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nsformed..

때론 좋고 때론 슬프고 때론 아프다

by 글린더

공항에 오면..

비가 오든 날이 흐리든 그냥 기분이 좋았다.

어린 날의 나는 공항에 오면 그제야 아픈 모든 증상이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맨날 늑장 부리다 부랴부랴 몇 분 앞두고 부랴부랴 입국 수속이 끝나고 가까스로 게이트 앞에 도착하면 사실 아플 틈도 없었다. 그때부터는 내 안의 모든 에너지를 끌어 쓰는 느낌이랄까..?


그리곤 여행지에 내리면 초반 잠시 관광객 모드로 바삐 주변을 둘러보곤 릴랙스 모드로 무계획 여행을 즐기곤 했다.

내 어린 날의 여행은 발길 닿는 대로 내가고픈 대로 움직일 수 있는 자율여행이 제1순위였다.

그러다 결혼을 하고 아이가 생기며 내가 좋아하고 선호하는 여행은 더 이상 의미가 없어지기 시작했다. 혼자 하는 여행은 결혼이라는 것을 하고 나선 더 이상 할 수가 없게 되었다.


결혼 후 여행을 많이 하지 않았던 남편은 함께 여행을 다니며 여행을 좋아하게 되었다. 분명 좋은 일이었다.

난 여행을 너무나 좋아했던 사람이니까. 함께하는 여행도 좋은 터였다. 그리고 그때부터 여행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20대의 여행과 30대의 여행이 달랐고, 미혼과 기혼의 여행이 달랐다. 친구와 함께하는 여행과 가족과 함께하는 여행도 다르고 무엇보다 누군가와 함께하는 여행과 혼자 하는 여행은 정말 큰 차이가 있음을 배웠다.

그리고는 점차 나의 여행은 사라져 갔다.


여행은 내게 쉼이고 멈춤이고 한 호흡 천천히 내어 쉬는 여유였다. 가만히 눈감고 벤치에 앉아 하늘을 향해 고개를 젖히고 따뜻한 햇살을 받는 것도 간질간질 스쳐가는 시원한 바람을 느끼는 것도 그저 행복했다. 모든 것이 느리게 움직이고 세상의 흐름은 내게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주요 관광지의 명소를 방문하는 것보다 그 옆에 이름 모를 작은 공원에서 조용히 사색하는 게 좋고 유명한 화가의 작품보다 그 길 끝에 눈길조차 주지 않는 벽의 거친 페인트칠이 더 좋았다. 간혹 버스를 잘못 타거나 예약한 기차를 놓칠 때면 불안한 긴장감과 함께 새로운 곳을 찾아야 함에 설레었고 잘못 들어선 골목길에서 각기다를 모양의 집들과 대문들이 사랑스러웠다. 모든 순간이 아름다웠고 매 상황이 자유로웠다. 그렇게 목적지 없이 걷는 내가 이상하다고 하는 이들의 말도 그저 재밌는 에피소드를 얘기하듯 기분 좋은 대화가 되고 언제나 다음이 기대되는 순간의 연속, 나에게 여행은 그런 것이다.


하지만 남편의 여행은 나와 많은 부분이 달랐다. 매번 '반드시'들러야 하는 코스가 있고, '반드시'해야 하는 액티비티가 있고, '반드시' 먹어야 하는 음식들이 있었다. 같이 하는 여행은 혼자일 때 보다 안정감 있고 즐길거리들이 더 풍부했다. 맛볼 수 있는 음식도 더 다양했고 해 볼 수 있는 체험도 많아졌다. 나눌 수 있는 것들이 늘어나고 공유할 수 있는 추억이 쌓여가며 새로운 방식의 여행이 익숙해져 갔다.


그리고 어느샌가 낯선 곳에 가도 주변을 바라보지 않는 나를 발견했다. 여행을 일처럼 부지런히 하고 있었다. 시간표에 짜인 프로그램에 따라 바삐 움직이고 내달리고 미션을 수행해 갔다. 하나씩 해낼 때마다 손바닥을 마주치며 성공을 자축하던 우리는 여행을 도전처럼 하기 시작했다, 점점 해보지 않은 것, 가보지 않은 곳, 맛보지 않은 것들을 찾아 도장 깨기 하듯 하나씩 섭렵해 갈수록 왠지 모를 공허함이 쌓이고 있었다.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왠지 모를 벅찬 설렘과 에너지를 품고 돌아오는 것이 아닌 기진맥진 모든 에너지를 탈탈 쏟아내고는 집에 도착하는 순간 뻗어버리기 일쑤였다.

이고 지고 온갖 것들을 챙겨 짊어지고 생존을 위한 피난을 가듯 그렇게 여행은 힘든 일이 되어갔다.


그렇게 점점 나에게 휴식은 여행이 아닌 쉼이 되었고

쉴 수 있는 기회가 있을 때면 집에서 쉬는 것을 선호하게 되었다.

이런 쉼을 사랑하게 될 줄은 20대의 배낭여행을 즐기던 어린 나는 미처 몰랐다.

몸의 고통은 있을지언정 끊임없는 도전이 즐비했던 20대의 여행, 도전과 설렘은 덜할지언정 심신의 안정이 신체를 지배하여 편안함을 추구하는 지금의 여행.


40대가 되고 보니 때론 변한다는 것이 슬프기도 아프기도 하지만 참 좋을 수도 있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지금 보니 절대적인 것은 없지만 변하지 않을 거라 믿고 살아가는 시절이 있었고 변할 거라 믿으며 결코 변하지 않는 것에 헛된 기대를 하며 살아가는 시간도 있었다. 그러다 문득 스스로의 변화를 마주할 때 불현듯 나이 듦을 느끼고 잠시 깊은 슬픔에 빠져들곤 한다. 그리곤 다시 새로운 장점을 발견하고 그 속의 기쁨을 찾아낸다. 그 과정이 매번 행복하지만은 않지만 그렇게 또 살아내는 방법을 조금씩 배워가는 중이다.


이전 03화결혼생활도 일처럼 열심히 하면 될 줄 알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