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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소장 Feb 26. 2023

아버지의 작업복

 학교에서 돌아온 우리 형제에게 엄마가 내려준 임무가 있었다. 옥상에 있는 빨래를 걷는 것이다. 새벽 일찍 엄마가 널어놓은 빨래는 하교 시간이면 바삭바삭하게 말라있었다. 빨래를 걷어온 나와 동생은 거실에 앉아 차곡차곡 빨래를 정리했다. 그래야 엄마가 용돈을 줬기 때문이다.

 여느 형제가 그렇듯, 나와 동생도 마찬가지였다. 집안일 보다 노는 게 제일 좋았다. 최대한 빨리 임무를 완수하고 밖으로 나가기로 작당했다. 피존 향이 은은하게 풍겨 나오는 빨래를 대충 접어 거실에 쌓아 뒀다. 엄마가 가장 신경 써서 세탁하는 ‘아버지의 작업복’도 그중 하나였다.


 두툼한 회색 점퍼였다. 왼쪽 팔에는 둥근 회사 마크가 박혀있었다. 가슴팍에는 노란색 글씨로 회사명, 그 아래엔 흰색 글씨로 우리 아버지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손목과 허리는 시보리로 되어 있는데, 아버지의 근속 연수를 증명하듯 시보리는 늘어나 탄력이 떨어졌다. 주머니 부분에는 고농축 딥클린 세제로도 지워지지 않는 잿빛 기름때가 남아있었다. 어머니는 이 옷을 우리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 먹여 살리는 옷이야. 반듯하게 개서 정리해 놔야지.”

 그날 우리 형제는 빨래가 놓인 거실에 앉아 엄마에게 한 소리를 들었다. 틀린 문제를 다시 풀 듯, 둘둘 말아놨던 빨래를 다시 개었다. 엄마는 우리 먹여 살리는 옷, ‘아버지의 작업복’을 펼쳐 곱게 정리했다. 반으로 접어 구김이 가지 않게 손으로 옷을 쓸어내렸다. 팔에 붙어있는 안전제일 마크가 맨 위로 오게 한 뒤 살포시 내려놓았다.


 내가 어렸을 때, 아버지는 항상 회색 작업복 차림이었다. 아침엔 작업복을 입고 식사를 했다. 출근하는 아버지에게 인사를 할 때도 아버지는 작업복을 입고 현관을 나섰다. 저녁엔 작업복 앞섶 지퍼를 내린 채 집으로 들어왔다. 가끔 그 품에서 붕어빵이나 간식거리가 나오기도 했다. 그 모습이 익숙했던 어린 시절의 나는 유치원에서 아버지를 그릴 때, 매번 회색 크레파스를 집어 들었다.

 그 후로 오랜 시간이 지났다. 여전히 나는 옥상에 널린 빨래를 걷고 있다. 동생이 독립한 뒤로 나 홀로 임무를 수행한다. 걷어온 빨래를 거실에서 정리하다가 아버지의 옷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 먹여 살리는 옷’, 아버지의 작업복이었다. 그때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구겨진 작업복을 쓸어내렸다. 손목 부분이 해져있었다. 이 옷을 입고 고생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마음이 찡하게 아려왔다. 한참을 그렇게 아버지의 작업복을 바라봤다.


 그땐 몰랐다. 아버지가 이 옷을 입고 어떻게 살았는지. 어떤 감정이었는지.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작업복을 입고 출근하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서른이 넘은 지금에서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축 쳐져있던 소매, 주머니에 물들어 있던 기름때, 빛바랜 회색 점퍼에는 우릴 향한 아버지의 사랑이 담겨있었다. 엄마는 아버지의 작업복을 갤 때마다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마도 지금 내가 느낀 감정과 같은 마음 아니었을까?


 회색이었던 작업복은 감색으로 바뀌었다. 회색일 때는 기름때가 잘 보였는데, 짙은 색깔이라 흔적이 드러나지 않는다. 구김이 가지 않게 갠 다음 가지런히 내려놓았다. 옷은 달라졌지만 여전히 아버지는 작업복을 입고 현장을 누빈다. 어떤 옷보다 멋지고, 값진 아버지의 작업복이 아버지에게 좋은 에너지를 주길 기도했다. 이제는 빨래를 정리하더라도 용돈을 받지 않지만, 용돈 못지않게 뿌듯하고 행복한 선물을 받았다.

 매일 작업복을 입는 아버지 덕분에 모자람 없이 자랐다. 이제는 아버지가 삶의 무게를 조금 내려놓고 작업복을 입었으면 좋겠다. 곱게 접은 ‘우리 먹여 살리는 옷’을 아버지 옷장에 넣었다. 섬유 유연제 향이 산뜻하게 풍겨 나왔다. 내일 아침 아버지가 기분 좋게 옷을 입는 모습을 떠올리며 안방을 나섰다. 오늘도 아버지에게 감사함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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