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 전으로 돌아가기 어려운 것들. (마지막화)

by glee


새로운 맛을 찾아서

임신을 하면 주로 신 음식이 당긴다고 들었는데, 나 역시 신맛 나는 입덧캔디, 새콤달콤, 냉면, 샐러드도 식초 가득 뿌려먹었다. 엄마가 만들어준 반찬도 소용없었고, 제일 야무지게 먹었던 건 밭에서 따다 직접 담근 방울토마토 피클.

방울토마토는 옆으로 뻗어 제놈 마음대로 땅을 타고 자라는데 (남의 밭도 심드렁히 가로지름) 신경 써주지 않으면 덤불에 가려 토마토도 벌겋게 익질 못한다. 역시나 내내 초록빛에 멀 건하길래, 가을 시작 전 덜 익은 방울토마토와 할라피뇨를 죄다 뜯어 피클로 만들었다.

할라피뇨도 생각보다 많이 열려 냉장실에 두었다가 여기저기 넣어먹기에 좋았다. 옆집에서 날아온 깻잎도 잘 커주어 소쿠리에 담아서 밭 매는 아낙네가 된 기분을 한 껏 누리며 집에 걸어오곤 했다. 피클을 만들어먹은 건 처음이었는데, 오늘 연재를 마지막으로 다음화에는별책부록 레시피를 공유해보려한다.



텃밭 폐장

11월 30일 텃밭 폐장일을 앞두고 남겨둔 작물을 정리하러 텃밭에 갔다. 다른 밭에는 김장용 배추들이 끝까지 잘 버티고 있었다. 반대로 정리된 밭들은 시원하니 쓸쓸한 민둥머리 같았다. 텃밭에 처음 갔던 날, 임산부가 되어 올랐던 밭, 그리고 마지막 인사 같았던 잡초더미 밭을 사진으로 담았다. 텃밭도 마음도 잡초들로 쑥대밭이 되었지만, 이름 푯말도 없이 고추모종까지 다 정리되어 있었다. 새로 단장하고 다시 새 인연들을 기다리겠지 싶었다.


경험하기 이전으로 돌아가기 어려운 것들

사랑하는 사람과 감정을 주고받는 것, 안정적인 소득으로 영위하는 삶의 수준이 바뀌는 것, 무수한 시간을 들여 쌓아 온 취향(문화취향은 비가역적이란 말이 있듯 자랑할 만한 번듯한 것은 아니어도 조금 더 선호하는 방향이 쌓이는 것). 나를 성장시켜 주는 사람을 만나는 것, 그리고 이유 없이 지지해 주던 가족의 따듯한 눈빛 (돌아가신 후에 진귀한 것을 잃었구나 생각했다).


남편과의 결혼 생활 중에는 딩크로 지낸 5년 차에 서로 바라는 가정에 대해 이야기 나눈 일, 텃밭에서 열무를 키워 남편이 손수 담가준 열무국수를 맛본 일, 내 몸에서 매주 커가는 아기 초음파 보고 오는 일, 셋 만의 세계라는 공동의 목표가 생기는 일.


내게는 그런 것들이 알기 전으로 돌아가기 어렵다고 생각된다. 텃밭을 운영하며 안 해도 되는 것들을 부러 하고 사는 재미를 알게 되었고, 진귀한 경험들로 삶이 풍요로워졌다. 식물을 키우는 것과, 뱃속에 아이를 키우는 건 생장에 필요한 양분과, 잘 키워보겠다는 정성과 마음, 눈에 보이지 않지만 엄청난 성장을 하고 있다는 부분에서 닮아있다. 같은 기간 스스로 나무가 되는 경험을 하며, 작은 도시 텃밭이 내게 준 잔잔하고도 강렬한 경험은 아이를 키우며 통제할 수 없이 벌어지는 상황이 오더라도 건강한 마음으로 잘 대처하며 앞으로 가야 한다고 말하는 것 만 같았다.


- 구독자 분들께 감사드리며, 24년 봄부터 가을 저희 부부를 설레게 했던 텃밭 운영일기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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