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꿈은 ‘배우’였다. 무대와 스크린에서 다른 사람으로 사는 것이 멋있어 보였다. 재벌 2세로 살다가 극악무도한 악당으로도 산다. 한 번 사는 인생인데 배우들은 여러 인물로 지낼 수 있었다. 매력적인 직업이라 생각했다.
극단에서 무대 제작을 하며 남는 시간엔 입시 연기와 대본 분석법을 배웠다. 공연이 끝나면 청소를 했고, 배우들이 퇴근하면 그날 배운 연기 연습을 했다. 비록 텅 빈 객석 앞에서 하고 있지만, 훗날 꽉 찬 객석 앞에서 연기를 하겠다고 독하게 마음먹었다. 덕분에 원하던 연극영화학과에 입학했다.
꿈으로 나아가는 길은 험난했다. 집안 형편이 발목을 잡았다. 안정적인 수입이 있는 직업을 원하셨던 부모님은 학과 생활을 못마땅해했다. 정년을 한참 남기고 퇴직한 아버지와 큰 수술을 두 번이나 한 어머니 모습을 보니 마음이 흔들렸다.
선배의 모습도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군대 휴가 나온 나에게 선배는 술 한잔 사준다고 했다. 술잔을 마주한 지 한 시간쯤 지났을까, 그는 전화를 받는다며 자리를 비웠다. 이윽고 문자가 왔다. “요즘 형편이 어려워 돈이 없다. 오늘 술 네가 사는 걸로 하자”라는 선배의 문자였다.
그는 돈이 없어 후배에게 술을 사주지 못했다. 돈이 없어 후배를 앉혀두고 도망갔다. 존경했던 선배의 모습은 사라졌다. 남은 건 ‘나도 저렇게 될 것 같다’는 걱정이었다. 부대 복귀하며 생각했다. 이 길이 아닌 것 같았다.
소설을 각색한 <침대 밑 악어>라는 짧은 연극으로 처음 무대에 섰다. 작품에서 나는 주인공 ‘JJ’를 연기했다. 지하 극장에서 혼자 연습하며 꿈꾸던 순간이 찾아왔다. 큰 극장은 아니지만 관객이 있는 무대에서 연기를 했다. 막이 내리고 무대 구석에서 펑펑 울었다. 그러나 난 그 길을 더 이상 가지 않았다. 꿈을 포기했다.
작품 속 ‘JJ’는 양복을 입고 일하는 샐러리맨이다. 그때는 양복을 입고 무대 중앙에 섰다. 지금은 양복을 입고 회사 구석에 앉아 있다. ‘JJ’로 살 땐 이렇게 살 줄 몰랐다.
그때 내가 포기하지 않고 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생각해본다. 아카데미 시상식에 갔을까? 예쁜 여배우와 로맨틱 코미디 작품을 했을까? 말도 안 되는 걸 알지만 생각만 해도 재미있다. 꿈을 이루지 못 한 걸 후회하지 않는다. 다만, 꿈을 향해 열심히 나아가던 순간이 가끔 그리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