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아이가 보름달을 가리키며 말했다. “달이 바나나 같이 생겼어” 아이의 손을 잡고 있던 어머니는 “달이 어떻게 바나나 같이 생겼니? 동그랗게 생겼잖아”라며 아이의 표현을 바로 잡았다. 그 말을 듣고 나도 보름달을 바라봤다. 그리고 생각했다. 아이는 왜 ‘바나나’라고 했을까? 초승달이면 아이의 말이 맞는데 하늘에 떠있는 건 둥근 ‘보름달’이다. 아이에게 질문하고 싶었지만, 엄마 손에 이끌려 멀리 사라지고 있었다.
보름달과 바나나 무슨 관계가 있을까?
보름달을 오랫동안 쳐다봤다. 쟁반같이 둥근달, 달덩이 같은 얼굴 등 바나나와 전혀 맞지 않는 이미지만 떠올랐다. 아이가 틀렸고 어머니가 제대로 가르친 것 같았다. 밝은 달빛 아래서 운동화 끈을 고쳐 맸다. 둥근 보름달 덕분에 운동하기 딱 좋은 날이었다. 노래를 들으며 한참을 달렸다. 순간 머리를 스쳐가는 생각을 붙잡았다. 아이의 말이 틀린 게 아니었다. 바나나가 보름달처럼 둥근 모양일 때가 생각났다. 바나나를 한 입 베어 물면 절단면이 둥근 모양이다. 달 표면을 보면 오돌토돌한데 바나나도 똑같았다. 나와 아이 어머니같이 어른의 시선으로 구현할 수 없는 뛰어난 상상력을 아이는 발휘했다. 달밤의 체조 중 무릎을 탁 치는 깨달음을 얻었다.
대학에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창의력’이었다. ‘남들과 다른 시선으로 관찰해야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는 교시 아래 발상 수업, 아이디어 수업으로 창의력을 연마했다. 결과는 좋지 않았다. 항상 남들과 비슷하거나 똑같은 아이디어만 즐비했다. 밤새 머리를 맞대고 공모전 기획서를 써도 어디서 본듯한 뻔한 내용만 나왔다. 안타까운 건 회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며칠을 야근하며 광고 기획 프로젝트에 몰두했다(야근수당도 없었다). 결국 제출한 건 작년 PT 했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내용이었다. 사실 당연한 결과다. 우리는 ‘바나나는 둥글지 않다’, ‘쟁반같이 둥근달’ 같은 가르침을 받는다. ‘바나나가 둥글다’처럼 남다른 대답은 할 수 없다. 틀에 박힌 정답만 강요하는 교육을 수년간 받고 성인이 된 우리는 창의력이 굳은 사람이 된다. 우습게도 우리를 그렇게 교육한 어른들은 ‘너흰 창의적이지 못하다’고 나무란다.
보름달을 보며 바나나를 떠올린 아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엄마 손에 끌려 남들처럼 학원을 맴돌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밀려왔다. 어른들은 아이를 가르친다고 생각하지만 어쩌면 아이를 그르치는 것 같기도 하다. 틀에 박힌 정답만 주입하고 강요하는 그르침이 아닌, 다양한 시선과 풍부한 상상력을 발휘하는 가르침을 받았으면 좋겠다. 부디 우리 다음 세대는 아이가 보름달을 보며 바나나를 떠올려도 혼나지 않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