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급 누락과 정리해고를 피해 도망치듯 고향을 떠났다. ‘어디든 사람 사는 곳’이란 아버지의 격려를 받으며, 그렇게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타지생활을 시작했다. 내 방이 아닌 기숙사에서 아침을 맞이하니 기분이 남달랐다. 모든 것이 신기했다. 설렘이 바스러지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가족도 친구도 없는 생활은 서러움과 외로움의 나날이었다.
아버지의 고향은 ‘경남 남해’다. 아버지는 남해에서 소년 시절을 보냈다. 성인이 되고 나서는 고향을 떠났다. 아버지가 터를 잡은 곳은 나의 고향인 ‘부산’이다. 아버지 표현을 빌리자면, ‘정말 아무것도 없이 고향을 떠나왔다’고 한다. 부산엔 아는 사람도, 당장 잠 잘 곳도 없었다. 그렇게 아버지는 태어나 처음으로 타지생활을 시작했다.
나는 아버지와 달리 풍요롭게 고향을 떠났다. 부모님의 든든한 뒷바라지 덕분에 모을 수 있었던 은혜로운 통장 잔고를 보유했다. 내 방에 있는 옷가지와 신발, 이불 등 모든 것을 때려 넣어도 자리가 남는 중형 SUV도 몰았다. 타지에는 일하며 알게 된 사람도 조금 있었다. 물론 친구처럼 편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일이 힘든 건 참을 수 있었다. 가장 버거웠던 건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퇴근하고 집에 들어가면 TV를 보고 있던 아버지, 설거지를 하거나 빨래를 하던 엄마의 모습과 집안 가득했던 밥 냄새. 부산에 있을 땐 너무나도 평범했던 일상이었다. 기숙사 문을 열고 들어가면 식탁에 앉아 소맥을 마시며 전자담배를 피우는 상사가 나를 맞이했다. 타지생활이 외롭고 고될수록 가족이 너무 그리웠다.
생각해 보면 나는 서른을 넘긴 나이에 타지생활을 시작했다. 아버지는 20대 중반, 그러니까 나보다 한참 어린 나이에 연고도 없는 부산에 몸을 던졌다. 모아둔 돈도 있고, 차도 있는 30대 초반의 나도 이렇게 힘든데, 그때의 아버지는 어땠을까? 주말에 고향을 찾아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버지, 타지생활을 해보니 보통이 아니네요. 가족의 빈자리가 너무 크게 느껴져요. 아버지는 타지생활하면서 가족이 그립거나 보고 싶을 때, 어떻게 이겨냈어요?”
“글쎄, 내는 그런 거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먹고살기 바빴으니까. 그때는 바쁘면 일요일 출근도 했다. 그리고 너희들 키운다고 정신없었지. 내가 무너지면 우리 가족이 무너지는 거였으니까.”
아버지는 지금 나보다 어린 나이에 타지생활을 했고, 한 여자의 남편이자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됐다. 나 하나 챙기기도 버겁고 힘든데, 아버지는 자신뿐만 아니라 많은 것을 책임져야 했다. 외로움과 서러움을 느낄 겨를도 없이 하루하루를 버티고 이겨냈다. 타지생활이 힘들어 아버지에게 투정 부렸던 내 모습이 창피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런 내 모습도 품어줬다.
“고향 떠나 생활하니까 많이 힘들제? 밥 잘 챙겨 묵고 다니라.”
타지생활하며 많은 것을 느꼈다. ‘집 떠나면 고생’이라는 말, 그땐 몰랐지만 가족과 함께했던 일상이 소중하고 행복했다는 걸 알게 됐다. 그리고 내가 지금 느끼고 있는 힘들고 고된 순간을 아버지는 묵묵히 참아냈다는 것이 가장 크게 와닿았다.
하루가 너무 힘든 날이 있었다. 기숙사 구석에 앉아 눈물을 훔치며 아버지를 떠올렸다. ‘아버지도 이렇게 힘들었겠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글프고 외로운 삶을 포기하지 않고 이겨낸 아버지가 멋지고 존경스러웠다.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나도 잘 이겨내기로 마음을 추슬렀다. 눈물을 닦고 침대에 누웠다. 다음번 고향에 내려가면 아버지에게 가장 먼저 할 말을 천천히 더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