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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진슬 Aug 16. 2022

죽음 후 그윽한 향기로 남는 삶

-내 인생 최고의 선생님, 하늘에서 평안하시기를

장애를 가지고 학교 생활을 해본 사람들은 어느 정도 공감하겠지만, 많은 경우 교사상을 긍정적으로 가져가기 어렵게 만드는 교사들을 자주 접하게 된다. 물론 장애로 인해 정말이지 남다른 교사, 한 아이를 살리고 보듬는 참 교사를 보게 되는 경험도 드물게는 하게 된다.


즉, 교사상이 양 극단으로 나뉠 확률이 높다는 얘기.

안타깝게도 나의 경우는 교사상이 매우 좋지 않다.

내 참담했던 학교 생활의 원인은 철 모르고 어린 아이들이 아닌 충분히 성숙하여 아이들을 보듬고 가르쳐야 하는 교사들로부터 받은 상처로 인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참담하고 어두운 학교 생활 속에도 한 줄기 빛과 같았던 선생님 두 분이 계신다.

이 두 분이 계시지 않았다면 나는 어쩌면 고등학교도 제대로 졸업하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한 분은 안마, 마사지, 침술의 이론과목인 의료임상 선생님이셨고, 다른 한 분은 서울맹학교 합주단을 이끄셨던 음악 선생님이셨다.

내가 초등학교 시절에 한국에서는 더 이상 내 수준에 맞는 점자 악보를 구하기도 어렵고 외국 점자 악보를 가지고도 이걸 어떻게 읽는지 제대로 가르쳐 줄 사람도 마땅치 않아 피아노에 흥미를 잃어가고 있을 때, 울 엄마는 크리스마스 선물로 플루트를 슬쩍 주셨었다.

그래서 2년 열심히 배웠고, 전공하는 것만 아니라면 충분히 즐기며 살 수 있을 만큼 플루트를 잘 다루게 되었다.

중학교를 서울맹학교로 옮기면서 자연스럽게 플루트로 학교 합주단에 들어가게 되었고, 그래서 합주단 선생님이신 최영식 선생님과도 인연을 맺게 되었다.

늘 너무너무 멋진 모습, 그야말로 영국 신사와 같은 옷차림과 매너로 아이들을 맞아 주셨다. 그렇다고 그 모습 속에 대부분의 악기 다루는 사람들이 풍기기 쉬운 거만함이나 우월감 같은 건 찾아볼 수 없었다. 선생님을 떠올리면 멋진 가을 날, 선생님의 멋졌던 바바리코트깃과 더 멋졌던 바이올린 연주가 떠오른다.

서울맹학교에는 당시 연세대학교 기악과를 나온, 시각장애를 가진, 능력은 뛰어났으나 인성은 별로였던 나이 많은 정규직 음악교사가 있었다.

그 분은 내가 교생 나갔을 때도 당시 늘고 있었던 시각 자폐 중복장애 아이들을 수업에 어떻게 참여시킬까 골몰하며 다양한 교수법을 고민하는 나에게 저런 애들이 뭘 알아 듣겠냐고 그런 건 하지 말라고 했던 분이셨다. 본인도 시각장애를 가지고 있었는데 어떻게 저런 식으로 말할 수 있는지 나는 이해할 수도, 공감할 수도 없었다.

반면, 최영식 선생님은 장애를 가진 교사가 <저런 애들>이라고 말하는 그 애들까지 함께 품고 보듬고 가르치신 분이셨다.

자폐성 장애로 착석이 안 되는 애들을 달래어 착석시키고, 악기도 제대로 관리 못 하는 아이들 목관, 금관, 현악기 할 것 없이 닦고, 튜닝하고, 정리하고 챙겨주셨으며, 화장실 간다면 화장실도 함께 가 주셨다.

나는 늘 그렇듯, 딱히 두드러지지 않게 조용히 플루트만 불며 6년 간 합주단 안, 한 구석에서 조용히 지냈지만, 그 속에서 누구보다도 예리한 눈으로 많은 생각을 하며 더 없이 복잡한 심경으로 그 선생님의 아름답고 존경스러운 모습을 지켜보았다.

고등학교 2학년 때인가는 그 분 아드님께서 결혼을 하신다며 결혼식 반주를 조심스럽게 부탁하시기에 평소 존경하는 선생님이니 만큼 흔쾌히 해드렸었다.

그런데 아드님 결혼 마치고 다음 주 학교에 오셔서는 쉬는 시간에 나를 부르시더니 고맙다며 예쁜 초콜릿과 연브라운색 우산 하나를 선물로 주시는 게 아닌가?

사실 음악 하는 사람들은 안다. 친분이 없는데도 그냥 같은 학교 선배라고 함부로 결혼식 반주 해달라고 하고 안 해준다고 하면 해주는 게 당연하다는 듯 막 욕하고 무례하게 굴고, 같은 반 동기니까 결혼식 반주 해달라고 하고는 수능 일주일 전인데도 멀리까지 가서 반주한 사람한테 아무 사례도 주지 않는 사람들이 다반사다.(맹학교에는 나이 많은 사람들도 종종 학교에 다니기 때매 고3 때 같은 반 오빠가 결혼을 하는 초유의 사태도 있었음)

이런 경험 밖에 없었던 나에게, 학교 선생님이시며 어른이니 그저 당연히 내가 해야 하는 일로 여기실 거라 생각했던 나에게 생각도 못했던 마음과 매너가 듬뿍 담긴 선물을 주시니(원래 이게 정상임) 나는 그 존중과 배려가 담긴 선물에 너무 감사하고 감동할 수 밖에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선생님도 악기를 다루는 분이시기에 결혼식 반주 하려고 들이는 여러 수고로움과 들이는 시간, 그 결혼식에 누가 되지 않게 많이 연습하고 준비한다는 걸 아셨기에 어린 고등학생인 나에게 그렇게 정성껏 선물을 해 주신 것이리라.

사실, 맹학교 때 일이라면 뒤도 돌아보지 않던 내가 몇 년 전 최영식 선생님의 안부를 알고 싶어 조심스럽게 알아본 적이 있었는데 소문에 돌아가셨다는 이야기가 들려 와서 안타까워하며 더 알아보기를 포기했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지난 일요일 페이스북 속 시각장애인들 사이에서 최영식 선생님의 부고 소식을 알니는 글들이 나타난 것이다.

나는 순간 정신이 아득해지며 마음이 먹먹해졌다.

그 날 하루 종일은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 날이 발인이 진행되는 아침이었기에 장례식장에 가볼 수도 없었다.

조금만 일찍 알았더라면, 아니 내가 좀 더 사교적이고 시각장애인계와 소통만 하며 살던 사람이었더라면 좀 더 빨리 알았을텐데 하며 처음으로 비사교적인 나를 탓하는 마음까지 들었다.

20대 초반에 아빠가 갑자기 돌아가셨을 때, 죽음 후에 그 사람의 진짜 삶의 모습이 드러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죽음 후에 남은 사람들이 그 사람을 어떻게 그리고 기억하는지, 그것이 남은 가족에게 어떤 의미가 되는지도 알게 되었다.

아빠의 갑작스런 죽음이 슬펐지만 아빠와 일로, 사교로 다양한 방식으로 관계 맺은 사람들이 아빠를 너무나도 좋은 사람, 선한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위안이 되었는지 모른다.

선생님이 떠나자 선생님을 기억하는 몇몇 시각장애인들의 포스팅이 보였는데 하나 같이 향기롭고 겸손하고 아름다운 한 연주자이자 참 교육자의 모습이었다.


아래 선생님 기사 두 개를 첨부하는 것으로 내 못 다한 선생님에 대한 존경과 사랑의 마음을 대신할까 한다.

편백나무향이나 솔향기 같이 늘 은은하게 우리에게 향기로웠던 선생님,

늘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우리 곁에 겸손하고 멋진 모습으로 함께 해 주셨던 선생님,

죽음 후 그윽한 향기로 남는 아름다운 삶을 보여주신 선생님,

내 인생 최고의 선생님, 최영식 선생님! 부디 그 곳에서 평안하시기를 기원합니다.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5/0000183150?sid=102

https://www.yna.co.kr/view/AKR2022073102830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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