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스토피아의 가면을 쓴 희망찬가 - '사피엔스의 멸망' 서평
삶의 목적과 방향을 찾는 사람에게 '죽음'에 대해 생각해보라는 조언과 책들이 많이 존재한다. '죽은 자의 집 청소'나, '죽음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책들 말이다. 이러한 책들이 인기 있는 이유는, 인생의 허망함과 죽음의 보편성을 깨닫고 나면 인생의 방향성을 되돌아볼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개인의 죽음을 넘어 거시적인 차원에서 '인류'의 멸망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은 찾기도 어렵고 인기도 없다. 그런 의미에서 '사피엔스의 멸망'은 특별한 책이다. 죽음에 관한 책들이 개인의 삶의 방향성에 대해 고민하게 해 준다면, 인류 멸망에 관한 책은 인류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생각의 단초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보다 큰 스케일, 보다 넓은 관점에서 생각하게 해주는 책이다. 생각의 지평을 넓혀주는 책은 언제나 좋다.
이 책에 따르면, 근 100년 안에 인류가 멸망할 확률은 무려 6분의 1이다. 이 6분의 1이라는 확률은 자연적 위험과 인공적 위험의 확률이 통합된 것이기는 하나, 자연적 멸망의 가능성은 10,000분의 1인 반면 인공적 위험으로 인한 멸망의 가능성은 이미 그 자체로 6분의 1이다. 바꿔 말하면, 인류는 100년 안에 약 17%의 확률로 스스로를 파멸시킬 것이다.
인류가 만들어낸 인공적 위험들은 핵전쟁, 기후변화, 인공적 전염병, 비정렬 인공지능 등에서 비롯된다. 각각의 사건들의 발생 확률은 다르지만, 공통점은 인간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만든 것들이 역설적이게 인류를 절멸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핵, 생화학 병기, 인공지능 등 가능한 멸망의 시나리오의 소재가 되는 기술들은 사실 그 자체로는 중립적이다. 오히려 인류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줄 여지가 큰 기술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술들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이 기술의 사용을 결정하는 의사결정자들이 아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책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세상에는 끔찍하리만큼 불완전한 정보에 따라 움직이고
인류 미래를 위협할 기술들을 허가하는
형편없는 의사결정자들이 가득하다.
이와 관련해 최초의 핵무기를 만든 오펜하이머의 실험 이야기가 책에 소개된다. 책에 따르면, 최초의 원자폭탄 실험인 트리니티 실험 당일까지도, 오펜하이머를 포함한 세계 유수의 과학자들은 원자폭탄이 터졌을 때 일어날 상황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그들은 연구 과정에서, 원자폭탄이 터지면 일어나는 핵융합 반응으로 인해 대기 중의 질소가 폭발하거나, 바닷속 수소가 폭발해 전 세계가 파괴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발견했다. 철저한 계산을 통해 그 확률이 낮을 것이라고 예상하긴 했지만, 그들의 계산이 정확하다는 확신은 없었다.
결과론적으로 보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후의 연구를 통해 대기 연소는 물리학적으로 불가능한 일임이 밝혀졌다. 그러나, 폭탄 설계자들은 그 사실을 몰랐고, 당시 그들의 지식수준에서 보면 분명 인류 절멸의 가능성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험천만한 실험을 강행한 것이다.
이 뿐만 아니라, 우리가 모르는 사이 핵전쟁으로 인류가 멸망에 치달을 위기도 존재했다. 쿠바 미사일 위기가 한창 고조되던 1962년에, 오키나와에 있는 미군 미사일 기지에 실제로 핵무기 발사 명령이 전달됐다. 그러나 소련과의 냉전 상황에서 소련이 아닌 다른 타격지점이 포함된 발사 명령이 내려온 것을 이상하게 여긴 윌리엄 바셋 대위가 작전 본부에 재차 확인을 요청했고, 작전 본부에선 곧바로 발사 중지 명령을 하달했다. 발사 명령이 하달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일개 대위 한 명의 판단이 핵전쟁을 막은 것이다.
이렇듯 핵을 포함한 인공적 생산물로 인한 인류 절멸의 위기는 곳곳에 퍼져있다. 기후 변화로 인해 역사적인 산불과 폭우가 전 세계에서 번갈아 일어나고 있는 현실 또한 사피엔스의 멸망이 불가능한 시나리오는 아님을 보여준다.
이렇듯 위기가 분명히 존재함에도 우리가 체감하지 못하고 이를 예방하려 하지 않는 것은 '존재 위험으로부터의 보호'가 전 세계의 공공재이기 때문이다. 특정 개인, 특정 국가가 인류 절멸을 막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해도, 그 개인과 국가가 쏟는 노력에 비해 직접적으로 얻는 이익은 적은 반면 다른 사람, 다른 나라가 이익에 무임승차하기 때문에 모두가 나 몰라라 하는 상황이 펼쳐지는 것이다.
또 다른 이유는 '존재 위험'이 현존하는 인류가 아닌 미래 세대에 닥칠 위험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미래의 1달러보다 지금의 1달러를 선호하듯, 사람들은 미래의 이익을 지금의 이익보다 할인해서 보는 경향이 크다. 이론상으로는 우리나, 수천 년 전, 혹은 수천 년 후의 사람들의 삶의 가치는 동등하다. 그러나 미래의 이익을 평가 절하하는 우리의 심리로 인해 현존하는 사람들의 공리를 극대화하고 미래 세대의 피해는 나 몰라라 하며 결과적으론 존재 위험을 확대시키는 결정이 난무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현상에 대해 저자인 토비 오드는 이렇게 말한다.
전 세계 모든 사람이 동원되더라도 그 노력은 죽은 모든 자와 아직 태어나지 않은 모든 세대의 노력에서 지극히 작은 부분만 차지할 뿐이므로
우리는 작은 소수 집단에 어울리는 신중함과 겸손함으로 행동해야 한다.
현존하는 80억 인류가 어마어마한 숫자 같지만, 수만 년 전부터 존재했던 이들과 수만 년 후에도 존재한 이들의 수에 비하면 지극히 소수집단일 뿐이다. 토비 오드는 우리가 우리의 소수성을 지각하고, 보다 우주적인 관점에서 인류의 미래를 위한 준비를 해나갈 것을 제안한다.
사피엔스가 멸망할 것이라는 디스토피아를 주장하는 책 같지만, 이 책의 결론은 굉장히 희망적이다. 앞으로 지구, 나아가 태양계, 우리 은하가 멸망하기 까지는 수 억년의 시간이 남아있고, 그 사이 인류는 지구를 살리고, 다른 행성 및 항성, 은하로 진출하며 유구한 역사를 이어갈 것이라는 우주적인 희망찬가가 '사피엔스의 멸망'의 결론이다. 앞서 말했듯 개인의 죽음에 대한 상상은 개인이 보다 희망찬 삶을 살아가는 원동력이 된다. 그렇다면, 현존하는 인류 및 미래 세대들이 보다 희망찬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선, 인류 절멸이라는 가능성에 대해 상상하고 고민해보는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그 시간을 제공해주는 책이 '사피엔스의 멸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