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잘하고 싶다면 Blind처럼 살아보자
미국에 간지 일주일쯤 되었을 때의 일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전생에 유관순 열사의 사촌쯤은 아니었을까 싶을정도로 독립적이어서, 내가 할 수 있는 한, 어떤 땐 할수 없을 것 같은 일들까지도, 어지간하면 스스로 하려는 성향이 무척 강했다.
당시에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잠깐 직장 생활을 하다가, 여러 슬픈곡절과 아픈 사정으로 인해 그만 두고는,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것을 좀 배우는 시간을 가져 보는 것이어떻겠느냐’는 엄마와 담당정신과 의사의 권유에 따라 몇 개월치 항우울제와 이민가방 두 개에 패키지로묶여 미국의 한 대학 언어연수 프로그램에 보내진(?) 상태였다.
혼자 가기 전, 내가 혼자 살아갈 수 있는 적응을 도와 줄 자원들을수소문하며 Arrange까지 하고 도착한 그 곳에서, 나는캠퍼스와 그 주변을 독립적으로 다닐 수 있는 Mobility training도 전문가로부터 받고, 캠퍼스 내 호텔에 묵으면서 앞으로 내가 살 아파트를 구하는 일도 스스로 처리하는 중이었다. 일주일 내내 호텔에 머물며 교내 식당에서 7.99불에 파는 스시롤에지쳐갈 때쯤, 음식을 해 먹을 수 있는 1인실 도미토리로옮길 수 있게 되었다. 처음 그 곳에 가게 되자 간단한 조리용품 및 생활용품이 필요해졌다.
처음 기숙사에 입소하던 날, 주변 탐색 및 우선적으로 필요한 생활용품을사는 것은, 학교에서 장애학생인 나의 초기 적응을 도와주는 코디네이터가 자기 차로 근처 세이프웨이에데려가서 도와 주었다. 하지만, 그걸로는 충분치가 않았다. 원래 살림이란게, 사도 사도 빠진 게 있고, 필요한 건 계속 생기게 마련인 법. 내가 필요할 때마다 즉각적으로누군가의 도움을 받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
답.답.하.다.
궁리 끝에, 이번에도 나는 내 삶의 주도권을 회복하기 위해 이 악조건속에서도 독립의 기치를 높이 들고 혼자 마트 장보기에 도전하기로 결정했다. 학교 직원인 Erica와 그녀의 차를 타고 함께 갔던 Safeway 까지의 거리가직선으로 서너 블록 밖에 되지 않았다는 관찰 데이터를 떠올리며, 늦은 오후(어쩌면 이른 저녁쯤?), 무모하고 용감하게 40도도 넘는 사막 길로 나섰다. 사막 기후의 특성상, 해진 뒤 좀 더 선선하고 늦은 저녁에 나가고싶었지만, 야맹증 때문에 그럴 수도 없었다. 두 번 정도묻긴 했지만, 내 기억력과 관찰력은 매우 정확한 편이라서 그리 어렵지 않게 약 20 분이 조금 못 되는 시간을 걸으니 마트에 도착할 수 있었다.
무사히 도착 했으니 원하는 걸 사가지고 안전하게 돌아갈 수 있는 확률은 훨씬 높아졌으리라. 그런데, 한국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커어어어다란 마트의 위용에 좀압도되는 느낌이 들었다. 여기가 이마트도, 홈플러스도 아니고… 완전히 낯설고 뭘 파는지도 정확히 모르는 광활하기 그지 없는 미국마트에서 시각장애에 언어장애까지 중복장애를가진 내가 혼자 쇼핑을 하는 건 불가능할 것 같았다.
일단 비어있는 계산대로 가서는, 내가 여기서 쇼핑을 하려고 하는데, 시각장애가 있어서 물건을 찾기 어려우니 도와줄 수 있는 직원이 있는지 문의했다.
물론, 당근 영어로.ㅋㅋㅋㅋ
이런 말부터 하지 않으면 살 수가 없는 시각장애인인지라, 아무리 영어울렁증환자라도, 영어로 말만 하려면 눈앞이 하얗게 변해 급성 시각장애 증상이 나타난다 해도, 어떻게 해서든 말해야 한다. 아니,말 할 수 밖에 없다. 안 그러면 생존이 불가능한 상황도 발생하니까.
미국에는 이런 서비스가 갖추어져 있다는 걸 알고 있었고, 설사 장애인이쇼핑을 왔을 때 돕는 공식적인 서비스가 없다 해도, 그건 당연히 마트 직원 그 누군가가 해야 하는 일이라고생각하는 자연스러운 문화가 정착되어 있다는 걸 알았기에, 나는 당당하게 도움을 요청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마 이런 사회 시스템에 대한 믿음이 없었다면, 아무리 유관순 열사뺨 치게 독립적인 나라도 언어 및 시각장애를 안고 겁 없이 혼자 마트에 가는 일은 못했을 것이다. 조금기다리자 남자 직원 한 분이 반갑게 인사하며 뭘 도와주면 좋겠냐고 물으며 내게 다가왔다.
마트를 출발하기 훨씬 전부터 내가 무엇 무엇이 필요한지, 어떻게 말할지를얼마나 많이 생각하며 머리 속에 꼼꼼히 정리해 두었던가?
다른 건 다 괜찮았는데, 두 가지 물품을 설명하는 데에 문제가 있었다. 이 날 쇼핑의 주된 목적은 기본적인 조리도구와 간단한 식료품을 사는 것이었는데, 한국인이라면 국을 끓이고 밥을 하는 데 꼭 필요한 국자와 쌀 씻을 바구니를 뭐라고 지칭해야 할지, 아무리 생각해도 감이 안 오는 것이었다.
스마트폰으로 찾아 보면 되지 않냐고?
그때는 어언 13 년 전, 잡스가아직 시각장애인들의 삶을 확 바꿔 놓은 아이폰을 만들기도 전이었으며, 유학생들은 대개 조그마한 전자사전을가지고 다니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늘 그래 왔듯, 그 전자사전을 쓸 수 있는 호사는, 시각장애인인 내게는 허락되지않았다. 전자사전의 텍스트를 음성으로 변환해 주는 기능을 가진 전자사전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마트에 있는 모든 물건들의 실체를 볼 수 있는 당신에게, 이 상황은 아무 문제도 안 될 것이다. 설혹, 당신이 ‘국자’와 ‘쌀 씻는 바구니’가 영어로 뭔지 모른다 해도, 그 물건을 사는 데에는 아무 문제가 없을테니까. 국자와 쌀을 편리하게씻을 수 있는 바구니가 아리따운 자태를 뽐내며 당신의 눈 속에 들어와 나를 사가라며 손짓까지 해 줄 테니까. 당신은맘에 드는 것들을 그냥 쓱 집어 오면 될 일이다. 하지만, 볼 수 없는 나에게 그런 안락한 삶은 허락되지 않는다. 그러니, 나는 늘, 내날것 그대로의 영어실력으로 맨땅에 헤딩을 하며 영어를 그야말로 몸으로 체득할 수 밖에 없었다.
이 날도 고강도 Blind English training의 서곡이시작된 것이다.
Frying pan.
딩동댕.
Canned tuna.
딩동댕.
Onion.
딩동댕.
…
아! 이제 국자와 쌀 씻는 바구니를 사야 한다.
뭐라고 말할까 고민고민.ㅋㅋㅋㅋ
서로 이것저것 신변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며 여유 있게 여기까지 쇼핑을 하다가,나는 조금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진지하게 말을 꺼냈다.
Jinsle: ‘Umm, I want to buy some kitchenutensils. But I don’t know exact names. So let me explain.^^’
Mart staff: ‘Okay, no problem.^^’
Jinsle: ‘When we boil soup and put it in abowl, we have to use a big big spoon…’
Mart staff: ‘Oh, I see. Ladle.’
Jinsle: ‘Oh, is it? How can I spell it?’
Mart staff: ‘l.a.d.l.e, ladle.’
Jinsle: ‘Thanks. Now, second quiz.’
Mart staff: ‘Okay!’ (이쯤 되니, 마트 직원도어눌한 영어로 나름 애쓰며 설명하는 내가 귀여웠는지 웃으며 약간 즐기는 듯 했다.)
Jinsle: ‘When we wash grains for cooking, wehave use a a basket which has tiny tiny holes on it…’
Mart staff: ‘Oh, strainer. Gotcha!^^’
(만세! 드디어, 마침내, 결국, 국자와조리 득템에 성공!)
그렇게도 쉽지 않았던 ‘스무고개 장보기’였지만, 차도 없이 무겁디 무거운 짐들을 잔뜩 들고 무더운 사막의저녁 거리를 한참이나 걸어야 했지만, 이 날 나는 정말 엄청난 성취감과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다.
아! 어떻게 해서든 통하는 거구나,용기를 가지고 저지르면 어떻게든 생존할 수 있겠구나! …
이 날의 뻘짓(?)은, 이후로나의 미국 체류 기간을 좀 더 독립적이며 풍부하고 윤택한 경험으로 채워 가는 데에 엄청난 자양분이 되어 주었다. 얼마 후, 나는 아파트 헌팅도 혼자 했고, 집을 보고, 계약서를 쓰는 모든 과정을 시각장애에도 불구하고 나스스로 별 무리 없이 처리할 수 있었다.
보통, 외국에 나가면, 사람들은영어울렁증 때문에, 못하는 영어로 더듬거리기 싫어서, 도저히영어로 입을 뗄 엄두가 안 나서 등등의 이유를 대면서 Body language를 사용하게 된다.
눈으로 말해요, 손으로 말해요.
일종의 청각장애 체험인 셈인데…
나야 안 되니까 못하는 일이지만, 된다면 편할 것 같긴 하다.
실제로, 얼마 전, 일본에혼자 갔을 때, 일본어가 잘 안 되는데, 영어는 도저히 안통하니, 어찌나 답답하던지… 나도 할 수만 있다면 눈과 손으로가리켜 가며 말할 수 있었으면 하는 전실한 바람이 생길 지경이었다. 그러나, 잠깐 Body language로 상황을 해결하는 건 편할지 몰라도, 이렇게 살면, 절대로 영어가 늘 수가 없다.
만약, 당신이 정말로 절실하게 FluentEnglish speaker가 되고 싶다면, 외국 여행지에서, 외국친구를 만날 때, 외국인과 비즈니스를 할 때 등등, 언제라도 Blind mind-set을 장착해 보기를 강력히 권한다.
눈이 당신의 들을 기회, 말할 기회를 빼앗지 않도록, 편한 길로 나를 이끌지 않도록, 눈을 감고, 입과 귀를 열어 두기를…
내 영어 소통능력의 8할은, 볼수 없는 내 눈 때문에 얻어진 것이라는 걸, 나는 자신있게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