한가닥마다 본드로 인조 속눈썹을 일일이 붙이는 미용 시술로 3주에서 길게는 두 달까지 유지된다. 내 속눈썹은 워낙에 숱이 적어 까맣고 두꺼운 모를 붙여야 그나마 티가 났는데, 그렇게 하니 속눈썹이 무겁게 처져 눈동자를 가렸다. 세수할 때마다 하도 꼬여서 오히려 불편하기만 하고 눈은 더 작아 보였다. 그럼에도 속눈썹이 생긴다는 것 하나에 꽂혀 연속적으로 시술을 받았다. 이게 아주 큰 실수였다. 속눈썹 연장은 하고 나면 화장을 지우고 세수를 할 때마다 인조 모가 한가닥 씩 떨어지는데, 내 경우는 어찌 된 일인지 내 원래 속눈썹까지 함께 떨어졌다. 그때 왼쪽 눈앞머리 쪽 속눈썹들이 아예 사라지다시피 했고 야속하게도 그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그 후 속눈썹 연장을 중단한 뒤 다시는 하지 않았다. 다시 인조 속눈썹을 붙이기 시작했으나 인조 속눈썹을 떼었다 붙였다 하는 과정에서 속눈썹이 더 빠지는 것 같아 어느 순간 그조차 하지 않게 되었다. 대신 빈약한 속눈썹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써클렌즈를 끼기 시작했다. 써클렌즈를 끼고 섬유질이 포함된 마스카라로 10분 정도 공들여 마스카라를 바르고 또 바르면 그나마 마음속의 허탈함이 채워지곤 했다. 

올해 들어서는 다시 속눈썹 펌을 받기 시작했다. 속눈썹 펌 자체가 모를 약하게 만들긴 하지만 매일매일 뷰러를 힘주어하는 것보다는 속눈썹이 덜 빠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요즘은 저가의 국산 속눈썹 영양제들이 꽤 괜찮아서 매일 듬뿍 발라주면 도움이 됐다. 요즘 인스타그램을 보면 속눈썹 영양제를 쓰고 낙타 속눈썹이 됐다는 둥, 부담스러워서 마스카라조차 하지 않게 됐다는 둥 과장된 후기로 이루어진 광고가 많이 보이는데 내가 보기엔 다 헛소리다. 속눈썹 영양제는 속눈썹에 바르는 헤어 에센스일 뿐이다. 약하고 힘없는 모를 조금 튼튼하고 윤기 있게 만들어주긴 하지만 길어지거나 숱이 많아지는 드라마틱한 효과는 없다. 

이런 상처뿐인 속눈썹의 역사를 가진 나는 무엇 무엇해서 속눈썹이 길어진다더라, 하는 건 전혀 믿지 않게 됐다. 그러다 외국 의사가 쓴 어떤 책에서 이런 내용을 보게 됐다.

'속눈썹을 풍성하게 하고 싶다면 녹내장 약을 이용해라.
녹내장 약에는 속눈썹이 자라나는 부작용이 있다.'

설마... 아니겠지. 그리고 외국 녹내장 약을 내가 무슨 수로 구해?

그때는 이러고 넘어갔는데 어느 날 그 내용이 번뜩 떠올랐다. 검색을 하니 그런 제품들을 사용해 속눈썹을 길렀다는 후기들이 종종 보였다. 아예 농도를 낮추고 속눈썹 영양제로 용도를 바꾸어 생산이 되고 있었다. 일본에서는 아예 속눈썹 영양제처럼, 속눈썹이 그려진 포장지에 담아내 유통하고 있었다. 그 제품만을 직구해 한국에 수출하는 재일 교포들도 종종 보였다. 조금 솔깃했으나 낯선 사람에게 말을 걸어 제품을 구입하는 게 조금 두려웠다. 나는 그야말로 재미로, 해당 제품의 이름을 쿠팡에 검색해보았다. 그런데 세상에, 그 제품이 판매되고 있었다. 엄지손톱보다 조금 큰 안약 통에 든 제품 하나가 2만 원대 후반. 내 기준 눈물이 쏙 빠질 만큼 비싼 가격이었으나 큰 마음먹고 한통 주문했다. 그리고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매일 아침저녁으로 정성껏 속눈썹 라인에 한 방울씩 발랐다. 이제는 요령이 생겼지만 처음에는 익숙지 않아 눈에 조금씩 들어가는 바람에 흰자가 시뻘겋게 충혈될 때도 많았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내 인생 처음으로 속눈썹이 길어졌다. 오늘은 그 약을 사용한 지 62일째 되는 날이다. (남들은 연애 d-day를 계산하는데 쓰는 날짜 어플을 나는 속눈썹 영양제 날짜를 기록하기 위해 사용한다.)

사실 중간에 여행을 가거나 할 때는 며칠 연속 사용 못할 때도 있었고, 술을 많이 마셔 속눈썹 관리는커녕 마스카라를 한 채로 잠든 날도 있었다. 그런데도, 속눈썹이 실제로 자라났다. 특히 이십 대의 속눈썹 연장으로 모근조차 보이지 않게 된 왼쪽 눈앞머리에 길고 긴 속눈썹이 자라난 걸 발견했을 때 나는 너무 기뻐 오열했다. 

이건 지금 브런치를 쓰면서 바로 찍어본 민낯의 속눈썹 상태다. (눈썹 사이가 칙칙해서 블러 처리를 조금 했는데 픽셀이 깨지는 것이 아주 민망하다.) 다른 속눈썹 관리 후기들에 비하면 비포 사진 같은 정도지만, 나는 아예 속눈썹이 없었던 사람이라 이 정도 속눈썹을 갖게 된 것도 감지덕지다. 2주 전에는 속눈썹 펌을 받으러 갔었는데 평생 들어본 적이 없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도 속눈썹 길이 자체는 보통 사람들보다 길어요."

물론 '그래도' 앞에는 '속눈썹이 약하고 숱이 적다.'는 말이 있었지만 평생 너무나 많이 들었던 소리라 아무런 타격이 되지 못했다. 속눈썹이 보통보다 길다니, 빈 말이어도 너무 짧은 속눈썹이라면 차마 하지 못할 소리인데 그런 소리를 듣다니, 최소한 이제 보통 정도의 길이는 된다는 게 아닌가. 정말 눈물 날 정도로 기뻤다. 

사실 중간에 여행을 가거나 할 때는 며칠 연속 사용 못할 때도 있었고, 술을 많이 마셔 속눈썹 관리는커녕 마스카라를 한 채로 잠든 날도 있었다. 그런데도, 속눈썹이 실제로 자라났다. 특히 이십 대의 속눈썹 연장으로 모근조차 보이지 않게 된 왼쪽 눈앞머리에 길고 긴 속눈썹이 자라난 걸 발견했을 때 나는 너무 기뻐 오열했다. 


아래 사진은 마스카라를 한 상태의 비교 사진이다. 위의 사진은 서클렌즈를 끼고 속눈썹에 내 영혼이 들러붙을 정도로 초집중하며 오백 번 정도 마스카라를 떡칠한 상태다. 속눈썹이 거의 직각으로 설만큼 뷰러를 한 상태인데도 위로 보이는 털이 거의 없다.

반면 최근 마스카라를 하고 찍은 사진을 보면 위의 사진보다 해상도가 낮은데도 속눈썹의 존재감이 뚜렷하다. 마스카라를 하긴 했지만 예전만큼 심하게 떡칠하지 않고 적당히만 발랐다. 그런데도 예전보다 속눈썹이 훨씬 길고 풍성해서, 써클렌즈를 끼지 않았는데도 흐릿해 보이진 않는다.

다만 이 녹내장 약에는 눈에 들어갔을 때 충혈된다는 것 외에도 부작용이 있다. 피부에 닿으면 그 부위가 짙게 착색된다. 그런데 이건 부작용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생각하기에 따라서 또 다른 효과가 될 수도 있다. 내 경우엔 눈꺼풀 부분이 조금 짙어지니 아이섀도를 살짝 바른 것 같아 오히려 나쁘지 않았다. 

비록 속눈썹이라는 건 인생에 있어 하등 쓸모없고 하찮은 부분이긴 하지만, 이 세상에 노력해서 되는 것도 있다는 사실이 새삼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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