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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규영 Aug 24. 2019

주제란 무엇인가

쓰는 사람 입장에서는?

 드디어 제일 설명하기 곤란한 단원에 도달했다. 소설 쓰기에서 주제란 무엇인가, 어떻게 설정하느냐, 어떻게 보여주느냐. 그것으로 무얼 말하고 싶은가. 그런 것들을 짚는 시간이 되겠다. 주제도 묘사처럼 긴 시간에 걸쳐 이야기를 해야겠다.


 앞서 ‘중간점검’ 단원에서 학습한 바 있듯 소설이란 어떤 이야기를 보여주는 방법 중 하나이다. 즉, 우리가 어떤 책을 읽든 그 텍스트, 활자, 인쇄물에는 그것이 ‘소설’이라는 정체성보단 ‘이야기’라는 성질을 갖게 된다. 하나의 학문이나 평가대상이 아니라 소소한 읽을거리가 된다는 말이다. 그 이야기는 영화도 될 수 있고, UCC가 될 수도, 그림이 될 수도 있다. 당신 친구가 흐린 기억을 되짚어 말로 풀어내는 요약이 될 수도 있다. 그런 감각을 전제로 깔아두자. 소설은 이야기를 담은 것이다-, 하고.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 우리가 아는 ‘주제’란 대개 어떤 모습인가. ‘소설의 주제’ 말이다. 꼭 어떤 한 문구로 요약된 것이고, 심오한 어떤 것을 향하고 있지 않던가. 그래서 주제를 미리 정해두고 글을 쓴다는 것은 어떤 단어, 문장, 세태 따위를 언급하고 싶은 화자를 만들어낸다. ‘정치 세계의 암투’를 주제로 쓰고 싶으면 이야기보다는 그 암투의 성질에 주목하게 된다. 그것이 왜 부조리하고 우리 삶에 안 좋은지 알려주려 한다. 설명하려 든다.

 꼰대 할아버지, [중년의 행패]를 적고 싶어서 세대 갈등 소설을 적는 경우는 젊은 사람의 입장에서 쓴 변명 같은 문장이 섞이기 마련이다. 나는 그런 글을 보면 딱 덮는다. 이건 이야기가 아니네. 허접하군, 하고.

 페미니즘 소설들이 가장 쉽게 저지르는 실수이기도 하다. 장르가 너무 신선한 탓에 이야기가 아니라도 인정받는 추세이긴 하지만, 적고 싶은 말을 곧이곧대로 주제와 일치하게 ‘편집자적 논평’ 해버리면 곤란하다. (요즘 말로 뇌절이다.)     


 그럼 주제는 어떻게 정하는 것인가. 딱 잘라 말하면, 정하는 건 아니다. 정할 수도 있지만, 그게 좋진 않다. 주제란 예술의 한 용어처럼, 광범위하고 미묘한 느낌을 가졌다고 알고 있는 게 좋다. 왜? 글 전체에 고루 녹아있고, 대놓고 말한다기보다는 ‘나도 모르게 공감하기’ 때문이다.     

 주제라는 것은 꼭 어떤 문장이 아니어도 좋다. 아니, 어지간하면 문장이 아닌 게 좋다. 희미하고 널찍한 게 좋다. 이건 사상이나 역사를 쓰라는 게 아니다.

 주제란 글에 ‘녹아 있어야’ 한다. 대놓고 쓰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면 내 글의 특징이 여기서 빛나는데, “글에 녹이라고 말하면 대체 어떻게 쓰라는 겁니까?”에 대답해주겠다.     


 일차적으로, 다른 매체에 빗대어 ‘주제’에 대해 인식하는 게 좋다. 영화를 예로 들자면, 순수한 공포 영화의 주제의식은 대부분 ‘무서워해라’에 있고 속에 사회 비판적 메시지가 있는 형식이다. 그런 주제의 이야기가, 세상을 어떻게 비추어주고 있는지 상상해보라. 그 영화들의 카메라 움직임, 색체, 배우들의 음성은 톤이 어떤가? 너무 건조해서 가래가 낀 듯 한 탁한 느낌을 주진 않나? 멜로드라마의 음성녹음, 후처리와 공포영화의 음성 후처리가 과연 같을까? ‘무서워해라’는 그런 데서 비롯된다. 명도를 낮추고, 1인칭을 쓰고 하는 것들. 그것은 장르가 가진 1차적 주제의식을 완성시키려는 노고다. ‘공포영화답게’ 만들려는 것이다.

 다음엔 주제의식이 굉장히 뚜렷한 <인생은 아름다워>를 생각해보자. 전쟁 전엔 유대인에 대한 차별을 다룬다. 그 속에서도 행복을 잘 쟁취하는 넉살을 보여주며 나름의 행복함을 보여준다, 그러다가 전쟁 후 일어난 비극이 주요 주제다. 만약 우리가 이 이야기를 갖다가, “전쟁 전에는 행복한 나날을 이어가고 있었다.”라고 적는다면…, 개판이 될 것이다.

 이 영화가 가진 ‘행복’은 영화 후반부로 봤을 때, 꾀죄죄함이다. 밝고, 웃음 가득한 과장된 행복이 아니라 후처리 따윈 하지 않은 것처럼 꾀죄죄하고 흐리멍덩한 느낌이 강한 ‘일상’이다. 전쟁이 부순 건 이들의 일상이다. 무지막지한 행복이 아니라. 그래서 일상적인 장면이 굉장히 많다. “여보! 키!” 같이.     

 배우들은 절대로 “우리 유대인들이 학살당하고 있는 모습, 너무 처참해.” 하지 않는다. 처참한 표정을 짓는다. 처참하다고 표현될 수 있는 삶을 행동한다. 이것은 ‘영화가 이야기를 보여주고, 주제가 녹아있는 모습’이다.     


 그렇다면 소설도 나름대로 이야기를 보여주는 방식이 있지 않겠는가? 눈치 채주길 바란다. 문장이다. 이야기와 그것으로 보여주고 싶은 삶을 어떤 말투로 들려주고 싶은가? 어떤 물건이 강조되어야 하나? 그 물건은 어떤 모습인가. 왜 그 물건이 ‘하고 싶은 말’과 부합하나?

 주인공의 이름은 뭐고 직업은 무엇인가? 그 날 날씨는 어떻고, 그걸 주인공은 어떻게 느끼나?

 그걸 읽은 독자는 어떻게 상상할까.

 이렇게까지 고민해본다면, ‘소설의 주제’를 인식하는 데 성공했다고 보면 좋다. 주제란, 소설 모든 곳에 녹아있는 말투/세계관 쯤 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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