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벽두, 물류 컨설팅을 하는 내게 찾아온 한 중소기업 대표의 얼굴에는 깊은 고민이 새겨져 있었다. "CDP 공시를 준비해야 한다는데,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절박함이 나에게도 전해졌다.
CDP, Carbon Disclosure Project. 전 세계 기업들의 환경 정보 공개를 촉진하는 국제 비영리 기구의 이름이다. 언뜻 보면 복잡한 줄임말에 불과하지만, 이 세 글자 안에는 우리 시대가 마주한 가장 중요한 숙제가 담겨 있다.
탄소배출량을 정확히 측정하고 공개하라는 것, 그리고 이를 줄이기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라는 것.
물류업계에서 십여 년을 일하며 수많은 기업들의 고민을 들어왔지만, 최근처럼 '탄소'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한 적은 없었다. 한때는 비용 절감과 효율성 향상이 물류업계의 최대 화두였다면, 이제는 지속가능성과 환경 책임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시대의 변화가 이렇게 빨리 찾아올 줄은 나도 몰랐다.
그날 오후, 나는 그 대표와 함께 그의 물류센터를 둘러보았다. 넓은 창고에는 각종 상품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고, 화물차들이 쉼 없이 드나들고 있었다. 평범한 물류센터의 일상이었지만, 이제는 다른 눈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저 디젤 트럭 한 대가 하루에 얼마나 많은 탄소를 배출할까? 이 창고를 밝히는 조명들이 사용하는 전력에서 발생하는 간접 배출량은 얼마나 될까?
CDP 공시를 준비하는 과정은 마치 자신의 몸을 세밀하게 들여다보는 건강검진과 같다. 평소에는 느끼지 못했던 구석구석의 문제들이 하나씩 드러나기 시작한다. 특히 물류기업들에게는 더욱 복잡한 진단이 필요하다. 자신이 직접 소유한 차량에서 나오는 직접 배출량부터, 전력 사용으로 인한 간접 배출량, 그리고 공급망 전체에서 발생하는 제3자 배출량까지 모든 것을 파악해야 한다.
"우리 회사는 작은 회사인데, 이런 복잡한 것들을 다 해야 하나요?" 그 대표의 질문에 나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사실 나도 처음에는 이런 생각을 했었다. 글로벌 대기업들이나 할 일이지, 우리 같은 중소기업까지 이런 부담을 져야 하나 싶었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대기업들이 협력업체에 대한 ESG 요구사항을 강화하면서, CDP 공시는 더 이상 선택사항이 아닌 필수사항이 되어가고 있었다. 납품업체를 선정할 때 CDP 점수를 중요한 평가 기준으로 활용하는 기업들이 늘어나고 있었고, 이는 중소 물류기업들에게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그날 저녁,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는 문득 몇 년 전의 일을 떠올렸다. 친환경 경영이 화두가 되기 시작할 무렵, 한 물류기업의 임원이 이런 말을 했었다. "환경은 좋은 일이지만, 우리는 먹고사는 게 먼저 아니냐." 당시에는 그럴듯하게 들렸던 말이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얼마나 안일한 생각이었는지 깨닫게 된다.
CDP 공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만난 여러 기업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처음에는 부담스러워했던 기업들이 실제로 배출량을 측정하고 분석하는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이익을 얻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정확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비효율적인 운송 경로를 개선하거나, 에너지 사용 패턴을 최적화하면서 실질적인 비용 절감 효과를 체험하게 된 것이다.
한 택배회사의 경우, CDP 공시를 준비하면서 자사의 배송 경로를 전면 재검토하게 되었다. 그 결과 기존보다 30퍼센트 이상의 연료비를 절약할 수 있었고, 동시에 탄소배출량도 크게 줄일 수 있었다. 환경과 경제성,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셈이었다.
물론 모든 과정이 순탄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특히 스코프 3 배출량을 측정하는 과정에서 많은 기업들이 어려움을 겪는다. 공급망 전체에서 발생하는 배출량을 파악하려면 협력업체들의 협조가 필수적인데, 이들 역시 정확한 데이터를 제공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마치 연쇄반응처럼 전체 공급망이 함께 변화해야 하는 상황이다.
이런 복잡한 과정을 거쳐 완성된 CDP 공시 보고서를 처음 본 기업 대표들의 반응은 다양하다. 어떤 이는 자신의 회사가 생각보다 많은 탄소를 배출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기도 하고, 어떤 이는 생각보다 체계적으로 관리되고 있다는 점에 안도하기도 한다. 하지만 공통적으로 느끼는 것은 '이제야 우리 회사의 진짜 모습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감축 목표를 설정하는 과정은 또 다른 도전이다. 과학기반 감축목표라는 것은 지구 평균 온도 상승을 1.5도 이내로 제한하는 파리협정 목표와 일치해야 한다는 뜻이다. 처음에는 막막하게 느껴지는 숫자들이지만, 구체적인 실행 계획을 세우다 보면 의외로 실현 가능한 목표가 되기도 한다.
한 물류기업이 전기차 도입을 검토하면서 세운 계획을 보면, 향후 5년간 전체 차량의 40퍼센트를 전기차로 교체한다는 목표가 있었다. 처음에는 무모해 보였지만, 정부 보조금과 전기차 기술 발전을 고려하면 충분히 달성 가능한 목표였다. 더 나아가 이 계획은 장기적으로 연료비 절감과 브랜드 이미지 개선이라는 부가적인 효과도 가져다줄 것으로 예상되었다.
디지털 기술을 활용한 스마트 물류 시스템도 중요한 감축 방안 중 하나다. IoT 센서로 실시간 배출량을 모니터링하고, 인공지능으로 최적의 운송 경로를 계산하며, 빅데이터로 효율성을 지속적으로 개선한다. 마치 SF 영화에서나 볼 법한 이야기였지만, 이제는 현실이 되고 있다.
물론 이 모든 과정이 혼자서는 불가능하다. 탄소배출량 측정은 복잡한 기술적 지식을 요구하며, CDP 공시 양식은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는 너무나 방대하고 복잡하다. 그래서 많은 기업들이 전문 컨설팅 서비스를 활용한다. 우리 같은 전문가들이 존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CEO의 의지다. 아무리 좋은 시스템과 전문가가 있어도, 경영진이 진정성을 가지고 접근하지 않으면 형식적인 공시에 그칠 수 있다. 반대로 진정성 있는 리더십이 있다면, 제한된 자원으로도 놀라운 성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
2025년 현재, CDP 공시는 더 이상 물류업계의 미래 이야기가 아니다. 바로 지금, 여기서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다. 한국의 K-택소노미 도입과 녹색분류체계 확대는 이런 변화를 더욱 가속화시키고 있다. 변화의 물결을 거스르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이 변화를 어떻게 기회로 만들 것인가가 관건이다.
물류산업의 탄소중립 대전환은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앞으로 더욱 강화될 규제와 높아질 사회적 요구를 생각하면, 지금의 준비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CDP 공시는 이런 준비의 첫 걸음이자, 우리가 가야 할 길을 보여주는 나침반과 같은 역할을 한다.
그날 만났던 중소기업 대표는 몇 달 후, 환한 표정으로 나를 다시 찾아왔다. "처음에는 정말 막막했는데, 이제는 우리 회사의 미래가 보여요." 그의 말에서 느껴지는 자신감이 나에게도 큰 감동을 주었다.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받아들인 그의 용기가 결국 새로운 기회를 만들어낸 것이다.
물류업계의 탄소중립 여정은 아직 갈 길이 멀다. 하지만 한 걸음씩 내딛는 이들이 있는 한, 그 미래는 분명 밝을 것이다. CDP 공시라는 작은 시작이 결국 지속가능한 물류 생태계를 만들고, 우리 모두가 꿈꾸는 탄소중립 사회 실현에 기여하게 될 것이다.
변화는 언제나 불편하다. 하지만 그 불편함을 감수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이들만이 새로운 시대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지금이 바로 그 선택의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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