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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성이라는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시간

by GLEC글렉

2025년 어느 차가운 겨울 아침, 나는 유럽연합에서 발표한 새로운 기업 지속가능성 보고 지침을 읽으며 한 가지 확신을 갖게 되었다. 이것은 단순한 규제의 변화가 아니라, 우리가 비즈니스를 바라보는 방식 자체의 근본적인 전환이라는 것을.


물류와 운송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CSRD는 마치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것과 같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우리가 이미 알고 있던 언어에 새로운 문법을 더하는 일이다. 그 문법의 이름은 바로 '투명성'이다.


오랫동안 이 업계에서 일해오면서 나는 수많은 변화를 목격했다. 디지털화의 물결, 자동화의 확산, 그리고 이제는 지속가능성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까지. 하지만 이번 변화는 이전의 것들과는 확연히 다르다. 이것은 단순히 효율성을 높이거나 비용을 절감하는 차원을 넘어서, 우리의 존재 이유 자체를 다시 묻고 있기 때문이다.


CSRD가 요구하는 것은 기업들이 환경, 사회, 지배구조 관련 정보를 재무정보와 동등한 수준으로 상세하게 공개하는 것이다. 물류업계에서는 특히 스코프 1, 2, 3 배출량을 포함한 전체 가치사슬의 탄소 발자국을 측정하고 보고해야 한다. 이는 우리가 지금까지 해오던 방식, 즉 자사의 직접적인 배출량만을 관리하던 방식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종종 이런 생각을 한다. 협력업체와 고객사까지 포함한 전체 공급망의 탄소배출량을 추적해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복잡하고 어려운 일인지를. 하지만 동시에 이것이 얼마나 필요한 일인지도 깨닫게 된다. 우리는 더 이상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고, 모든 행동이 다른 누군가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물류와 운송 분야는 본질적으로 탄소 집약적인 산업이다. 트럭이 도로를 달리고, 선박이 바다를 건너고, 항공기가 하늘을 나는 과정에서 우리는 지구의 대기 중에 온실가스를 배출한다. 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이런 현실을 숨기거나 모른 척할 수 없게 되었다. CSRD는 이 모든 것을 투명하게 공개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처음에는 이것이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특히 국제 물류를 담당하는 기업들의 경우 더욱 그렇다. 서로 다른 국가를 거쳐가는 화물의 탄소 발자국을 정확히 측정하고, 이를 각 구간별로 세분화하여 보고해야 하는 것은 기술적으로나 운영적으로 엄청난 도전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이것이 도전인 동시에 기회라는 것을 깨달았다. 정확한 탄소배출량 데이터를 확보한 기업들은 고객사에게 더 나은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고, 탄소 효율적인 운송 경로를 개발하여 경쟁 우위를 확보할 수 있다. 투명성은 때로는 취약점을 드러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신뢰를 구축하는 가장 강력한 도구이기도 하다.


CSRD 대응을 위해서는 정확하고 신뢰할 수 있는 탄소배출량 측정 시스템이 필요하다. 기존의 단순한 거리 기반 계산법으로는 이 새로운 기준이 요구하는 정밀도를 만족시킬 수 없다. 우리는 더 정교한 도구가 필요하다.

최신 탄소배출량 측정 기술들을 살펴보면 그 발전 속도에 놀라게 된다. 실시간 데이터 수집과 AI 기반 분석을 통해 높은 정확도를 구현하고 있다. GPS 추적 데이터, 연료 소모량, 적재량, 교통 상황, 기상 조건 등 다양한 변수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배출량을 계산하는 것이다.


블록체인 기술을 활용한 탄소 데이터의 투명성 확보도 인상적이다. 공급망 전반에 걸친 탄소배출량 데이터가 위변조 없이 신뢰성 있게 관리될 수 있어, CSRD가 요구하는 검증 가능한 보고서 작성이 가능하다. 기술이 단순히 편의를 제공하는 것을 넘어서, 신뢰의 기반을 구축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국내 물류기업들도 이런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특히 유럽 시장 진출을 계획하거나 이미 사업을 영위하고 있는 기업들의 경우 더욱 시급한 상황이다. 현재 운영 중인 물류 네트워크의 탄소배출량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첫 번째 단계이고, 이를 위해서는 전문적인 탄소배출량 측정 솔루션을 도입하고 직원들의 관련 역량을 강화해야 한다.


공급망 파트너들과의 협력 체계를 구축하는 것도 중요하다. CSRD가 요구하는 스코프 3 배출량 보고를 위해서는 하청업체, 운송업체, 창고업체 등 모든 협력사의 탄소 데이터를 수집하고 관리해야 한다. 이는 단순히 데이터를 모으는 것을 넘어서, 전체 생태계가 함께 변화해야 함을 의미한다.


탄소 감축 목표를 설정하고 이를 달성하기 위한 구체적인 액션 플랜을 수립하는 것도 필수적이다. 단순히 현재 상태를 보고하는 것을 넘어서, 지속적인 개선을 통해 탄소 중립을 달성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어야 한다.


물류 산업의 디지털 전환은 CSRD 대응에 있어서도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IoT 센서, 빅데이터 분석, 인공지능 등의 기술들이 탄소배출량 측정의 정확도를 높이고 있다. 트럭에 설치된 텔레매틱스 시스템은 실시간으로 연료 소모량, 주행 거리, 공회전 시간 등을 모니터링한다. 이러한 데이터들은 정확한 탄소배출량 계산의 기초가 되며, 동시에 운전자의 친환경 운전 습관 개선에도 도움을 준다.


창고 관리 시스템과 운송 관리 시스템의 통합도 중요한 변화 중 하나이다. 전체 물류 프로세스가 하나의 플랫폼에서 관리될 때, 탄소배출량 데이터의 수집과 분석이 훨씬 효율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분절된 정보가 아니라 통합된 관점에서 전체 그림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CSRD 시행은 글로벌 공급망 전반에 걸친 협력 체계의 중요성을 더욱 부각시키고 있다. 한 기업의 노력만으로는 전체 가치사슬의 탄소 발자국을 효과적으로 관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국제 물류 표준화 기구들은 탄소배출량 측정과 보고의 일관성을 확보하기 위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있고, 이러한 표준들을 적극 활용하면 서로 다른 국가와 기업 간의 데이터 호환성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업계 전체의 탄소 감축 목표 달성을 위한 공동 이니셔티브들도 활발히 추진되고 있다. 경쟁사들이 함께 친환경 연료 개발이나 효율적인 운송 경로 최적화 기술을 연구하는 사례들이 늘어나고 있다. 경쟁과 협력이 공존하는 새로운 생태계가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나는 CSRD 시행을 단순한 규제 대응으로만 바라보지 않는다. 이것은 미래 성장을 위한 투자 기회이다. 지속가능한 물류 서비스에 대한 시장 수요는 계속해서 증가할 것이고, 이에 대한 준비를 철저히 한 기업들이 경쟁 우위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ESG 투자가 확산되고 있는 금융 시장에서는 탄소배출량 관리 역량이 우수한 기업들이 더 나은 투자 조건을 확보할 수 있다. 이는 장기적으로 기업의 성장 동력이 될 수 있는 중요한 요소이다. 인재 확보 측면에서도 지속가능성을 중시하는 기업 문화는 큰 장점이 된다. 젊은 세대의 인재들은 환경 친화적인 기업에서 일하고 싶어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EU CSRD 시행은 물류업계에 큰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를 위기가 아닌 기회로 받아들이는 기업들이 궁극적으로 성공할 것이다. 정확한 탄소배출량 측정과 투명한 보고는 이제 선택이 아닌 필수이다. 이를 위해서는 전문적인 기술과 노하우가 필요하며, 체계적인 접근을 통해 단계별로 대응해 나가야 한다.


변화는 때로는 두렵고 어려운 것이다. 하지만 그 변화가 더 나은 미래를 위한 것이라면, 그리고 우리 모두가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라면, 그 여정은 분명 의미 있는 것이 될 것이다. 투명성이라는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이 시간이, 우리에게는 더 나은 내일을 위한 첫걸음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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