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는 두 번 유산을 했다. 나는 어머니의 두 번째 아픔이 끝나고 반년 뒤 생겼다. 몸이 약했던 어머니는 이번엔 울지 않겠다며 몸에 좋은 음식과 가벼운 운동으로 나를 지키려 했다. 불안한 마음은 종교의 힘으로 이겨냈다. 운동과 기도를 위해 기운 좋다는 절을 찾아다녔다. 먼 곳은 가지 못하고 당시 경남권에서 가장 이름 있는 ‘남해 금산 보리암’으로 향했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기 전 백일기도를 올렸다는 일화가 있는 곳이다. 이성계의 소원도 들어준 용한 곳이니 어머니도 뱃속 아기의 건강을 바라는 마음을 안고 보리암을 찾았다.
어머니는 합장하고 한 발 한 발 내딛을 때마다 ‘건강하게만 태어나게 해 주세요’라고 빌었다. 한참을 걷다가 바위에 앉아 쉬고 있었다. 그때 스님 한 분이 내려오셨다. “보살님, 혼자 걷는 것도 아닌데 천천히 올라가세요”라며 스님은 웃으며 어머니를 응원했다. 챙겨 온 생강차로 목을 축이던 어머니는 스님께 감사하다고 말하곤 다시 걸을 채비를 했다. 일어나 걸음을 옮기려던 어머니는 깜짝 놀라 내려가던 스님을 뒤쫓아 갔다.
임신 초기라 배도 나오지 않았다. 처음 본 스님이 어떻게 임신한 걸 알고 “혼자 걷는 것도 아닌데”라고 말했을까. 어머니는 스님을 붙잡았다. 두 번의 유산과 뱃속의 아기 그리고 이번엔 잃고 싶지 않다는 말을 스님께 전했다. 주머니에 있던 꼬깃한 지폐를 스님께 내밀었다. “뱃속에 아기 이름 좀 지어주세요. 건강하기만 하면 됩니다”라며 아기 이름을 부탁했다. 주머니에 있던 돈은 집으로 돌아갈 차비였는데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나 보다. 스님은 지폐를 사양했다. 어머니는 가방에서 종이를 찾았지만 없었다. 아쉬운 대로 의료보험 카드를 꺼냈고, 스님은 겉면에 뱃속 아기의 이름을 손톱으로 눌러 새겨주었다. 스님의 작명 덕분인지 아기는 건강하게 태어났다.
어머니께 들은 내 이름에 담긴 이야기다. 흡사 성인(聖人) 탄생설화 같다. 웅장한 스토리와는 달리 나는 내 이름이 너무 싫었다. 모든 아기가 그렇듯 자신이 쓸 이름에 선택권이 없다. 만약 “너의 이름을 무엇으로 할래”라는 질문을 받았다면 스님이 적어준 이름을 제일 먼저 제외했을 것이다. 의료보험 카드에 적어준 뱃속 아기 이름은 ‘혜진 惠眞’이다.
예쁜 이름이다. 참하고 좋은 이름이다. 흠잡을 데 없다. 그런데 난 남자다. ‘혜진’이라는 이름 쓰며 많은 오해와 편견에 시달렸다. 초등학교 때 같은 반에 ‘혜진’이가 두 명이 더 있었다. 다 여자였다. 나 혼자 남자였는데 내 이름은 놀림과 시비 대상이었다. “넌 왜 남자가 여자 이름이야? 혹시 여자인데 남자인 척하는 거 아니야?”라며 놀림을 받았다. 지금 생각하면 별 거 아니다. 그땐 뭐가 그리 화가 났는지 모르겠다. 그런 날엔 집에 가서 어머니께 이름 바꿔달라며 울고 불고 난리가 났다.
대학교 때는 첫 학기, 첫 수업 출석 부르는 시간이 가장 싫었다. 교수님은 내 이름을 부르곤 꼭 한 마디 덧붙였다. “여자 이름이네?”, “여자인 줄 알았는데 남자였구나”라고 말했다. 수강생들도 출석에 대답한 나를 한 번씩 쳐다봤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 했지만, 붉어지는 얼굴은 어쩔 수 없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 교수님이 내 이름을 부르길래 대답했더니 “너 말고 혜진이 말이야”라며 화를 냈다. 나는 몇 초간 멍하게 있다가 “제가 혜진인데요”라고 말했다. “혜진이가 너구나, 난 여자인 줄 알았어”라며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나 빼고 모든 사람이 박장대소했다. 많이 겪어서 무뎌질 때도 됐는데, 이름 때문에 주목받거나 놀림받을 때면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보리암 스님 생각이 났다. 어머니가 임신한 건 맞췄지만 이름은 '여자 이름'으로 지었다. 뱃속 아기 성별을 틀린 스님의 신통력을 의심했다.
불교에선 '번뇌를 끊어야 해탈에 이른다'라고 한다. 스트레스를 넘어 콤플렉스가 된 '나의 이름'이 해탈하는 순간이 찾아왔다. 사람들은 '여자 이름' 이란 특징 때문에 나를 더 빨리 외우고 더 오래 기억했다. 입사 동기들이 가장 먼저 외운 사람은 나였다. 모임을 나가거나 협력 업체 관계자를 만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내 이름을 쉽게 외웠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은 내 이름을 잊지 않고 있었다. 얼마 전 동창회에 참석했다. 시간이 많이 지나서 서로를 못 알아보기도 했지만, 내 이름만큼은 다들 기억하고 있었다. 나와 인사를 나눈 친구들은 "아~ 그 여자 이름 쓰던 남자"라며 웃었다. 어릴 땐 기분 나쁜 수식어였다. 그날은 다른 친구들과 차별화된 내 이름이 좋았다.
아역 시절 배역 하나를 따기가 힘들었던 여배우가 있다. 그녀는 번번이 오디션에 낙방했다. 진로를 바꿔 광고 분야에 진출했지만 결과는 똑같았다. 떨어진 이유는 ‘허스키한 목소리’였다. 예쁜 외모와 달리 탁한 목소리는 배우 커리어에 결점으로 보였다. 오디션을 마친 그녀에게 “담배 피우고 왔냐”, “술 마시고 왔냐”, “감기 걸린 것 같다”라는 혹평이 쏟아졌다. 하지만 그녀를 주저앉게 만들었던 ‘허스키한 목소리’는 그녀만의 매력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한 때 걸걸하다고 손가락질받았던 단점이 지금은 전 세계에서 가장 섹시한 목소리로 손꼽힌다. 그 여배우는 영화 <그녀(her)>에서 목소리만 출연하고도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는 기적을 이루어 낸다. 그녀는 바로 ‘스칼렛 요한슨’이다.
단점이라 생각했던 것들이 시간이 지나서 장점으로 바뀔 때가 있다. 나에겐 ‘나의 이름’이 그랬고, 스칼렛 요한슨에겐 ‘목소리’가 그랬을 것이다. 특이해서 차별받았던 나의 단점은 이젠 나의 특장점이 되었다. 사무실에 앉아 명함에 적힌 내 이름을 바라봤다. 좋은 이름을 얻어 준 어머니와 좋은 이름을 지어 준 스님께 감사함을 느꼈다. 어머니는 스님께 아기가 건강하게 자랄 수 있게 이름을 지어달라고 했다. 덕분에 지금껏 살면서 큰 병에 걸리거나 큰 사고 없이 지냈다. 스님은 참 신통한 분이셨다.
어머니와 보리암을 다시 찾았다. 첫 번째는 내가 뱃속에 있을 때였으니 이번이 두 번째다. 간절한 마음으로 절을 향했던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생각해보니 그때 어머니는 지금 내 나이보다 한참 어렸다. 자신의 안녕보다 자식의 건강을 기도했다. 난 어머니 나이 때 놀기만 했는데, 역시 엄마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닌 것 같다. 나의 장점이 만들어진 곳을 찾으니 기분이 맑아졌다. 내 이름을 미워했던 순간이 떠올랐다. 반성하는 마음과 부모님의 건강을 기원하며 절을 했다.
부처가 되는 것은 자신의 마음가짐이 변하는 것이다. 대단히 심오하거나 현묘한 일이 아니다. 외부의 것은 아무것도 바꿀 필요가 없다. 자기 마음이 깨끗해지기만 하면 완전히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우연히 읽은 <법화경> 한 구절이 생각났다. 앞으론 단점을 불평하지 않고, 단점에서 장점을 뽑아내는 혜안을 가져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