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홀로 배낭여행 어쩌면 현실도피

#배낭여행자 01 _ #Amsterdam Netherlands

by 재이리

휴학생이었던 스물셋. 대학교 졸업반, 치열한 대한민국 취준생 대열에 뛰어들어야 한다는 압박감이 어느 때 보다 심했던 때. 자신감이 바닥을 치던 시절이었다. 예전부터 꿈꿔왔던 배낭여행을 가기 위해 휴학 기간 동안 열심히 돈도 벌었다. 바라고 바랐던 버킷리스트를 이루겠다는 마음이었지만 어쩌면 지독하게 어렵고 깜깜한 취준생이라는 명함을 던져버리고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었던 것일지 모르겠다. 이듬해 여름, 혼자 배낭 여행길에 올랐다. 호기롭게 결정했지만 막상 당일이 되었을 때는 괜한 짓을 했다 하며 발을 동동 굴렀다. 쿵쾅대는 심장과 불안한 마음을 감추고 태연한 척 웃으며 부모님과 인사를 했을 때, 심야버스를 타고 인천공항에 도착했을 때, 구름을 밑에 두고 유유히 상공을 날고 있는 비행기 안에서까지도 그랬다. 영어도 못하면서 무슨 자신감으로 혼자 가겠다고 그리도 당당하게 말한 걸까. 10년이나 살던 동네에서도 길을 헤매면서 타국에서 혼자 다닐 수 있을까. 오백만 가지의 걱정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던 내가, 한 달이라는 시간 동안 유럽의 여기저기를 누비며 누구보다 매 순간을 즐겼다. 매일 아침 눈을 떴을 때 유럽에서의 하루가 또 지나버린 것에 무척이나 아쉬워하면서 말이다. 배낭여행자라는 당찬 명함은 지난날의 나를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주었고 내 안의 또 다른 나를 발견하게 했으며 무엇이든 해낼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의 나에게 데려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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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sterdam Netherlands



01

수많은 배낭여행자들이 거쳐 가는 유럽 대륙 여행의 관문이자 나 혼자만의 첫 배낭여행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유럽 최고의 허브공항이라고 평가받을 만큼 큰 규모의 스키폴 국제공항(Amsterdam Airport Schiphol) 그 한가운데 멈춰 섰다. 해외여행을 좀 해봤다는 주변 지인들은 어디서든 당당함을 잃지 말라고 했다. 길을 잃고 당황하는 모습의 여행자는 수많은 집시들의 타깃이 된다고. 어떻게 숙소로 가야 할지 몰라 무척이나 당황스러웠지만 타깃이 되지 않으려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기 시작했다. '나는 길을 잃어버린 게 아니야. 헤매는 게 아니야.' 그렇게 1시간쯤 지났을까. 멀끔한 흑인 아저씨가 도와주겠다며 말을 건네 왔다. 나름 태연한 척했지만 같은 자리를 한참 동안 서성거렸으니 티가 안 났을 리가 없다. 그는 내가 타고 온 비행기의 기장이라고 했다. 유니폼과 티켓을 확인하고 그에 대한 경계심이 풀리자마자 그의 팔을 꽉 붙들고 다급하게 도움을 요청했다. "Help me! Help me!"


그가 앞장서서 나를 이끌어주었고 우리는 함께 버스에 올랐다. 마침 숙소와 그의 목적지가 같은 방향이었던 것. 내내 사람 좋은 미소를 보여주던 그는, 나보다 먼저 버스에서 내리면서도 기사에게 목적지가 되면 알려주라는 당부의 말을 잊지 않았다. 친절한 그에게 감사한 마음이야 이루 말할 수 없지만 'Thank you'라는 말 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었다. 진작 영어 공부를 좀 해둘 걸. 첫날의 일정이라고는 공항에서 숙소로 이동하는 것뿐이었는데 그 하나의 일정을 소화하는데 꼬박 반나절이 걸렸다. 앞으로 시작될 여행에 앞서 치른 고된 신고식 같은 하루였다. 마치 여행하는 동안 긴장 풀지 말고 정신 똑바로 차리라는 경고를 받은 기분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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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네덜란드는 가벼운 마약류나 매춘이 합법적인 나라이다.

그 한 줄의 소개 글은 네덜란드에 대한 선입견을 갖게 하기에 충분했다. 혼자 다니기에 위험하진 않을까. 호신술이라도 배워야 하나. 여행을 떠나기 전부터 온갖 걱정이 앞섰다. 하지만 네덜란드에서의 둘째 날, 내가 걱정했던 어두운 네덜란드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네덜란드 특유의 폭이 좁으면서도 기다란 모양의 집들이 운하를 따라 나란히 지어진 풍경. 어릴 적 아끼던 인형의 집이 떠오를 만큼 아기자기했다. 따스한 햇볕 아래 올곧은 초록의 나무, 잔잔한 운하, 여유로운 미소의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두 어깨 가득 얹어져 있던 긴장과 불안은 어느새 사라졌다. '풀 냄새가 가득한 넓은 초원에 색색의 튤립이 피어있고 곳곳에 커다란 풍차가 있겠지?' 많은 사람들이 네덜란드를 떠올리며 이렇게 말한다. 나 역시 그런 네덜란드를 기대했다.


하지만 내 상상 속 모습이 네덜란드의 흔한 풍경은 아니었다. 그 모습을 보려면 암스테르담 중앙역에서 풍차마을이라 불리는 잔세 스칸스(Zaanse Schans)로 가야 했다. 예전에는 700개 이상의 풍차가 있었다는데, 이제는 잔세 스칸스에서도 볼 수 있는 풍차는 4개뿐이다. 푸른 초원 위의 수많은 풍차를 보겠노라 다짐했건만, 그마저 사라지기 전에 봐 두어야겠다며 아침 일찍 코흐 잔디크(Koog-Zaandijk) 역으로 향했다. 역에서 산책하듯 걸어가다 보면 넓은 잔(Zaan) 강을 만나게 된다. 강을 중심으로 네덜란드의 초록색 전통가옥과 푸른 초원 위의 염소와 양, 풍차까지. 내가 꿈꾸던 네덜란드가 바로 여기 있었다. 끝없이 푸른 하늘과 초록의 초원을 바라보며 천천히 걸었다. 높은 건물과 관광객들에게 치이던 도심에서 조금 벗어났을 뿐인데, 시원한 풍경에 마음이 뻥 뚫리는 듯 상쾌함이 느껴졌다. '좋다'라는 말 밖에. 다른 건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네덜란드 3.JPG 네덜란드의 풍차마을, 잔세 스칸스(Zaanse Scha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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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네덜란드에서의 마지막 날. 숙소 근처 아담한 펍을 찾았다. 테라스에 자리 잡고 앉아 네덜란드 대표 맥주 하이네켄을 마시며 그 간의 네덜란드를 되새겨보고 있었다. 그때, 외국인 한 명과 시선이 마주쳤다. 왠지 이쪽으로 다가오는 듯 불길하다. 친절해 보였지만 영어 울렁증이 있던 터라 쓴웃음과 시선회피로 말 걸지 말아 달라는 무언의 신호를 보냈다. '아, 왜 하필 맥주는 자신감 넘치게 파인트로 시켜놔서는..' 다 마셨다 하며 일어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내 옆자리에 앉더니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나는 짧은 문장으로 받아치며 진땀만 흘릴 뿐이다. 곧 그도 나의 영어 수준을 알아챘는지. 기초적인 단어에 그림, 효과음, 만국 공통어인 바디랭귀지까지 섞어가며 나와의 대화를 이어가려 애썼다. 그렇게 더딘 대화를 한 시간쯤 하고서야 얼굴을 마주 보며 조금씩 맞장구를 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를 보면 볼수록 왠지 낯이 많이 익다. 그새 익숙해진 걸까. 그에게 당신을 본 것 같다고 했더니, 그는 웃으며 가방에서 콘서트 포스터 한 장을 꺼내 들었다. 자신을 네덜란드 재주가수라고 소개하고는 저녁에 있을 콘서트에 나를 초대했다. 그러고 보니 번뜩, 생각이 났다. 오며 가며 길에서 자주 봤던 포스터였다. 나 지금, 네덜란드 연예인을 만난 건가?


무조건 가겠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저녁에 프라하로 넘어가는 야간열차를 타야 했다. 여행에서 흔치 않은 기회를 놓쳐버리는 것 같았다. 손으로 얼굴에 눈물을 그려 보이고 표정으로는 한껏 아쉬움을 표현했다. 그러자 그도 아쉽다 하며 하이네켄 한 잔을 더 건넨다. 운도 없지. 남은 열차시간까지 하이네켄과 느린 대화로 아쉬운 마음이나 달래야겠다며 그와 잔을 부딪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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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한참을 네덜란드, 맥주, 그와의 대화에 빠져 있다가 하마터면 기차를 놓칠 뻔했다. 허겁지겁 역을 달려가 기차가 도착하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는 벤치에 앉아 호흡을 가다듬었다. 생각의 여유가 생기니 미처 챙기지 못한 것들이 그제야 하나 둘 떠올랐다. 여행에서 만난 이들과 사진 한 장 남긴 것이 없고 전화번호나 메일 주소, SNS 계정 어느 하나도 물어보지 않았다는 것을 네덜란드를 떠나는 기차역에서 깨달은 것이다. 물건을 잃어버린 것보다 그들과의 연결고리를 하나도 남기지 못한 것이 너무나 아쉽고 아쉽고 아쉬웠다. 혼자 떠난 첫 번째 여행이자 약 한 달의 여행의 시작이었기에 불안하고 무서운 마음이 컸던 때, 무서움보다는 즐거움으로 가득할 것이라는 믿음으로 여행을 이어갈 수 있게 해 준 고마운 네덜란드의 인연들. 네덜란드를 떠나기 전 그들과의 추억을 떠올리며 마음속으로나마 한번 더 감사의 인사를 전해 본다.





해당 글에는 본 저자의 독립출판물 <꽃다운 스물일곱의 여행 이야기 오늘은,>의 수정 및 보완한 내용 일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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