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소 데이터가 없으면, 계약도 없다

by GLEC글렉

얼마 전 한 물류회사 대표님을 만났다. 오랜 거래처였던 글로벌 화주로부터 갑작스러운 연락을 받았다고 했다. 다음 분기 입찰부터 탄소배출량 데이터를 제출하지 않으면 참여 자격을 줄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가격도 맞추고, 납기도 잘 지켰는데. 갑자기 탄소 데이터라니요."

그분의 당혹스러운 표정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이건 예고된 변화였다.


물류업에서 탄소배출량을 다루는 일을 하다 보니 이런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2~3년 전만 해도 탄소 데이터는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만인 것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No data, no contract. 데이터가 없으면 계약도 없다. 농담처럼 들리던 이 말이 현실이 되었다.


왜 이렇게 됐을까.

2024년부터 유럽연합에서 CSRD라는 지침이 본격 시행됐다.

기업 지속가능성 보고 지침이라고 불리는 이것은 EU 내 대기업들에게 온실가스 배출량을 의무적으로 공시하라고 요구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Scope 3이라는 개념이다. 기업이 직접 배출하는 것뿐 아니라, 공급망 전체에서 발생하는 간접 배출량까지 보고해야 한다.


문제는 이 Scope 3이 전체 탄소 발자국의 70에서 90퍼센트를 차지한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배출량이 자기 회사 밖에서 일어난다는 뜻이다.

원자재를 조달하고, 물건을 운송하고, 제품이 사용되고 폐기되는 모든 과정에서 탄소가 나온다.

그래서 대기업들은 자연스럽게 협력업체를 향해 손을 내밀 수밖에 없다. 당신들의 탄소 데이터를 달라고.


물류와 운송은 그 첫 번째 타깃이 됐다.

화주 기업 Scope 3 배출량에서 물류가 차지하는 비중은 5에서 15퍼센트 정도다.

숫자로 보면 작아 보일 수 있지만, 측정이 비교적 명확하고 개선 여지가 크기 때문에 가장 먼저 데이터 요구 대상이 된다.


실제로 글로벌 선도 기업들은 이미 움직이고 있다.

네슬레는 전체 배출량의 70퍼센트를 차지하는 공급업체들에게 과학 기반 감축 목표를 설정하라고 권장한다. GM은 1차 공급업체에게 EcoVadis 평가에서 50점 이상을 받으라고 요구한다.

HP는 2025년까지 제조 관련 지출의 80퍼센트를 지속가능성 목표에 연계된 공급업체에 배정하겠다고 선언했다.

MIT 슬론 경영대학원의 2023년 연구에 따르면 64퍼센트의 기업이 공급업체 평가에 지속가능성 지표를 포함하고 있다. 2020년에는 38퍼센트였다. 불과 3년 사이에 거의 두 배가 된 것이다.


변화의 흐름을 좀 더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 다섯 가지 특징이 보인다.

첫째, 탄소 데이터 제출 자체가 입찰 참여의 전제조건이 됐다.

예전에는 가격과 서비스 품질, 납기 준수율이 핵심이었다. 지금은 그 앞에 탄소 데이터라는 관문이 하나 더 생겼다. 이 관문을 통과하지 못하면 경쟁 무대에 올라설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둘째, 어떤 방법론으로 산정했는지까지 검증한다.

그냥 숫자만 내면 되는 게 아니다. ISO 14083이라는 국제 표준이 있고, GLEC Framework라는 산업 가이드라인이 있다. 글로벌 화주들은 이 기준에 맞춰 산정한 데이터인지 확인한다. 2023년 3월에 발표된 ISO 14083은 운송 서비스의 온실가스 배출량을 정량화하고 보고하는 글로벌 기준이 됐다. EU에서는 물류 분야 탄소배출량 산정의 의무 표준으로 인정받고 있다.


셋째, 제3자 인증 평가의 활용이 급증했다.

EcoVadis는 전 세계 89,000개 이상의 기업을 평가하는 세계 최대 지속가능성 평가 플랫폼이다.

CDP는 22,700개 이상의 기업을 평가하며 공급망 탈탄소화에 앞장서는 기업을 인정한다.

월마트, 아스트라제네카 같은 대형 기업들은 이 두 가지를 동시에 활용해서 공급업체의 ESG 현황을 파악한다.


넷째, 운송 수단별 탄소 집약도를 비교해서 최적의 옵션을 고른다.

해상 운송은 톤킬로미터당 10에서 20그램의 이산화탄소를 배출한다. 철도는 20에서 30그램, 도로는 60에서 150그램, 항공은 500에서 1,000그램이다. 같은 물건을 운송하더라도 어떤 수단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탄소 발자국이 수십 배 차이 난다. 입찰에서 경쟁사 대비 몇 퍼센트 낮은 탄소배출량으로 운송할 수 있는지가 중요한 차별화 요소가 됐다.


다섯째, 장기 계약에서는 탄소 감축 로드맵까지 요구한다. 3년에서 5년 이상의 계약을 맺으려면 현재 데이터만으로는 부족하다. 앞으로 어떻게 줄여나갈 것인지, 2030년과 2050년 목표는 무엇인지, SBTi에 연계된 넷제로 로드맵이 있는지까지 보여줘야 한다. 한 물류업계 관계자는 대규모 글로벌 화주와의 장기 계약에서는 로드맵이 없으면 아예 입찰 참여 자격이 주어지지 않는 경우도 있다고 전했다.


이런 흐름 속에서 국내 물류기업들은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정확한 측정 체계를 갖추는 것이다. 운행 데이터를 수집하고, 국제 표준에 맞는 방법론을 적용해서 탄소배출량을 산정해야 한다.

글렉 디지털 타코그래프를 활용하면 실제 운행 데이터를 기반으로 정확한 연료 소비량과 탄소배출량을 계산할 수 있다.


그다음은 제3자 인증을 획득하는 것이다.

EcoVadis에서 50점 이상, 가능하다면 Gold 등급인 70점 이상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CDP 공급망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것도 좋다. 그리고 미래를 위한 감축 로드맵을 수립해야 한다.

기준 연도를 정하고, 연도별 감축 경로를 설계하고, 친환경 차량 도입이나 운행 효율화 같은 구체적인 수단을 마련해야 한다.


우리 회사 글렉은 이 문제를 풀기 위해 만들어졌다.

국내 최초로 SFC GLEC Tool 인증을 획득했고, 글렉 AI Tachograph는 2026 CES Innovation Awards를 Supply & Logistics 부문에서 수상했다. ISO 14083 방법론에 완전히 부합하는 솔루션으로, 글로벌 화주가 요구하는 수준의 탄소 데이터를 제공할 수 있다.


하지만 솔루션을 팔기 위해 이 글을 쓰는 건 아니다.

물류업에 종사하는 분들이 이 변화의 흐름을 정확히 이해하셨으면 한다.

탄소 데이터는 더 이상 있으면 좋은 것이 아니다. 글로벌 시장에서 생존하기 위한 필수 조건이 됐다.

EU뿐 아니라 미국 캘리포니아, 호주, 영국에서도 비슷한 공시 의무가 도입되고 있다.

2025년 이후 이 추세는 더욱 가속화될 것이다.


처음에 만났던 그 대표님은 지금 열심히 준비 중이시다.

다음 입찰에는 당당히 탄소 데이터를 제출하겠다고 하셨다.

변화는 늘 불편하다. 하지만 먼저 준비하는 사람에게는 기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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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소데이터 #ESG물류 #CSRD #글로벌입찰 #친환경물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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