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6시 20분, 휴대폰에서 알림이 울렸다. 내 통장으로 1원이 입금되었다는메시지였다. 입금자는 ‘엄마’였다. 주말 꿀잠을 깨운 알람이었지만 기분 나쁘지 않았다.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엄마가 보낸 입금 내역을 확인하고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드디어 엄마가 폰뱅킹에 성공했다.
엄마는 폰뱅킹을 사용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에게 돈을 보내야 할 때면, 집 주변 ATM기를 찾았다. 엄마는 우리 동네 ‘핵인싸’다. 계모임, 산악회 회비, 경조사 비용 등 계좌이체 할 일이 수없이 많았다. 그때마다 나는 엄마에게 폰뱅킹을 알려주려 했지만 한사코 거절했다.
“엄마, 폰뱅킹 쓰면 10초도 안 걸려. 내가 어플 설치랑 사용방법 알려줄게.”
“아휴 나는 괜찮다. 잘 못 눌러서 돈이 엉뚱하게 가면 어쩌려고... 운동 삼아 갔다 올게.”
“그럼 나한테 입금할 계좌번호랑 금액 알려줘. 지금 시간이 늦었잖아. 내 통장에서 엄마 이름으로 송금하지 뭐.”
그때부터였다. 이체할 일이 생기면 엄마는 나에게 계좌번호와 금액이 적힌 쪽지를 내밀었다. 내 통장에서 빠져나간 돈은 다음날 아침이면 칼같이 들어왔다. 출근길에 ATM기를 찾은 엄마는 전날 내가 보낸 금액을 입금해 줬다. 나름 ‘수고비’도 포함해서 말이다. 4만 2천 원이면 5만 원, 3만 9천 원이면 4만 원 이런 식이었다. 천 원 단위가 9천 원 보다 2천 원이나 3천 원 일 때 송금 대행수수료가 짭짤했다.
커미션은 영원하지 않았다. 막내이모가 엄마에게 폰뱅킹으로 가족 회비를 입금했다. 내역을 확인한 엄마는 충격받았다. 이모보다 더 젊게 산다고 생각했는데, 이모가 발달된 문명의 혜택을 누리자 엄마도 결심이 선 것 같았다. 그날 저녁 엄마는 나를 거실로 불러 냈다.
“휴대폰으로 돈 보내는 거, 그거 좀 알려줘. 막내 이모는 은행 안 가고 휴대폰으로 이체하더라고. 나도 좀 배워야겠어.”
엄마의 휴대폰을 받아 든 나는 지체 없이 은행 어플을 설치했다. 다행히 엄마와 내가 주거래 은행이 같아서 사용법을 알려주기도 쉬웠다. 설치를 마친 후 가장 먼저 로그인 설정을 했다. 엄마가 자주 쓰는 패턴으로 등록했고, 이어서 생체 인증 로그인 방법으로 지문을 등록했다. 지문으로 로그인을 하자 엄마는 놀랐다. 이 휴대폰을 1년 넘게 썼는데 이런 기능이 있는 줄 몰랐다고 했다. 아직 놀라긴 이르다고 말한 나는 폰뱅킹 교육을 이어나갔다.
“엄마, 여기 ‘이체’라고 된 부분을 누르면 되거든. 어려울 게 전혀 없어. ATM기랑 똑같아. 받을 사람 은행, 계좌번호, 금액을 입력하면 끝이야.”
“다시 천천히 해봐. 너무 빨리 지나가서 하나도 모르겠네.”
내가 아주 어릴 때였다. 엄마는 벽걸이 달력을 내 책상에 펼쳤다. 달력에 적힌 숫자를 가리키며 나에게 1부터 20까지 가르쳐줬다. 연필 쥐는 법도 서툴렀던 나는 엄마가 알려주는 숫자를 공책에 적었다. 몇 번의 연습 후 시험을 쳤다. 다른 숫자는 문제없이 써내려 갔다. 이상하게 1과 7을 헷갈려했다. 엄마는 연필을 쥔 내 손을 포개어 잡고 1과 7을 천천히 썼다. 둘 다 밑으로 길쭉해서 그럴 수 있다며, 몇 번이고 다시 알려줬다.
엄마에게 숫자를 배우던 그때가 떠올랐다. 폰뱅킹을 알려주며 사실 아주 조금 짜증이 났다. 엄마가 계좌번호 입력란에 금액을 쓰거나, 방금 알려준 로그인 방법을 버벅거릴 때면 나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졌다. 어린 나에게 1과 7의 차이를 알려주던 엄마의 기분이 이랬을 거 같다. 하지만 엄마는 짜증도 내지 않았고 소리도 지르지 않았다. 죄송한 마음이 불쑥 올라왔다. 그때 엄마의 마음으로 몇 번이고 다시 알려줬다.
로그인도 계좌번호, 금액 입력도 막힘없이 해냈다. 가족들 계좌로 1원씩 보내며 실전 감각을 키우기로 했다. 단돈 1원을 보내는데 실수할까 봐 손을 떠는 엄마의 모습이 귀여웠다. 서투르고 느렸지만 엄마는 한 화면씩 넘어갔다. 마지막 송금 버튼을 눌렀고 동생 통장으로 1원을 입금했다.
“폰뱅킹 안 어렵지? 쉽다고 했잖아. 엄마 잘하네. 이제 혼자 해도 되겠다.”
“그래, 밖에 나갈 필요도 없네. 수수료도 안 들고, 이렇게 편한 걸 왜 이제 배웠을까? 고마워 아들.”
다음날 아침, 엄마는 내 도움 없이 폰뱅킹 계좌이체를 성공했다. 더 이상 계좌이체 때문에 ATM기를 찾지 않고, 나에게 쪽지를 건네지 않는다. 폰뱅킹을 엄마에게 알려주니 행복했다. 항상 배우거나 받기만 했는데, 내가 엄마에게 알려줄 게 있었다. 이거 말고 다른 건 없을까 생각해 봤다. IPTV에서 드라마 다시 보기, 삼성페이, 배달의 민족 주문 등 수없이 많았다. 어린 나에게 숫자를 알려주던 엄마처럼, 나도 엄마에게 따뜻하고 포근하게 알려줘야겠다. 그나저나 한동안 내 통장을 채워준 송금 대행 수수료는 이제 더 이상 받을 수 없게 됐다. 조금 가난해졌지만 마음은 뿌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