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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소장 Jun 30. 2020

이직도 수영이랑 똑같아

오늘 회사가 망했다. 아니, 어쩌면 어제. 확실하지 않다. 이전 회사의 폐업 소식을 전해준 사람은 그 회사에서 같이 일했던 타 부서 과장이었다. 그도 나처럼 수영을 좋아했다. 덕분에 더욱 빨리 친해졌다. 회사 창립멤버였고, 누구보다 회사를 사랑했던 과장은 휘청이는 회사 모습을 누구보다 빨리 캐치했다.


“이직도 수영이랑 똑같아, 물 잡는 타이밍 놓치면 앞으로 못 나가”


과장은 ‘물쟁이’ 다운 조언을 해주고는 갑작스러운 이직을 선택했다. 그가 간 회사는 ‘수영’ 용품 판매 전문 회사였다. ‘덕업 일치’를 달성한 과장이 부러웠다. 그리곤 나도 ‘물 잡는 타이밍’을 기다렸다.

대표가 출근하지 않았다. 한 달이 넘어가자 사내에 뒤숭숭한 소문이 돌았다. 회사는 4년 연속 적자를 기록했고, 올해도 적자를 앞두고 있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경비를 줄였고, 광고비를 대폭 축소했다. 팀장들에게 매달 주어지던 부서 관리비 또한 사라졌다. 당연히 회식도 없어졌다. 직원들은 허리띠를 졸라 메고 버텼다. 하지만 위기상황에서 대표의 빈자리는 너무나도 컸다. 결국 회사는 ‘5년 연속 적자’라는 대기록을 달성했다. 5년 연속 적자가 현실화되자 대표의 능력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졌다. 한 달에 소형차 한 대 값을 받아가는 대표의 부재는 직원들의 불만을 사기에 충분했다. 밤새워가며 일했던 직원 월급은 동결이었다. 출근하지 않았지만 대표는 꼬박꼬박 월급을 받아갔다. 훗날 대표는 ‘재택근무하며 회사 위기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모색했다’며 말 같지도 않은 변명을 늘어놓았다고 한다.


과장의 조언을 떠올렸다. 물 잡는 타이밍은 지금이었다. 지금 아니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그대로 가라앉을 것 같았다. 퇴근 후 채용 사이트를 헤엄쳐 다니며, 채용공고를 확인했다. 몇몇 마음에 드는 회사는 ‘잡플래닛’과 기타 채용 후기 카페를 참고했다. 탈출을 위한 발버둥은 발차기가 됐다. 나는 물 잡는 타이밍을 놓치지 않았다. 구멍 뚫린 난파선에서 바다로 뛰어내렸고 안전한 배로 옮겨가는 데 성공했다. 


“큰 파도를 가로지르면 배는 휘청입니다. 회사는 지금 큰 파도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흔들립니다. 이 과정에서 바다로 뛰어내린 겁쟁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파도가 집어삼킬 것입니다. 동요치 마시고 각자의 자리를 지켜주시기 바랍니다.”

출근하지 않는 대표가 사내 메신저에 공지한 내용이다. 파도에 휘청이는 건 당연하다. 그러나 선장은 휘청이는 배에 없었다. 위기를 타개할 방법과 비전을 제시하지 못했다. 선원에겐 자리를 지키라고 했지만 그는 자기 자리를 비웠다. 배가 휘청이는 것이라 했지만, 큰 구멍이 뚫려 가라앉고 있었다. 물 잡는 타이밍을 놓친 직원들은 난파선에서 온갖 수모를 겪었다. 월급이 절반만 들어왔다. 어떠한 공지도 없었다. 몇 달 뒤, 50%는 고사하고 아예 월급이 들어오지 않았다. 월급이 밀리기 시작하자, 그제야 대표는 회사에 모습을 드러냈다. 수염이 덥수룩하고 이전보다 살이 찐 상태였다. 전 직원 앞에 선 대표는 고개를 숙이며 죄송함을 표했다. 선원이 절반 이상 줄어든 모습을 본 ‘선장’은 어떤 기분이었을까? 그날 이후 대표의 별명은 '타노스'가 됐다. 월급도 절반으로, 직원도 절반으로 날려버렸기 때문이다. 


직원에게 줄 돈도 없는데 거래처에 줄 돈이 있을 리 만무하다. 직원 월급과 마찬가지였다. 처음엔 50%를 지급했고, 나중엔 지급기한을 어겼다. 업체에서 독촉을 시작하자, 회사는 오히려 ‘갑질’로 받아쳤다. 잔금을 치를 테니 이후 거래는 타 업체와 진행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영세업체와 주로 거래했던 회사는 거래처의 약점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고, 이를 치졸하게 이용했다. 우습게도 이 모든 지시는 위기상황 동안 재택근무를 한 대표에게서 나왔다.


지금은 수영 용품 전문점에서 차장으로 근무 중인 ‘과장’을 만났다. 오랜만에 수영장에서 조우한 우리는 간단하게 안부를 물었다. 과장은 이직 후 오른 연봉만큼이나 몸무게도 많이 오른 것 같았다. 그는 나의 이직을 축하하며 ‘물 잡은 타이밍’을 칭찬했다. 운동 후 그와 마주 앉아 커피를 마셨다. 그 자리에서 주요 대화는 전 직장에 관한 내용이었다. 

과장은 다른 회사에서 일하고 있지만, 전 직장 내부 소식을 자세히 알고 있었다. 흡사 ‘산업스파이’ 같았다. 그에게 전 직장의 임금체불, 갑질 사건 등을 들었다. 한때는 그 회사에 들어가고 싶었고, 다니는 동안 자부심을 느꼈다. 곧 폐업을 앞둔 전 직장 모습을 보니 마음이 불편했다. 이름 대면 모두들 알아줬는데, 이제 나의 출신을 숨기기로 다짐했다. 


커피를 비우고 과장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눈높이에 딱 맞춘 조언 덕분에 난파선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고 했다. 쑥스러워하는 과장은 조용히 입을 뗐다.


“다른 일도 마찬가지 아닐까? 물 못 잡으면 그대로 가라앉는 거 말이야, 우린 수영 잘해서 물 잡는 타이밍은 기가 막히잖아”

나에겐 수영은 스트레스 해소와 다이어트를 위한 운동이었다. 과장의 말을 들은 뒤 수영을 생각하는 관점이 바뀌었다. 수영은 내 삶의 모든 부분에 적용할 수 있는 '철학적인 운동'이 됐다. 큰 변화에 떠밀려 가지 않고 힘차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오늘도 열심히 물을 잡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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