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 낯섦이 주는 설렘

#배낭여행자 03 _ #London UK

by 재이리

London 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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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여행의 막바지. 무서움은커녕 편안함을 느끼고 있을 무렵, 나는 마지막 여행지인 꿈의 런던으로 향했다. 한 달간 다녔던 여행지는 모두 지하철을 이용하는데 불편함을 감수해야만 했다. 한국의 대중교통시설이 얼마나 편리하게 되어있는지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이래서 여행 가면 애국자라는 말이 생기나 보다. 런던도 다르지 않겠지 하며 1%의 기대조차 하지 않았는데 지하철 역사로 들어서니 예상외로 쾌적했고 처음 방문한 관광객도 큰 어려움을 느끼지 않을 만큼 편리했다. 안내도를 정독할 기세로 한참을 쳐다보거나 게이트를 잘못 나가는 일이 비일비재했던 다른 나라에서와는 달랐다. 단번에 숙소가 있는 스위스 코티지(Swiss Cottage) 역에 도착했다. 런던에 와있다는 설렘에 기분이 한껏 들떴는데 일정까지 술술 풀리니 런던은 운명이지 싶었다. 잔뜩 업된 기분 탓인지 지하철역에서 나와 처음 마주한 런던의 조용한 주택가가 누군가에겐 평범한 모습일지 모르나 내겐 온통 감탄스러운 풍경이었다.


런던 3.JPG 런던에서의 첫 날 탔던 런던아이(London Eye)

02

숙소에 짐을 두고 런던에서의 첫 날을 아름답게 장식해 줄 런던아이(London Eye)로 가기 위해 걸음을 재촉했다. 탑승권은 한국을 떠나오기 전에 예매해두었다. 현장에서도 구입할 수 있지만 늘 수많은 관광객들이 모여든다는 말에 예약을 해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도착했을 때 탑승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줄이 저 멀리까지 이어져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예약해둔 티켓 덕분에 길게 줄지어 서있는 사람들의 옆을 당당하게 지나 바로 탑승할 수 있었다. 런던에서의 첫날 첫 번째 일정으로 런던아이를 선택한 이유는 런던의 야경을 보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야경을 즐기기엔 날이 너무 밝았다. 한국보다 해가 늦게 지는 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어쩐지 일이 술술 풀리는 것 같더라니. 런던아이 캡슐에 올라 밖이 잘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야경을 보지 못한다는 아쉬움은 탑승과 동시에 조금씩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빅벤(Big Ben)과 국회의사당(Houses of Parliament), 엽서에서나 보던 런던의 빨간 버스, 노을 지는 템스 강(Thames River). 캡슐이 천천히 위로 올라갈수록 런던의 모습을 더 많이 내려다볼 수 있었다. 깜깜 밤중이었으면 이렇게 자세히 하나하나 찾아볼 수 있었을까. 가장 높은 곳에 올라서는 해가 지기 전에 타길 잘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내가 정말 런던에 오긴 왔구나. 그제야 실감이 났다.


03

런던에서 딱히 계획한 일은 없었다. 정해진 일정에 구애받지 않고 돌아다니려는 생각이었다. 맑은 듯 흐린 런던에서의 아침, 해가 뜬 지 한참이 돼서야 늦장을 부리며 방을 나섰다. 나를 본 숙소 사장님은 오늘 노팅힐(Notting Hill)에 가보지 않을 거냐며 의아한 표정으로 물어왔다. 노팅힐에 가지 않는 내가 이상한 것처럼 쳐다보는 사장님에게 노팅힐에 꼭 가야 하는 이유를 되물어보았다. 알고 보니 때마침 노팅힐 카니발(Notting Hill Carnival)이 열리고 있었던 것이다. 매년 8월 마지막 주말에 개최되는 노팅힐 카니발 축제는 다양한 사운드 시스템을 갖춘 이동차량과 가장행렬을 따라다니며 음악과 춤을 즐길 수 있는 유럽 최대의 거리 축제다. 사장님이 아니었다면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한국으로 돌아갈 뻔했다. 정말 땅을 치고 후회했을 일이다. 큰 축제라는 말에 얼른 준비하고 노팅힐로 갔는데, 말로 듣고 찾아보고 상상했던 것과는 다르게 거리가 너무나 한적했다. 너무 일찍 온 탓이었다. 심지어 비까지 내리기 시작했다. 언제부터 시작하는 건지, 내가 잘못 온 건지. 갑작스럽게 생긴 일정에 제대로 된 정보가 하나도 없었다. 어찌 됐건 여기까지 왔으니 그냥 돌아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비가 오락가락하는 흐린 날씨는 이 곳의 일상이다. 숙소에서부터 동행한 동생 A양은 이런 날씨에 우산을 쓰는 사람은 대부분 관광객이라며 알려주었다. 그 말을 듣고는 마치 익숙한 듯, 나에게도 이런 날씨쯤은 일상인 듯 아무렇지 않게 비를 맞았다. 어떤 이들에게는 그저 우산이 없어 비를 맞고 있는 처량한 관광객 모드로 보일지라도 그 순간, 내 마음만큼은 완벽한 런더너였다. 거리 계단에 앉아 길거리 도시락에 맥주를 곁들이며 어느새 기다림조차도 여행의 일부가 되었다. 시간이 얼마쯤 지났을까. 가장행렬에 참여하는 사람이라고 확신할 만큼 현란한 축제의상을 입은 남다른 몸매의 언니, 오빠들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 시작하려나보다.


런던 4.JPG 노팅힐 카니발(Notting Hill Carnival) 축제 당시에 현장에서 찍어두었던 사진


기다리고 기다리던 축제가 시작되었는데 내 몸뚱이는 마치 박물관에 와 있는 듯 뻗뻗하게 굳어버렸다. 모든 상황이 낯설고 어색했다. 나를 둘러싼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외국인이며 한국과는 사뭇 다른 개방적인 수위의 스킨십까지. 어느 하나 익숙한 것이 없었다. 쑥스러워 멋쩍은 웃음만 보이던 나는 현장의 분위기를 온몸으로 즐기는 다소 과하게 열정적인 사람들 틈에 둘러싸여 천천히 축제의 분위기에 적응하고 있었다. 조금씩 부끄러움을 잊기 시작하면서 한국에선 상상도 못 할 과감한 샤우팅이 목에서 튀어나왔다. 심지어 살면서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내 안의 잠재된 리듬감이 꿈틀거리며 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렇게 나를 온전히 내려놓은 채, 한참을 쿵쾅거리는 스피커에 매료되어 걷고 또 걸었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시계를 보았을 때는 5분 같은 2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마음 같아선 해가 질 때까지 축제를 즐기고 싶었지만 시간이 금인 배낭여행자 신분인지라 아쉬운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04

마지막 밤은 맘마미아(Mamma Mia)로 멋지게 장식해야지!

배낭여행을 계획하며 제일 먼저 정해둔 일정이었다. 맘마미아는 한국에서도 뮤지컬과 영화로 몇 차례나 봤고 아바(ABBA)의 노래도 질릴 때까지 반복해서 들을 만큼 좋아했다. 때문에 영국에서의 뮤지컬 '맘마미아' 관람은 나에겐 뺄 수 없는 필수코스였다. 런던을 떠나기 전 마지막 날 아침, 미리 예매를 하지 않아도 당일 아침 일찍 가면 싸면서도 좋은 자리의 표를 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어느 배낭여행자의 알짜 Tip을 믿고 서둘러 레스터 스퀘어(Leicester Square)로 향했다. 몇몇 티켓 할인 매표소(Half Price Theatre Ticket Booth)가 있었고 저마다 조금씩 가격이 다른 듯했다. 오랜 여행으로 강해진 의심병 때문에 한참을 고민하다 하나의 티켓 부스에 들어섰다. 콩글리쉬와 바디랭귀지를 사용해 어렵게 티켓 구매에 성공했다. 예매한 표를 건네주던 직원 언니는 한국어 자막이 없는데 괜찮겠냐며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표 하나 사면서도 진땀을 흘리면서 공연을 관람한다고 하니 걱정이 되었나 보다. 환하게 웃으며 티켓을 받고서 자신감 넘치게 말했다. That's Okay!


말해 뭐해. 뮤지컬은 역시나 완벽했다. 예상했던 것보다도 훨씬 환상적이었다. 티켓 박스 언니가 걱정했던 것처럼 뮤지컬 대사를 바로 알아들을 순 없었지만 장면을 보고 대충의 대사가 떠오를 만큼 익숙했던 터라 전혀 문제 될 것이 없었다. 같은 내용이지만 한국에서 봤을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특히 댄싱 퀸(Dancing Queen)과 맘마미아(Mamma mia)가 나올 때는 뮤지컬이 아닌 콘서트를 방불케 했다. 모든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좌우로 흔들며 환호했고 크게 노래를 따라 부르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한국이었으면 관람 매너 논란으로 온종일 포털 사이트를 장악했을 정도랄까. 뮤지컬을 이렇게 신나게 즐겨본 건 처음이었다. 관람을 끝내고 나와서도 여운이 사라지지 않았다. 다시 런던에 올 기회가 생긴다면 그때는 반드시 하루 날 잡고 뮤지컬 순회를 돌아보리라. 또 하나의 버킷리스트가 생겼다.


런던 2.JPG 런던아이에서 숙소로 돌아가기 전, 아쉬운 마음에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던 곳


뮤지컬이 끝나고 늦은 저녁, 평소 같았으면 절대 돌아다니지 않았을 시간이지만 런던에서의 마지막 밤이었기에 그냥 숙소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처음 런던의 모습을 제대로 눈에 담았던 런던 아이, 그곳의 멋들어진 밤 풍경 또한 충분히 담아가고 싶었다. 그 생각 하나만으로 무서움도 잊은 채 무작정 걸었다. 반짝이는 야경이 잘 보이는 자리에 앉아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한 시도 설레지 않은 날이 없었던 런던에서의 날들이 떠올랐다. 기분 좋은 꿈을 꾼 것만 같고 내일이면 이 곳을 떠나야 한다는 아쉬움에 코가 시큰해졌다. 런던이었기에 가능했던 경험들과 그 순간의 감정들, 여행길에서 만난 잊지 못할 인연의 사람들까지. 런던에서의 모든 날들이 머릿속에 좀 더 오래 남았으면 하는 마음에 오랜 시간 몇 번이나 그 간의 하루하루를 곱씹어 보고서야 숙소로 발길을 돌렸다.


런던 1-1.JPG


05

내가 여행에 빠지게 된 건 아마도 이때부터 일 것이다. 옷가지며 신발이 젖어 찝찝해지는 것이 딱 싫다며 비 내리는 날을 누구보다 싫어했던 내가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우산 없이 즐기고 쿵쾅거리는 음악에 맞춰 소리를 내지르거나 몸을 꿈틀거리는 조금은 낯선 나의 모습. 나조차 몰랐던 내 안의 또 다른 나를 마주할 수 있는 것이 진정한 여행의 묘미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만약 이제까지 가져보았던 명함들 중에 단 하나만 다시 해볼 수 있다고 한다면, 나는 고민 없이 배낭여행자라는 이름을 선택할 것이다.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부터 매년 꼭 다시 한번 배낭을 메고 유럽 투어를 떠나보리라 다짐했는데, 현실에 치여 자꾸만 뒤로 밀려나고 있다. 각박한 현실 속에 파묻혀 이제는 과분한 꿈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오늘도 바라본다. 결혼을 하기 전에는 꼭 이 명함을 다시 한번 꺼내볼 수 있기를.






해당 글에는 본 저자의 독립출판물 <꽃다운 스물일곱의 여행 이야기 오늘은,>의 수정 및 보완한 내용 일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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