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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씻기는 시간

by 김콤마

오늘의 말씀

가자, 오늘 지은 죄악을 씻으러.

—나, 억돌이에게



묵상

억돌이의 죄: 정기적으로 코에 바람 쐐 줘야 해서 1시간 거리 쇼핑몰에 데려갔는데

유모차에 태워도 괴성 지르고

아기띠에 태워도 괴성 지르고

분유를 줘도 괴성 지르고

과자를 줘도 괴성 지르고

자라고 등받이 눕혀도 괴성 지르고

구경하라고 등받이 세워도 괴성 지르고

기저귀 갈아도 괴성 지르고

가만히 서 있어도 괴성 지르고

이리저리 움직여도 괴성 지른 것.


아빠의 죄: 이제 9개월밖에 안 된 애가 소리 좀 지른다고

신경질적으로 보고

산경질적으로 말하고

신경질적으로 만지고

신경질적으로 내려놓고

신경질적으로 (유모차를) 민 것.


속죄법

아빠: 목욕물 받고 수건, 갈아입을 옷, 기저귀 챙긴 다음에 억돌이 깨끗이 씻어주기

억돌이: 아빠가 씻는 동안 물장구치고 놀기


사실 죄라고 썼지만 억돌이는 죄가 없습니다. 애가 뭔가 불만이 있어서 의사 표현을 하는데 그걸 못 알아듣는 아빠가 죄인이지요. 근데 아니, 소리 지르는 것만 듣고 애 마음을 어떻게 아나요. 이래도 꽤액, 저래도 꽤액, 어휴, 듣는 사람도 속 터져요.


그래서 저와 억돌이는 가끔 싸웁니다. 억돌이는 억돌이 대로 신경질 내고 저도 저 대로 신경질 내고요. 그러고 나면 죄책감이 들어요. 제가 못난 아빠 같고요.


다행히 그런다고 억돌이와 제 사이가 벌어지진 않아요. 둘이 친밀하게 보내는 시간이 있거든요. 첫째는 예전 글에서 말한 대로 억돌이를 아기띠에 태워서 둘이 산책하는 시간이고 둘째는 매일 제가 억돌이를 씻기는 시간입니다.


억돌이 목욕은 제가 전담해요. 신생아 때는 아내와 둘이 씻기면서 제가 주도했고 지금은 억돌이가 너무 엄마를 찾는 게 아니면 저 혼자 씻깁니다. 애가 무거워져서 아내가 씻기기에는 이제 무리예요. 조금이라도 더 힘센 제가 해야죠.


이렇게 억돌이에게 아빠가 널 위해 이만큼 노력하고 있으니까 잘 알아두고 감사히 여겨라, 하는 마음을 전하는 시간이 있으니까 신경질 좀 내도(가끔입니다, 요즘 꾹 참고 살아요) 아이가 아빠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물론 엄마 다음으로).


그러고 보니 또 생전의 아버지 생각이 나네요. 저희 아버지는 저희 형제가 중학생이던 때까지 목욕탕에서 때를 밀어주셨어요. 후, 엄청 쪽팔렸죠. 다 큰 사내자식이 아빠한테 때를 밀리고 있으니까요. 그것도 그냥 한쪽 구석에 앉혀 놓고 미는 게 아니라 숫제 세워놓거나 기둥 짚고 허리 숙인 자세를 만들어 놓고 구석구석 미시는 거예요. 목욕탕에 친구들이라도 온 날이면 얼굴을 들 수가 없었습니다. 그땐 아빠가 왜 이렇게 때밀이에 집착하나 싶었어요.


근데 제가 애를 낳아보니까 짐작이 가네요. 아버지 나름의 애정 표현법이었던 거예요. 아들들과 그런 식으로 친밀한 시간을 보내고 싶으셨던 거죠. 말로 마음을 표현하긴 낯간지러우니까 때밀이에 마음을 실으셨던가 봅니다.


저는 산책과 목욕에 그 마음을 싣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녁에 자라고 침대에 눕혀 놓고 나올 때 사랑한다고 말해줘요. 제 기억에 아버지는 그런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억돌이가 나이 들어서까지 그렇게 말한다면 아버지를 능가하는 겁니다.


굳이 뭘 아버지를 넘어설 생각을 하냐고요? 그걸 아빠가 원하는 것 같아요. 아빠를 볼 수는 없지만 마음으로 느낄 수 있어요. 더 나은 아버지가 되라고.


어젠가 그제는 새벽에 깬 억돌이를 다시 재우려고 노래를 불러주고 있는데 갑자기 아빠가 잘하고 있다고 등을 두드려주는 느낌이 들었어요. 좋았어요. 눈물도 찔끔 나고요.


죽은 아버지가 어떻게 그러냐고요? 몰라요. 어쩌면 그냥 제 망상일 수도 있겠죠. 근데 망상이면 좀 어떻습니까. 그렇게라도 내가 아빠 노릇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좋은 거죠.


어제 글에서 “Fake it till you make it”(될 때까지 척해라)이라는 말을 언급했는데요, 이제부터 제가 좀 부족해도 좋은 아빠라고 생각하고 좋은 아빠인 척하겠습니다. 좋은 아빠가 될 때까지.



기도

억돌이 때문에 화가 나도 억돌이의 입장을 좀 더 생각하게 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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