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시가 되면 컴퓨터가 꺼진다. 엑셀이 켜져 있던, 워드가 켜져 있던 상관없다. 대표건 부장이건 차장이건 모두가 마찬가지다. 회사에서 워라밸을 위해 ‘PC-OFF 제도’를 도입했다. 눈치 보느라 6시 20분, 6시 30분 퇴근하는 날이 다반사였다. 이젠 당당하다. 컴퓨터가 꺼져서 일을 할 수가 없으니 말이다. 주변 사람들은 나를 ‘연금 없는 공무원’이라 부른다. 공무원이 연금 없으면 안 좋은 거 아닌가? 아무튼 9시 출근, 6시 퇴근으로 확실한 워라밸을 누리고 있다.
동종업계 타회사는 살벌하다. 계약서 상 근무시간은 그저 글씨 일 뿐, 조기 출근은 기본이고 야근은 필수다. 실적 압박도 무시무시하다. 달성하지 못하면 주말출근도 불사한다. 퇴근 후 삶은 내 것이 아닌 회사의 것이다. 평일 약속은 주말로 미뤄야 하고, 그 약속도 지켜내기엔 버겁기만 하다.
여기까지만 보면 난 ‘꿈의 직장’을 다닌다. 타 회사 사람들은 하던 일을 때려치우고 ‘이 곳’으로 달려와야 한다. 하지만 그들은 오지 않는다. 야근하는 만큼, 실적을 달성하는 만큼 두둑한 보상이 있기 때문이다. 기본급은 나와 비슷하거나 조금 많다. 야근 수당과 특근 수당 등 초과 수당을 받는다. 실적 압박을 이겨낸 자에게 인센티브와 연말 상여금이 지급된다. 나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돈이 통장에 꽂힌다. 거기다 퇴근 후 삶이 없으니 돈 쓸 시간이 없다. 통장이 ‘텅 장’이 되는 나와 달리 타 회사 사람들은 늘 충만한 통장 잔고를 보유하고 있다.
타 회사 대리 연봉은 내가 있는 곳과장, 차장 연봉과 맞먹는다. 젊었을 때 많이 벌어야 한다는 목표를 가진 사람들은 더 나은 미래, 풍족한 지갑을 위해 그곳으로 달려갔다. 이직은 지능 순이라고 하는데, 나는 지능이 낮다. 이 곳에서 ‘연금 없는 공무원’으로 살아야 될 팔자인가 보다.
돈 많이 주는 곳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 있다. 행복은 돈으로 살 순 없지만, 최소 불행은 막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세상은 쉽지 않다. 많이 받으면 그만큼 많은 걸 내놓아야 한다. 그 과정에서 내 삶을 담보해야만 했다. 그럴 바에 적게 받고 짧게 일하는 것이 훨씬 이득이었다. 퇴근 후 영화를 보거나 운동을 하며 나만의 라이프 스타일을 개척했다. 좋은 사람들과 맛있는 저녁 식사를 했고, 마음이 맞는 사람들을 많이 사귈 수 있었다. 장 자크 루소는 <사회계약론>에서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음에도 사슬에 묶여있다’고 했다. 9시부터 6시까지 얽매여있지만 그 이후엔 자유롭다. 주말에 출근도 야근하는 일도 없다. 실적 못 채웠다고 무시받거나 자책하지 않는다. 돈보다 나의 시간, 내 삶을 찾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연봉이냐 워라밸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직장인의 최대 고민일 것이다. 그 질문에 난 ‘워라밸’이라 답하겠다. 일은 퇴근 후 삶을 위함이다. 삶이 없다면 일할 이유가 없다. 일에 쫓겨 산다면 돈이 있더라도 불행할 것 같다. 오늘도 PC-OFF 프로그램이 정상 작동한다. 어떤 작업도 종료를 막을 순 없다. 개발에 힘쓴 IT부서에 항상 감사한 마음을 가진다. 윈도우가 종료된다는 화면이 떴다. 그와 동시에 회사 생각도 OFF 해버렸다. 지금 이 순간부터 퇴근 후 하게 될 일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