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이 슬고, 모래 속 깊은 곳에 묻혀 잊혀져가도..
“적당히 마셔, 적당히..”
나는 불이 꺼진 방에서 침대에 누워있는 채 그에게 문자를 보냈다. 그는 어제도 친구들과 술자리를 가졌다. 새벽 5시에 들어갔다고 오늘 아침에 내게 얘기했다. 술자리가 잦은 그는 자주 피곤해보인다. 그가 읽기전에 나는 적당히 마시라는 말이 담긴 말풍선을 길게 눌러 “삭제” 버튼을 눌렀다.
그 같은 순간, 말풍선 옆 그가 문자를 읽었다는 신호가 화면에 보이고 답장이 온다.
“너가 나 신경써주니까 해주는 말인 것 알아. 잔소리라고 생각안해.”
다행이다. 잔소리라고 생각 하지 않으니 고맙다. 하지만 내가 그 문자를 지운 이유는 잔소리처럼 들릴까 걱정되서 지운 것이 아니다.
나는 2년전, 우리가 처음 만나 친해졌던 날들을 기억한다. 소주 한병을 나누며 우리는 웃고 떠들었다. 마음 속 부끄러움 한 가득이었지만, 술이 들어가 숨기고 있던 비밀도 서슴없이 새어나왔다. 함께 뮤직페스티벌을 가서 핑크색 알약을 나눠먹었다. 단 한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희열을 느끼며 우리는 서로에 기대고 음악에 정신을 놓은채 짙은 밤 하늘을 뚫는 레이저빔을 쳐다봤다. 그때 나는 그에게 일상에서의 일탈을 제공하는 자유로운 소녀였다.
나는 그에게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고 신비로운 여자였다.
하지만, 이제 나는 흥미의 존재보다 그의 일상, 또 그의 일상 속 굳건히 박혀있는 닻이 되어있다. 그가 술을 너무 많이 마셔 몸이 상하지 않도록 지탱해주어야하며, 그가 편히 잠들 수 있도록 등을 쓰다듬어주며 위로를 해주어야한다. 그가 부족한 것이 있을까 모든 것을 내어주고, 그가 나와 함께 하는 시간이 심심할까 모든 것을 공유한다.
신비롭고 반짝거리던 팅커벨 같은 내 모습이 그리워, 내가 술에 대한 지적을 하지 않으면 혹여 팅커벨로 돌아갈 수 있을까 순간의 희망에 문자를 지운것이다. 나는 다시 그 재미있고 자유로웠던 소녀로 돌아갈 수 있다. 나를 처음 만나는 남자들은 나를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하지만, 나는 그 눈빛을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
그는 나와같은 닻을 필요로한다. 내게 고맙다는 표시로 외로운 나에게 항상 말을 걸어주고, 틈날 때 먹을 것을 챙겨준다. 하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서 그는 간절히 온 정신을 놓을 수 있는 또 다른 경이로운 순간이 찾아오길 바라고 있다. 과거의 나와 같이 아름답고 신비로운 여자를 만나 몇시간이라도 심취해 일상을 벗어나는 꿈을 꾸고있다. 삶이 고단한 것이니, 그를 이해한다.
나는 그의 일상이 아닌, 그의 꿈속의 여자가 되고 싶다. 그렇지만, 나는 그의 일상속 닻이 되어주어야한다. 그것이 나의 역할과 책임이 되어있다.
나도 깊은 마음 속 한 구석에서는 나의 역할과 책임에서 벗어나 새로운 남자를 만나 나에 대해 아무것도 얘기해주지 않고, 정신을 놓은 채 사랑을 나누고 싶다. 사랑에 빠지기 제일 쉬운 상태는, 서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를 때이다. 서로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을 때는, 서로가 어떤 사람일지 상상에 맡길 수 있기 때문이다.
시간을 되돌릴 수 없는 세상의 규칙이 밉다.
우리 둘 중 한 명이 마음속의 어두운 꿈을 이루게 된다면, 남은 사람은 평생 매어지지 않을 상처를 받게 될 것이다. 이것이 사랑의 안타까운 전제이다. 서로를 지켜주기 위해 각자의 꿈을 포기해야한다.
나는 녹이 슬고, 모래 속 깊은 곳에 묻혀 잊혀져가도 그의 닻이 되주어야하며, 그는 삶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다른 대륙으로 항해하고 싶을대, 스스로 그의돛을 찢어버려야 한다.
이런 사랑 끝에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하지 못할 황홀과 해방감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우리는 굳게 믿기만 하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