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하기 위한 노력만으로 충분한 관계
굳이 사십춘기 운운할 게 아니라 나는 대체로 말랑이며 휘둘리는 삶을 살았다. 아니 삶 자체는 감사하게도 평이했으나 내 감정 상태가 그러했다는 것이다. 딱 짚어 어떤 시기가 특별히 버거웠다 말하기 어려울 만큼 내가 느낀 감정적 부대낌은 그 시기가 광범위하고 여전히 진행 중이다. 물론 그 사이사이에는 내가 입에 머금고 사는 감사와 여유와 평화와 충만함이 메워져 있다. 그 말인즉슨 그냥 나는 정서적으로 그런 사람이라는 거다. 순간의 기쁨을 놓치지 않지만 고 잠깐 사이 끝 간데없는 우울의 바다에 빠지기도 하고, 감사의 기도를 하다가도 이내 불안해지곤 하는.
그런 기질들은 평범한 일상을 살아내면서 독이 되기도 하고 약이 되기도 한다. 결정적인 사건들과 맞닥뜨릴 때는 적극적으로 도움을 요청해야 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땐 내 섬세한 감정들을 따라 나 자신이 함께 움직이며 잔잔히 번져가는 평화의 파고에 미소 지을 수 있다. 사실 이렇게 생각하게 된 것이 그리 오래되진 않았다. 내가 처한 상황과 입장은 안전했지만 무료했고, 편안했지만 공허했고, 쉬워 보였지만 몹시 어려웠기 때문이다.
어찌 됐든 나는 충실히 마음을 다했고, 다행히 그 진심이 가족들에게만큼은 깊이 전해졌다고 믿는다. 당연히 사춘기 아이들과 지지고 볶으며 상처를 받기도 하고 남편과도 갈등을 겪지만 그 모든 문제들이 본질을 흔들지 않는 지점에 이르렀으니까. 공고한 틀이 변함없이 나를 둘러싸고 있다는 정서적 안정감은 아마도 충분히 사랑하고 또 사랑받는 경험에서 비롯되었으리라.
사실 요즈음의 나는 아주 평화로운 상태는 아니다. 일단 청소년기 두 아이를 키우는 가정이라면 으레 그러하듯이 하루하루를 예측할 수 없다. 아이들의 감정은 사십 넘은 에미의 시소와는 각도가 다르다. 아직 조절 능력이 완성되지 못한 시기이니 당연하지만 완전하지 못한 내가 불안정한 시기의 아이들을 양육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대단한 모험이다. 중3이 코앞인 딸은 시험기간에 접어들면서 더욱 감정이 들쑥날쑥해졌고 사춘기 발동이 제대로 걸린 호두는 매일매일 징징 모드 발동 중이다. 요 근래 다행히 두 녀석은 사이좋게 지내고 있는 편이긴 하나, 이미 여러 차례 전쟁을 치르고 그 최대의 피해자가 되어본 에미는 지뢰밭을 걷는 심정이다.
가장 큰 힘이 되어주는 건 남편인데 요즘 그는 몹시 바쁘고 내 눈에도 지쳐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 애쓰고 있는 모습이 안쓰럽다. 그런데도 나는 예전만큼 그에게 살갑고 다정하게 대해주지 못하는 것 같다. 언젠가 투정처럼 남편이 내뱉었던 말이 있다.
너는 애들이 엄마 고마운 걸 모른다고 툴툴거리는데 너도 애들이랑 똑같네.
금요일은 남편이 바쁘기도 했고 그 와중에 회식이 잡혀있는 날이었다. 딸이 집에서 공부하겠다 선언하여 주말에 대한 기대감이 없는 상태에서 금요일 밤에 그가 없다 생각하니 그냥 기분이 처졌다. 딸은 하교 후 조용히 학원에 갔지만 아들은 한바탕 속을 긁어놓고 검도하러 갔다.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나 왜 이렇게 힘들지? 아무 일도 없는데 왜 이리 무겁지?
날짜를 헤아려보니 기막히게 들어맞았다. 이럴 때면 진정 내 존재란 얼마나 미미한 것인가 깨닫게 된다. 엎드려 누워 내 외로움에 대해 생각해 봤다. 내가, 아니 나만 겉도는 느낌이 들었다. 가족들은 나를 사랑하지만 나란 존재가 잘 이해가 되진 않는다. 노력하고 배려할 뿐이다.
아, 엄마는 이런 거 싫어하지. 엄마는 이렇게 하는 걸 좋아하잖아. 엄마한테는 그런 말을 하면 안 돼.
세부자녀는 정말 비슷한 기질을 가지고 있다. 셋 다 전자기기를 좋아하고 호기심 만빵이며 창의력이 뛰어나고 모험을 좋아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셋 다 청소를 싫어한다.
갑자기 서러워졌다. 이해하려 애쓰는 것, 배려하려 노력하는 것이 너무 고마운 것임에는 틀림이 없는데 왜 그렇게 해야만 내가 덜 불편해지는 걸까. 그렇게 하지 않아도 절로 내 마음이 헤아려지는 식구가 하나라도 있었다면 덜 쓸쓸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 아들이 돌아왔고 엄마 속을 긁다 간 것이 미안했는지 다가와 앵앵거리며 품에 파고들었다.
딸이 돌아온 후에 여느 때처럼 치킨을 시켰다. 남편이 없으니 한 마리만 시키고 웨지감자를 추가했다. tv를 보면서 아이들과 웃고 떠들며 다시 기분은 평시로 돌아왔다. 남편에게 전화가 걸려오기 전까지는. 7시가 넘었을 즈음 그가 회식장소로 이동한다고 하면서 끝나고 데리러 올 수 있느냐 물었을 때 나는 피곤에 찌든 그 목소리를 듣고 마음이 흔들렸고 10시 전에 연락을 주면 데리러 가겠다고 약속했다. 그가 다시 전화를 걸어온 시간은 9시 48분. 나는 옷을 갈아입고 차 키를 들고 나왔지만 기분이 좋지 않았다.
밤 운전은 내게 쉽지 않다. 게다가 그가 있는 곳은 번화한 곳이 아니다. 가는 길이 어둡다. 예전에 한 번 데리러 갔다가 맘고생을 하고는 다시 가고 싶지 않다고 했었다. 그는 그때 내 말을 기억하지 못하는 걸까. 무사히 도착해 차를 세웠고 그는 날아갈 듯 가볍게 옆자리에 앉았다. 거나하게 취했고 마누라가 데리러 와서 무척 행복한 것 같았다. 그런데 나는 바로 화를 냈다.
운전해 돌아오는 내내 나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남편은 몹시 화가 나서 씩씩 거렸지만 운전하는 내게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자 그는 먼저 올라가 버렸고 나는 나대로 억울하고 짜증 나고 속상해서 차에 앉아 한참을 숨을 고르다가 집으로 올라갔다. 아이들은 모두 곤히 자고 있었다.
나는 일단 내 억울함을 붙들어두고 그에게 대체 네가 왜 화가 난 거냐고 물었다. 내가 짜증은 좀 냈지만 늦은 밤 데리러 갔고 데리고 왔는데 일단 고마운 게 먼저 가 아니냐고 말했다. 내가 목소리를 낮추고 차분히 얘길 하니 그의 목소리도 진정되었다. 그는 말했다. 자기는 분명 너에게 가능하냐 물었고, 너는 분명 10시 전이라면 데리러 갈 수 있을 거라 말했다. 그래서 계속 시간을 체크했고 아직 자리가 마무리되지 않았지만 적당한 상황에서 전화를 했다. 네가 와서 너무 기쁜 마음에 달려갔는데 다짜고짜 화를 내니 너무 당황스럽고 어이가 없더라.
그의 얘기를 듣고 나는 가만히 생각했다. 남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가기 싫고 두렵고 어려웠으면 못 가겠다 애초에 말했으면 되었을 일이다. 그렇게 설명했다면 그는 다른 방법을 강구했을 거다. 내가 허락했고 하겠다고 해놓고 반가워 달려온 사람에게 화를 내니 그의 입장에선 속상했을 것 같다. 그 순간 내가 가족들과 소통하며 자주 겪는 문제들이 눈에 보였다. 내 반응 패턴이 뚜렷하게 가슴에 새겨졌다. 나는 그에게 사과했다.
얘기 듣고 보니 자기 말이 맞네. 내가 잘못했어. 자기 입장에선 충분히 화나고 속상했을 것 같아. 내가 분명 기꺼이 할 수 있다고 말하고 허락한 일이었으니까. 미안해. 내가 자기한테뿐 아니라 아이들에게도 자주 그러는 것 같아. 결국 해줄 거 다 해주면서 좋은 소리 못 듣는 거. 지금 다시 느꼈어. 힘들게 운전해 가서 자기 태우고 다시 돌아왔는데 고맙다는 소리는 못 듣고 결국 내가 미안하다 사과해야 하는 이 상황... 나도 진짜 싫은데. 왜 나는 자꾸 그럴까.
갑자기 말하다 울음이 터졌다. 하지만 들키지 않으려고 꾹 참고 말을 이어나가려 했는데 말 사이에 자리 잡은 미묘한 쉼표를 나와 16년 산 남편은 간파했다. 그는 다가오더니 나를 꼭 끌어안았다. 나는 갑자기 더 서러움이 밀려와서 펑펑 울어버렸다.
미안해. **야. 내가 다 미안해.
정확히 무엇이 미안한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는 그렇게 말하고 눈물을 닦아주고 오랫동안 꼭 안아주었다. 나는 그 순간 그 어느 때보다도 그의 품이 따뜻하다고 느꼈다. 내 마음을 속속들이 헤아려 이해할 수는 없다고 해도 내 고통이 그대로 전달되고 그게 자신의 아픔으로 연결된다면 그건 그냥 사랑이니까. 그걸로 충분하다 여겨졌다. 우리는 많이 다르지만 그 다름이 갈등으로 그려지는 시기는 이제 무사히 지나간 듯싶다. 이해하기 위한 노력과 배려. 그 이상을 바란다면 그건 진정 욕심일 거란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