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 회식 중 일어난 일이다. 물은 사람과 답한 사람 모두 뻘쭘했다. 나는 서른을 조금 넘긴 ‘중고 신입’이다. 어쩌다 보니 회사가 망했고, 부랴부랴 취업 준비를 다시 했다. 신입으로 적지 않은 나이지만 운 좋게도 새로운 직장을 가질 수 있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라는 광고 카피처럼 나이는 나에게 중요치 않았다. 일 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했고, 나보다 어린 선배들을 대할 때는 더욱 깍듯하게 했다.
담대한 포부와 달리 ‘늙다리 신입’을 대하는 사람들은 불편해했다. 나를 ‘~씨’라고 부르지 못했다. “저기…” 아니면 “그…”라고 말을 꺼냈고 내가 쳐다보면 그제야 용건을 말했다. 때론 이름을 부르지 않고 본론부터 말할 때도 있었다. 어린 선배들이 불편해할수록 미안함이 커졌다. 일을 못하면 배우면 되고, 행동이 문제면 고치면 된다. ‘나이’는 어쩌지 못했다. 출생신고를 다시 할 수도 없고, 학번을 바꿀 수도 없는 노릇이다. 나도 제발 이십대로 돌아가고 싶다.
오랜만에 만난 후배와 술자리를 가졌다. 나의 이직 소식에 누구보다 기뻐해 줬다. 나는 성격이 좋아서 새로운 곳에 금방 적응할 거라며 응원도 덧붙였다. 그날 내가 밥을 사줘서 그런 게 아닐까 생각했다. 회사명을 말하자 자기가 ‘아는 동생’도 그 회사에서 일한다고 했다. 후배의 아는 동생 이름을 들어보니 타 부서 선배였다.
“아, 그분 다른 팀 선배야…”
“형님보다 한참이나 어린데 선배인가요?”
“응.. 그 선배 무서워”
아는 동생, 아니 다른 팀 ‘선배’는 업무 요청하러 가면 쳐다보지도 않고 모니터만 보며 대답한다. 설명을 하고 관련 문서를 내밀면 “그냥 거기 올려두고 가세요”라고 시니컬하게 말하는 까칠 만렙이다. 그런 선배가 후배의 아는 동생이었다. 왠지 모를 자괴감이 몰려왔다. 군 복무 시절 가장 듣기 싫었던 말이 ‘억울하면 빨리 오던가’였다. 그렇다. 억울하면 빨리 들어왔어야 했다.
일찍 입사한 선배들은 벌써 이름 앞에 ‘직급’이 생겼다. 그뿐인가? 나와 나이 때가 비슷한 상사들은 내가 쳐다보지도 못할 직급을 달고 있었다. 그분들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와 포스를 뿜어냈다. 시크하게 말하던 선배들은 나와 동갑인 그분들 앞에서는 귀여운 강아지 모습이었다. 동갑내기 상사들은 팀장들이 어떤 질문을 하던 막힘 없이 받아쳤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난 이 나이 먹을 동안 뭘 했나’라는 생각이 밀려왔다.
튼튼한 ‘직급’을 가진 친구들 아니, ‘상사’들은 내가 상상하지 못할 일들을 이뤄갔다. 사랑하는 반려자를 만나 결혼을 했거나 할 예정이고, 아이를 낳았거나 낳을 예정이었다. 나이는 비슷했지만 인생 격차는 컸다. 슬프게도 월급 차이가 가장 컸다. 자괴감을 많이 느끼면서 조바심도 생겼다. 너무 늦은 것 같아 불안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라는 초심도 잃어갔다. 일을 빨리 배우고 싶다거나 나만의 전문 분야를 만들고 싶었던 목표는 사라진 채 불평만 남았다. 어린 선배들한테 치일 때면, ‘어린것들 밑에서 못하겠다’라는 불만도 쏟아졌다.
내 인생은 남들에 비해 지각 인생이었다. 취업도 늦고, 승진도 늦다. 결혼은 한참 뒤 이야기다. ‘나이 많은 신입’이 겪는 암울한 상황은 더 나아질 것 같지 않았다. 나는 남들보다 뒤처져 있었다. 그러다 문득 내 모습을 가만히 생각해봤다. 잔인한 결론이지만, 고민한다고 해결할 수 없었다. 출생신고를 다시 할 수 없고, 학번을 바꿀 수도 없다. 직급을 확 올릴 수는 더더욱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 상황을 받아들이고, 남들과 비교하지 않고 묵묵히 내 길을 가는 것뿐이었다.
연차를 내고 며칠 여행을 다녀왔다. 마음을 고쳐먹고 회사에 돌아가니 한결 편했다. ‘이 나이 먹고 뭐했나’라는 자괴감은 씻겨나갔다. 그 자리에 ‘이 나이 먹고도 뭘 해냈다’라는 자신감이 솟아났다. 늦은 나이라고 했지만 취업에 성공했다. 내가 얼마나 뛰어났으면 서른이 넘어도 신입으로 받아줬을까? 당당함과 패기가 넘쳤다. 남들은 ‘나이’에 짓눌려 주저하고 주눅 들었는데, 나는 무엇이든 해냈다. 나 자신이 기특하고 자랑스러웠다. 업무를 하는 데 있어서도 재미가 생겼고 아주 조금은 일을 즐기게 됐다.
“인생 다 각자 걷는 거지요”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에 나온 대사다. 이 작품을 보면서 가장에 기억에 남는 한 마디였다. 그렇다. 인생 다 각자의 길이 있다. 같이 걷는 것 같지만 결국엔 서로 다른 길을 간다. 다른 길을 가니까 경쟁할 필요가 없다. 당연히 비교할 것도 없다. 늦었다고 뒤쳐졌다고 주눅 들지 말자. 지금 이 길은 하나의 결승점을 향해 모두가 달려가는 경주가 아니다. 각자만의 목적지로 나아가는 즐거운 여행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