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장님이 화이트보드에 그린 미래 지도 이야기
회의실 화이트보드 앞에 선 사장님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중견 물류기업을 운영하는 박 사장님이었다.
"RE100,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물류&운송산업 탄소배출량 측정 전문기업 글렉의 컨설턴트로서 수많은 기업을 만났지만, 그날만큼 절실함이 느껴진 날은 없었다.
"먼저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부터 알아야 합니다." 나는 마커를 들었다.
첫 번째 동그라미를 그렸다. 현재 위치. 박 사장님의 회사는 연간 5,000MWh의 전력을 사용하고 있었다. 월 전기요금만 5억. 냉동창고가 40%, 조명이 20%, 컨베이어가 15%를 차지했다. 트럭 50대가 내뿜는 탄소, 직원들이 출퇴근하며 만드는 배출량까지 하나하나 적어나갔다.
"이게 다 우리가 만드는 탄소예요?" 박 사장님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두 번째 동그라미. 목표 지점. 2050년 RE100. 너무 멀어 보였다. 그래서 중간 지점들을 그렸다. 2025년 10%, 2027년 25%, 2030년 60%. "한 번에 가는 게 아닙니다. 계단을 오르듯 하나씩 올라가는 거예요."
박 사장님이 물었다. "뭐부터 해야 할까요?"
나는 창밖을 가리켰다. "저 형광등부터 바꾸세요. LED로요." 가장 쉽고, 투자 대비 효과가 큰 것부터. 그다음은 물류센터 지붕. "태양광 패널 설치하면 초기 투자는 들지만, 7년이면 회수됩니다."
재생에너지 조달 방법을 설명할 때였다. 녹색프리미엄, REC 구매, PPA 계약, 자가발전. 복잡한 용어들이 쏟아졌다. 박 사장님이 손을 들었다. "쉽게 설명해주세요."
"녹색프리미엄은 마트에서 유기농 제품 사는 거예요. 비싸지만 간편하죠. REC는 탄소를 줄인 만큼의 증서를 사는 거고요. PPA는 농부와 직거래 계약하는 것처럼, 발전소와 직접 계약하는 겁니다. 자가발전은 직접 텃밭을 가꾸는 거죠."
박 사장님이 웃었다. 처음으로.
전기트럭 이야기가 나왔을 때, 분위기가 다시 무거워졌다. "디젤보다 3배 비싸다고요?"
"단계적으로 접근하세요. 먼저 도심 배송용 1톤 트럭 5대만 바꿔보는 겁니다. 파일럿 프로젝트로요. 성공하면 확대하고, 문제가 있으면 보완하고."
투자 계획을 짤 때는 계산기가 쉴 새 없이 돌아갔다. 태양광 50억, 전기트럭 450억, 충전 인프라 100억... 총 800억. 박 사장님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한 번에 다 쓰는 게 아닙니다. 10년에 걸쳐서요. 그리고 정부 보조금도 있고, 에너지 절감액도 있고, 무엇보다..." 나는 잠시 말을 멈췄다. "미래가 있습니다."
그날 회의는 6시간이나 이어졌다. 화이트보드는 숫자와 그림으로 가득 찼다. CEO 직속 ESG 위원회 설치, 부서별 KPI 설정, 월별 모니터링 시스템... 하나의 로드맵이 완성되어갔다.
회의가 끝날 무렵, 박 사장님이 말했다. "처음엔 막막했는데, 이제 길이 보이네요."
6개월 후, 박 사장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LED 다 바꿨어요. 전기요금이 20% 줄었습니다. 직원들도 뿌듯해하고요. 이제 태양광 설치 준비 중입니다."
작은 성공이 다음 도전의 용기가 된다. 그게 로드맵의 힘이다.
최근 또 다른 물류기업 대표를 만났다. 역시 RE100을 고민하고 있었다. 나는 박 사장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6개월 전만 해도 막막해하셨는데, 지금은 직접 다른 기업에 조언하고 계세요."
그 대표님도 화이트보드 앞에 섰다. 떨리는 손으로 첫 번째 동그라미를 그렸다. 현재 위치.
모든 여정은 그렇게 시작된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아는 것부터. 그리고 어디로 가고 싶은지 그려보는 것. 복잡해 보이는 RE100도 결국은 하나의 여행이다. 지도를 그리고, 한 걸음씩 걸어가는.
오늘도 누군가는 화이트보드 앞에 서 있을 것이다. 떨리는 마음으로 미래를 그리고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 전하고 싶다.
"괜찮아요. 다들 그렇게 시작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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