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 전 유럽에서 날아온 한 통의 소식이 내 마음을 무겁게 했다. 유럽연합이 기업 지속가능성 실사 지침, 일명 CSDDD를 통과시켰다는 뉴스였다. 물류업계에서 일하는 사람으로서, 이 법안이 단순한 규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삶을 바꿀 거대한 변화의 신호탄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어릴 적 할아버지와 함께 걸었던 시골길을 떠올린다. 그때 그 길은 흙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고, 새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지금 그 길은 화물차들이 쉴 새 없이 달리며 매연을 뿜어내는 도로가 되어버렸다.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이 너무나 많다.
CSDDD라는 복잡해 보이는 이름 뒤에 숨겨진 본질은 사실 간단하다. 기업들이 자신의 사업과 공급망에서 발생하는 인권과 환경 문제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권고가 아닌 의무이며, 위반 시에는 상당한 제재가 따른다. 특히 글로벌 공급망의 핵심 역할을 하는 물류업계에는 더욱 엄격한 기준이 적용될 예정이다.
사실 이런 변화를 예감하고 있었다. 최근 몇 년간 고객들과 만나면서 느꼈던 미묘한 변화들이 있었다. 단순히 빠르고 저렴한 배송을 원하던 고객들이 점차 환경을 생각하는 배송, 윤리적인 물류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젊은 세대일수록 더욱 그랬다. 그들은 자신이 주문한 상품이 어떤 과정을 거쳐 집까지 오는지, 그 과정에서 지구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물류기업들은 이제 세 가지 주요 변화에 직면해야 한다. 첫 번째는 탄소배출량 관리 의무화다. 이는 단순히 자사 차량의 배출량만 관리하는 것이 아니다. 직접 운영하는 차량의 배출량, 전력 사용으로 인한 간접 배출량, 그리고 협력업체를 통한 배출량까지 모든 것을 체계적으로 측정하고 관리해야 한다.
두 번째는 공급망 투명성 강화다. 과거에는 가격과 서비스 품질만 보고 협력업체를 선정했다면, 이제는 그 업체의 ESG 수준까지 평가해야 한다. 기준에 미달하는 업체와는 거래를 중단하거나 개선을 요구해야 한다. 이는 기존의 비즈니스 관계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세 번째는 정기적인 보고 의무다. 연간 ESG 성과 보고서를 통해 모든 노력과 성과를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정확한 데이터 수집과 분석이 매우 중요해진다.
지난주 한 중소 물류기업 대표와 만났을 때의 일이다. 그는 이런 변화들이 부담스럽다고 솔직히 털어놓았다. "큰 회사들은 그럴 수 있을지 몰라도, 우리 같은 작은 회사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그의 말에서 깊은 고민이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그에게 말했다. 이런 변화는 위기이면서 동시에 기회라고. 규모가 작다고 해서 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유사한 규모의 기업들이 협력하여 ESG 관리 시스템을 공동으로 구축하고, 탄소배출량 측정 도구를 공유하는 방식으로 비용 부담을 줄일 수 있다. 디지털 전환을 통해 효율성을 높이면서 동시에 ESG 관리 역량을 강화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정확한 탄소배출량 측정이다. 물류기업의 특성상 다양한 운송 수단과 경로를 통해 발생하는 배출량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이를 체계적으로 관리하지 않으면 효과적인 저감 전략을 수립하기 어렵다.
차량별 연료 사용량, 운행 거리, 적재율 등의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수집하고 분석하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창고 운영에서 발생하는 전력 사용량, 포장재 사용량, 폐기물 발생량 등도 종합적으로 관리해야 한다. 이러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탄소배출량 저감 목표를 설정하고, 정기적으로 성과를 점검하며, 필요시 전략을 수정하는 순환적 관리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최근 한 물류센터를 방문했을 때 인상 깊었던 장면이 있다. 그곳에서는 태양광 패널이 설치된 지붕 아래에서 전기 지게차들이 조용히 움직이고 있었다. LED 조명이 환하게 밝히는 창고 안에서 직원들은 재활용 가능한 포장재를 사용해 정성스럽게 상품을 포장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미래는 이미 시작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런 변화에는 비용이 따른다. 전기차 도입, 친환경 포장재 사용, 재생에너지 활용, 에너지 효율적인 설비 도입 등 모든 것이 투자를 요구한다. 하지만 이는 단순한 비용이 아니라 미래를 위한 투자라고 생각해야 한다.
친환경 물류 서비스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면서 새로운 사업 기회들이 생겨나고 있다. 탄소중립 배송 서비스, 친환경 포장 서비스, 그린 물류 컨설팅 등이 그것이다. ESG 성과가 우수한 기업들은 투자 유치, 대기업과의 협력 기회 확대, 정부 지원 사업 참여 등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기술적 혁신도 가속화되고 있다. 자율주행 기술, 드론 배송, 전기차 충전 인프라 확충 등이 물류업계의 디지털 전환을 이끌고 있다. 이러한 변화들이 모여 물류업계의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바꿔나가고 있다.
생각해보면 이런 변화는 필연적이었다. 지구 온난화, 환경 오염, 자원 고갈 등의 문제가 심각해지면서 지속가능한 발전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특히 팬데믹을 겪으면서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 지역에서 발생한 문제가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몸소 체험했다.
CSDDD는 단순한 규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가기 위한 공동의 노력이다. 이 변화를 위기로 받아들일 것인지,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활용할 것인지는 각자의 선택에 달려 있다.
중요한 것은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하고, 체계적인 준비를 통해 경쟁력을 확보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들, 진정으로 소중한 것들을 다시 찾아가는 것이다.
할아버지와 함께 걸었던 그 시골길이 다시 깨끗해지고, 새소리가 들릴 수 있는 그런 미래를 만들어가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CSDDD는 그 시작일 뿐이다.
물류업계에 몸담고 있는 모든 분들께 말씀드리고 싶다. 이 변화는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다가올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준비하고 대응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는 달라질 것이다. 함께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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