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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소장 Feb 29. 2020

이직 후 후회하는 순간

지긋지긋한 이곳, 떠나면 생각조차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인간은 후회를 먹고사는 동물’이라던가, 가끔 뒤돌아 볼 때가 생겼다. 사실 많았다. 그때 왜 그랬을까? 이직 후 후회하는 순간이 찾아왔다.



번호를 지워버린 것

문을 나서는 순간 직장상사, 거래처 연락처를 삭제했다. 앞으로 볼 일 없고, 같이 할 일 없다고 생각했다. 근데 이게 무슨 일 인가? 전 직장에서 했던 일을 맡게 되었다. 중소기업 특성상 한 사람이 여러 일을 해야 하는데 그중 하나가 하필 전 직장에서 담당한 업무였다.

번호 삭제! '다신 볼 일 없을 거야'라고 했지만...

업체와 담당자가 떠올라 연락처를 뒤적였다. 있을 리가 없었다. 담당자에게 전화 한 통이면 끝날 일을 대표번호로 전화하여 접수하고, 담당자가 배정될 때까지 기다렸다. 일정을 못 맞추는 담당자였지만 너무 그리웠다.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는데 똥을 찾는 날이 왔다.



친하게 지낼 걸

연말정산 시즌이었다. 10월쯤 이직하는 바람에 전 직장 원천징수 영수증이 필요했다. 하필이면 ‘그 사람’에게 연락해야 했다. 업무를 요청하면 까칠하게 말하고, 말 한마디에 따뜻함이 없는 인사 담당자였다.

한숨을 두어 번 쉬고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그 사람은 “네”라며 짧게 말했다. 나는 평소보다 두 톤 높여 안부를 물었다. 돌아온 대답은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시나요?”였다. 연말정산 문제로 원천징수 영수증을 부탁한다고 했다. 그 사람은 “네”하고 전화를 끊었다.


같이 일할 때 친하게 지냈으면 이렇게 차가운 일은 없었을까? 목적은 달성했지만 왠지 모르게 마음이 아팠다. 일에 치여 살던 그 사람에게, 커피 한 잔 주지 못하고 떠나온 게 미안했다.



친하게 지내지 말 걸

힘든 날이면 같이 한잔 하던 동료들이 있었다. 팀장이 까칠하게 굴면 팀장 언행을 안주 삼아 2차, 3차를 달렸다. 함께 일하고 취했던 그들과 멀어진 계기는 나의 이직 발표였다. 동료들은 이별을 아쉬워하지 않았다. 단지 내가 하던 일을 누가 떠안을지가 화두였다. 서로 떠넘기다가 결국 골고루 나눠 받는 걸로 정리했다.

이직 후 연락이 끊어졌고, 함께 떠들었던 채팅방도 사라졌다. 그들이 나를 일 떠넘기고 도망간 ‘배신자’로 부른다는 소문만 전해졌다. 복잡한 감정이 밀려왔다. 정당한 업무 요청임에도 상대방 기분 나쁠까 봐 내가 손해 보며 넘긴 일이 더러 있었다. 동료들의 기분을 살피고 말 한마디 조심하며 걱정했던 순간이 떠올랐다. 이렇게 얄팍하게 끝날 관계였다면, 마음 졸이며 신경 쓰지 말걸 그랬다. 회사 안에서 관계는 회사 밖으로 나오면 끝난다는 걸 깨닫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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