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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이리 May 04. 2020

슈퍼파워를 부르는 다섯 글자, 안녕하세요?

올레길 이야기 | #제주올레길걷기 #올레길7-1코스 #계단지옥



제주시와 서귀포시를 잇는 서귀포 버스터미널에서 출발 스탬프를 찍는 제주 올레길 7-1코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진 다음 날에만 볼 수 있다는 비밀스러운 엉또폭포, 고근산을 지나 소담한 서호·호근마을과 하논분화구로 이어진다. 출발 지점은 대형 브랜드들이 즐비해 있는 제주 신시가지에 있어 자칫 평탄할 것이라 짐작하기 쉽지만, 결코 만만치만은 않다. 천국과 지옥은 종이 한 장 차이라더니. 내게 '계단 지옥'으로 기억될 만큼 힘들었던 이 코스는 모순적이게도 걸었던 기억을 떠올리면 괜스레 미소가 지어지는 코스이기도 하다. 같은 장소, 똑같은 상황에서 천국의 따뜻함을 느낄 수 있었던 건 15km를 걸으며 받은 따뜻한 주문, 모두 그 덕분이다.






7-1코스 계단 지옥의 서막, 신시가지 주택가 오르막길
엉또 폭포를 지나 고근산으로 가는 길, 좁은 숲길들
고근산 오름 목재 계단 01
코스의 끝자락, 하논분화구에서 걸매생태공원 가는 길. 계단 지옥은 계속된다.



첫걸음을 떼고 얼마 지나지 않은 곳의 신시가지 주택가 오르막길, 한 시간 정도 거리의 엉또폭포 계단은 지옥 맛보기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제주 오름 중 비교적 높은 편에 속하는 고근산 입구에 들어서면서부터 본격적으로 계단 지옥, 그 명성을 드러낸다. 서귀포시 신시가지를 감싸고 있는 고근산은 정상으로 가는 길 내내 목재계단이 잘 정돈되어 있어 비교적 오르기 수월하지만, 턱까지 차올라 헉헉대는 내 숨소리까지 정돈시켜주지는 못했다. 곧 숨이 넘어갈 것처럼 들숨과 날숨이 바쁘게 교대하는 사이, 첫 번째 인사가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반대로 내려가는 올레꾼 어르신의 목소리였다. 올레길 걷기를 시작한 이례로 처음 들어본 인사에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게 맞나?’ 잠시 어리둥절했지만, 금세 정신 차리고 우리도 목례와 함께 밝은 인사를 건넸다. 짧게 스치며 주고받은 그 한마디는 진정될 것 같지 않았던 숨을 차분하게 만들어주더니, 힘들다고 잔뜩 찌푸리고 있던 얼굴에 기분 좋은 웃음을 한가득 피어오르게 했다. 이제까지 하루에도 열두 번씩 듣던 인사인데, 그 다섯 글자에 신기하리만치 기분이 좋아졌다.




고근산 오름 목재 계단 02 입구부터 정상 근처까지 끝날 듯 끝나지 않고 계속 이어진다.



갑작스러운 인사에 기운을 잔뜩 충전하고서 다시 힘을 내 정상에 올랐다. 고근산은 넘어가려는 숨을 부여잡고 정상까지만 어찌어찌 잘 버티며 올라가면, 능선을 따라 이어진 억새밭의 수려한 풍경을 볼 수 있다. 등산과 하산 사이 입이 떡 버러지는 풍경들이 나타나 개안을 하듯 눈호강 한번 하고 숨통이 탁 트이는 듯 깊숙한 곳까지 시원해지면, ‘그래, 이 맛에 오름 오는 거지.’ 뿌듯한 마음으로 다음 등산을 꿈꿔본다. 발걸음을 돌려 내려가는 길에 예쁘게 포장되어 있는 하산용 계단 지옥을 맞이하는 순간, 좀 전에 큰 꿈을 키우던 이는 사라져 버리고 사서 고생하는 나 스스로를 탓하는 다른 자아가 찾아올 테지만.


아! 아무나 할 수 없는 진기하고 특별한 경험도 했다. 제주올레 스탬프 간세의 설치 현장을 직접 두 눈으로 보았다. 본래 9.1km 지점의 제남아동복지센터에 있던 중간 스탬프는 우리가 7-1코스를 걷던 날, 고근산 정상으로 이사를 왔다. 궁금한 마음이 그득한 표정과 몸짓으로 기웃거리던 우리에게 공사를 하고 있던 스태프 분께서 오셔서 직접 설명해주시기를. 오고 가는 사람들이 스탬프 간세의 코스 스탬프를 가져가는 일이 빈번하게 생겨 어쩔 수 없이 이 곳으로 이사를 해야 했단다. 응? 도대체 코스 스탬프를 왜 가져가는 거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안타까운 현실이었다. 마치 역사적인 장면을 목격한 마냥 스탬프 간세가 설치되는 모습을 뒤편에서 꽤 오래 숨죽여 지켜보고난 뒤, 하산길로 서서히 걸음을 옮겼다.




7-1코스 중간 스탬프 간세가 고근산 정상으로 옮겨지는 현장. 스탬프 가져가지 마세요 : (
고근산에서 제남아동복지센터로 가는 길. 아지랑이를 찍을 수 있을까 했으나 실패.



고근산을 지나 본래의 중간 스탬프가 있던 장소로 가는 길. 유독 더웠던 그 날의 날씨에 공사장과 이어진 아스팔트 도로를 지나며 올해의 첫 아지랑이를 만났다. 강하게 내리쬐는 봄의 볕이 좋은 지, 아지랑이는 춤을 추듯 눈 앞에 어른거렸다. 걷기 전, 날씨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탓에 짧은 길이의 톡톡한 패딩을 입고 나왔던 날이다. 가성비 좋은 패딩의 짱짱한 성능 덕에 고근산 등하산으로 생긴 온몸의 열기는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한 채 체온을 계속 끌어올렸고 거기에 아스팔트의 뜨거운 기운까지 더해지고 있었다. 추위를 많이 타는 만큼 더위도 많이 타는 터라 흐르는 땀을 닦아내며 목마른 강아지처럼 축 늘어져서 터덜터덜 걷던 그때, 두 번째 인사가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힘 없이 축 늘어진 구부정한 허리 중간까지 패딩을 내리고 무표정으로 터덜거리며 걷다, 마주 오던 올레꾼의 한 마디에 허리를 곧게 세우고 두 손을 배꼽 위에 얹어놓은 채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또 한 번 마법에 걸린 듯, 나는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 사막 한가운데에서 시원한 오아시스를 만난 것처럼, 풀 마라톤 끝자락에서 청량감 있는 이온음료 한 잔을 벌컥 마신 것처럼. 정말 신기한 일이었다. 그도 같은 마음이었을까.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를 보고 방긋 웃어 보였고 때마침 좁은 숲길, 끝없는 계단, 울퉁불퉁한 공사 길을 지나던 우리의 앞에 만개한 벚꽃 나무들이 나타났다. 타이밍이 절묘했던 것이겠지만. 올레길에서 받은 인사들이 마법의 주문처럼 내게 힘이 되었듯이, 우리 앞에 꽃길을 깔아 준 건 아닐까. 동화 같은 상상을 해보기도 했다.




약 10km 지점, 서호초등학교 앞 만개한 벚꽃나무
서호초등학교에서 하논분화구 가는 길. 벚꽃길과 내내 함께 : )



"안녕하세요"는 단순히 인사를 건네고 안부를 전하기 위해 쓰는 말이 아니었던가. 흔하게 듣던 다섯 글자에 이렇게 기분이 좋고 힘이 될 줄이야. 제주를 걷고서야 알았다. 올레길을 걸으며 오고 가는 올레꾼들끼리 눈인사를 주고받으며 건네는 "안녕하세요"는 반가움과 동질감 그리고 힘내라는 응원의 마음까지 꽉꽉 눌러 담은 말이었음을. 올레꾼이 되어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 제주올레 07-1코스

│서귀포버스터미널-엉또폭포-고근산정상-하논분화구-갈매생태공원-제주올레 여행자센터

│총 거리 15.7km

│시작 스탬프 : 서귀포버스터미널 / 중간 스탬프 : 고근산 정상 /

   완주 스탬프 : 제주올레 여행자센터

│제주올레 공식 안내소 : 서귀포 버스터미널 내

│자세한 사항은 www.jejuolle.org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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