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소장 Feb 14. 2020

되고 싶었던 어른이 되지 못한 어른 <태풍이 지나가고>

제목만 보면 재난 영화로 착각할 수 도 있다. 화끈한 제목과는 달리 <태풍이 지나가고>는 잔잔하고 뭉클한 이야기가 담긴 어른을 위한 영화다. 료타(아베 히로시)는 유명 작가를 꿈꾸며 소설의 이야깃거리를 찾는다는 명분으로 흥신소에서 일한다. 본인을 ‘대기만성’ 형 인간이라 하지만 가족들 눈에는 그저 ‘대기’에 불과하다. 교코(마키 요코)와 부부였지만 지금은 전 부인, 전 남편이다. 어느 날, 헤어졌던 가족은 태풍을 피해 할머니 요시코(키키 키린)의 집에서 하룻밤을 지낸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태풍이 지나가고>의 각본 작업 때부터 료타 역에 아베 히로시, 요시코 역에 (키키 키린)을 생각했다고 한다. 배우들이 못 하겠다고 하면 영화를 접으려 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아베 히로시와는 세 편, 키키 키린은 다섯 편을 작업했다. 아마도 자신에게 시나리오가 들어올 것이란 걸 알고 준비하지 않았을까.

 
다채로운 캐릭터
맞춤형 캐릭터와 이전 여러 작품에서 맞춰온 호흡, 거장의 연출력 그리고 명배우들의 연기까지 더해졌다. 그로 인해 <태풍이 지나가고> 속 캐릭터들은 상당히 입체적이다. 료타는 아들 싱고(요시자와 타이요)에게 스파이크를 선물하려 한다. 그러나 그는 철들지 못한 어른이다. 번 돈을 경륜에 쏟아붓는다. 교코의 뒤를 따라다니며 그녀의 남자 친구를 관찰한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교코가 ‘그 남자랑 잤을까’이다.

료타는 영화 전반에 걸쳐 정말 지질하게 나온다. 하지만 아베 히로시의 키가 189cm란 걸 확인하고 놀랐다. 우월한 허우대가 가려질 정도로 캐릭터가 잘 묻어 나왔다.

교코는 현실적인 여성이다. 미래가 보이지 않고 가정에 충실하지 못한. 또한 못난 아버지의 표본인 료타와 이혼했다. 하지만 시월드와의 관계는 매정하게 끊지 않았다. 싱고가 할머니를 만나는 것에 거부감이 없으며, 살짝 짓궂은 요시코에게 크게 내색하지 않는다. 차갑고 매정해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순하고 착한 모습이 있다.

요시코는 손자를 사랑하고 자식 걱정하는 할머니 캐릭터에 머무르지 않는다. 영화 초반부터 귀엽고 앙증맞은 모습으로 관객에게 웃음을 유발한다. 나비를 보며 죽은 남편을 떠올리는 감성도 가지고 있지만, 아무도 안 볼 때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는 억척스러운 면도 찾을 수 있다. 그 외의 흥신소 사장, 남편의 불륜을 의뢰한 부인 등 <태풍이 지나가고> 속 각각의 캐릭터가 다채롭다.


인생이 생각대로 풀리지 않아  
료타는 고등학생을 협박해 돈을 뜯어낸다. 학생은 “당신 같은 어른이 되지 않을 거야”라며 소리친다. 이때 료타가 “원하는 어른이 되기는 쉽지 않다”며 맞받아친다. <태풍이 지나가고>는 ‘되고 싶었던 어른이 되지 못한 어른들의 이야기’다.


료타의 꿈은 공무원이었다. 하지만 유명 작가를 꿈꾸는 무명작가의 삶을 살아간다. 아버지처럼 살기 싫다고 했지만, 아버지처럼 가족들에게 돈을 빌리러 다니며, 복권과 경륜에 돈을 쏟는 DNA를 쏙 물려받았다. 화목한 가정의 가장이 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마저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아들 싱고 또한 자신의 아버지인 료타처럼 살기 싫어한다. 할머니 요시코가 “아버지와 닮았단 말이 싫으니?”라고 묻자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나 자신이 꿈꾸는 어른의 모습이 료타와 점점 닮아간다. 아버지가 되고 싶었던 ‘공무원의 꿈’을 싱고도 똑같이 꾸고 있다. 어쩌면 3대째 집안 내력으로 뻗어갈 복권에 재미를 붙일 것 같다. 되고 싶었던 어른의 모습에서 점점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싱고는 복권에 당첨되면 온 가족이 모여서 살자며 요시코에게 말한다. 싱고를 바라보는 요시코의 눈빛은 손자를 대견하게 보는 눈빛이 아닌 ‘뜻대로 되지 않은 인생’을 살아온 어른으로서 ‘뜻대로 되지 않을 인생’을 살아갈 아이를 안쓰럽게 바라보는 눈빛이다. 복권은 싱고에게 ‘되고 싶은 어른이 될 수 있는 기대감’이 담겨있다. 그러나 복권 당첨 확률이 낮은 것처럼 그 기대감 또한 실현되기 어렵다는 것을, 그리고 어려웠다는 것을 어른이 되어버린 어른이 이야기하고 있다.

작가의 이전글 “그건 가짜였어” 모파상의 <목걸이> 그리고 <기생충>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