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Blind Englis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은진슬 Jul 30. 2017

사전 없이 영어공부해보기

Blind는 단어의 끝을 절박하게 붙잡는다.

** 나는 전편에서 밝혔듯, ‘영어를 공부한다’라는 개념에 동의하지 않기 때문에, ‘영어공부’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 역시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지양하는 편이다. 하지만, 이번 에피소드는, 내가 학생으로서 공교육 시스템에서 강제로 영어를 공부해야 하는 상황 속 경험을 다루기에, ‘영어공부’라는 개념을 사용하기로 한다.  


** 영한사전 없이 영어를 공부한 Blind student.  

내가 중,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그러니까, 호랑이는 담배 피우고, 여우는 꼬리 아홉 개를 휘날리던 시절이다.  


격.세.지.감.  


스마트폰은 커녕, 전자사전도 없던 시절, 그 때의 우리는 단어장을 만들어 가지고 다니면서 단어를 외우고, 소형 영한사전을 갖고 다니며 영어 공부를 했다. 지금이야 이런 번거롭고 짐스러운 것들 다 필요 없이, 손 안의 스마트폰 하나면 세계 주요 언어들의 질 좋은 사전들과 단어 암기를 돕는 어플리케이션까지, 외국어 공부하기 참 좋은 시절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사전은 고사하고 교과서도, 칠판도 볼 수 없는 나는 어떻게 영어 공부를 했을까?  

나는 기본적으로 시각장애인의 촉지문자인 점자를 사용하는 사람이다. 국/검정 교과서야 늦게라도 나라에서 점자로 책을 만들어 주지만, (교과서인데 학기 시작할 때 안 나오는 경우도 제법 있었고, 심지어 내가 볼 교과서 교정을 내가 본 적도 제법 있었을 만큼 열악했던 시절이었다.) 참고서나 사전 같은 걸 점자로 만들기 쉬운 시절은 아니었다. 그러니 그 흔한 독해참고서 하나를 보기도 쉽지 않았던 시절, 개인이 점자로 된 사전을 가지는 일은 거의 불가능했다.  


게다가, 당시 존재했던 유일한 점자영한사전은 동아출판사에서 나오는 아주 작은 포켓용 소사전 뿐이었는데, 그게 무려 33권.  


ⓒ점자도서관


여기서 이해를 돕기 위해 일반 책을 점자 책으로 바꾸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언급할 필요가 생긴다.  

점자는 촉지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당연히 올록볼록 부피도 생기는 데다가, 한 글자가 차지하는 면적도 훨씬 클 수 밖에 없기 때문에, 똑 같은 한 페이지를 점자로 만들면 평균 2.5배에서 3배 정도로 늘어나게 된다.  


예를 들어, 베고 자면 딱 좋은 일반 ‘수학의정석’ 책을 점자로 만들면, 200에서 300페이지 정도의 책 35권 정도가 거대한 서가로 변신하여 ‘짠’하고 내 앞에 나타난다.  

이건 팝콘도 아니고…ㅋㅋㅋㅋㅋ  


그러니 포켓용 영한사전이라는 이름과는 달리, 당시 국내 유일의 시각장애인용 점자 영한사전은 원한다고 쉽게 구매하거나 휴대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던 것. 점자책의 이런 특성 때문에, 당시의 내 방은 가족 내에서의 나의 서열과는 무관하게 우리 집에서 가장 컸고, 온 벽이 책꽂이로 꽉꽉 채워진, 흡사 엄청난 학식과 지성을 겸비한 교수님의 서재의 아우라를 뿜어낼 지경이었다. 그 책꽂이에 꽂힌 책들이 고작 성문종합영어, 일반수학의 정석, 몇 권의 영어 독해책 정도였다는 건 안 비밀.ㅋㅋㅋㅋㅋ  


시각장애인으로서의 이 특이하고도 이해 불가한 상황을 설명하느라 서론이 엄청 길어져 버렸다.  


결론은, 1999년경, 시각장애인용 한국어 화면읽기 프로그램이 개발되어, 컴퓨터 CD로 만들어진 엘리트 영한사전을 사용할 수 있게 되기 전까지, 나는 기본적으로 사전이 없이 공부를 한 셈이다.  


그 때, 그 CD 사전을 가지고 얼마나 감동했던지, 허나, 억울함도 컸다. 이미 나는 당시, 악명 높기로 유명한, A 학점을 받는 사람과는 상종도 하지 말라는 전설이 전해지던 어렵고도 어려운 두 학기 동안의 교양영어 수업을 모두 A학점을 받고 이수한 뒤였기 때문이었다. 겨우겨우 강제로 해야 하는 영어교육에서 헤어나자마자 사전을 볼 수 있게 되다니… 이젠 영어공부 안 해도 되는데…ㅋㅋㅋㅋ     


** 절박하게 단어의 끝을 잡고 공부하다!  


사전도 없이 나는 어떻게 그 오랜 시간 동안 영어 공부를 했을까?  


사전을 아무 때나 볼 수 없다 보니, 독해를 하다가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어느 정도 모아 두었다가 동생이나 언니한테 사전을 찾아 읽어 달라고 했다. 하지만, 이건 여간 답답한 일이 아닌 것이, 당장 궁금하고 무슨 뜻인지 알고 싶어 뇌가 근질근질한 그 시간, 바로 그 컨텍스트에서 단어를 알게 되면 학습효과가 더 크고 암기도 잘 되기 마련인데, 그 찬스를 놓치게 되니 속이 터질 지경이었다.  


그러다 보니, 내 뇌는 희한하게 진화하기 시작하여, 그냥 단어를 모른 채로 영어를 푸는 Guessing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독해 지문에 뜬금 없이 ‘Cochlear implant’가 나타났을 때, Coclear라는 단어는 전혀 감이 오지 않아도, 지문 속에 있는 ear, brain, device, hear, impaired 등등의 정보를 통해, 수능형 5지선다 문제는 어느 정도 풀 수 있을 만큼의 Guessing이 가능해 진다. 또한, 어쩌다가 날 잡고 사전을 읽어줄 수 있는 사람이 곁에 오래 머무르는 호사가 생길 때엔, 이 때가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하나하나 단어의 끝을 절박하게 붙잡고 암기하려 노력했다. 어차피 내겐 여러 번의 기회는 없다는 걸 너무나도 잘 알기에, 나의 뇌는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여 몸 속의 포도당이란 포도당은 다 끌어 모아 최적의 암기를 위해 풀파워 작동하게 되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척박했던 환경이었지만, 역시 인간은 적응의 동물인지라, 다 그 나름대로 살아 남는 방법이 생겼던 것 같다.  


대학교 1학년 때도, 주기적으로 영어과제를 위해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나와 중앙도서관에 가서 단어를 찾아주곤 하던 친구가 있었고, 나는 그렇게 어렵게 어렵게 영어과제를 했더랬다. 당시, 우리학교 영어는 신촌 바닥에서도 매우 어렵기로 악명이 높았는데, 그걸 사전도 없이 해내기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그런데, 몇몇 친구들은 이런 내 상황도 모르고는, 내가 과제를 해 가지고 오면 아무 생각 없이 베끼기도 했는데, 솔직히, 엄청 열 받고 속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휴! 눈도 멀쩡한 것들이 이렇게까지 하나? 내가 저 눈 가졌으면 저렇게 공부하지는 않을텐데…’  

(물론, 캠퍼스에서의 원활한 교우관계를 위해 속으로만 생각했다.)    

 

** 사전이 없다고 생각하고 영어 공부를 해 보자.   


요즘에야 스마트폰이라는 멋진 녀석 덕분에,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질 좋은 사전들을 펼쳐볼 수 있게 되었다. 참 편리한 것도 사실이며, 잡스 덕분에 Voiceover 기능이 지원되는 아이폰으로, 사전도 없이 영어를 공부했던 시각장애인인 나 역시 완전 용 됐지만, 이 달콤한 편리함으로 인해 우리들의 뇌는 점점 더 퇴화되어 가는 것 같아 심히 걱정스럽다. 이제 나조차도 더 이상 연기처럼 사라져 가는 단어의 끝을 잡고 절박하게 외울 필요도 없고, 단어를 그 때 그 때 찾아볼 수도 있으니, 단어들을 외워야 할 간절하고 절실한 마음도 점점 사라져 간다. 이러다가 몇 세대쯤 지나고 나면, 우리 인간의 뇌가 지금의 절반 정도의 무게로 줄어드는 것은 아닐지…ㅋㅋㅋㅋㅋ  


오늘의 결론은, 영어를 공부할 때, 사전을 좀 덜 펼쳐 보자는 것이다. 마치 사전이 없는 듯이, 아날로그적인 방법으로, 손가락 보다는 뇌를 좀 더 사용하여 추론과 암기를 해 보자는 것이다. 한 번 단어를 외울 때, 단어의 끝을 간절히 잡고 외우되, 설사 잊어버렸다 해도 성급하게 포털 영한사전을 실행하지 않기를 권한다.  

주변 정보들을 잘 활용하여 Guessing을 통한 언어적 추론능력을 키워 보기를 권한다.    


** 덧붙이는 글:  비록, 어쩔 수 없는 열악한 환경에서의 경험을 통해 얻은 것이고, 많은 사람들에게 적용 가능한 방법일지 비전문가인 제가 확신할 수도 없지만,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우리 나라 영어 교육의 현실과 트렌드를 지켜보면서, 나름 유의미한 화두를 던질 수는 있으리라 생각되었기에, 조금씩 가벼운 마음으로 끄적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글을 쓰는 걸 좋아해서, 그저 스트레스를 좀 풀고자 쓰기 시작한 글일 뿐인데,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읽어 주셔서, 조금 걱정도 되고 부담스럽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영어를 매개로 장애를 가지고 이 땅을 살아가는 사람으로서의 다양하고 이채로운 경험들을 풀어 놓는 마음으로 시간이 허락할 때마다 열심히 써 보고자 합니다. 부디, 너그러운 마음으로 읽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