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씨바, 그냥 가시던 길 가시라고요.
—우리 동네 초딩인지 중딩인지
저녁에 억돌이를 아기띠로 메고 동네 한 바퀴 돌고 집으로 오는데 저 앞에 심상치 않은 풍경이 펼쳐져 있습니다. 웬 아이가 풀밭의 커다란 돌을 부여잡고 엎어져 있고 그 앞에 한 아이가 서 있고 그 주변을 아이 셋이 둘러싸고 있는 거예요. 나이는 초등학교 고학년이나 중학교 저학년 정도.
‘싸우는 건가? 그냥 모른 척하고 지나가도 되려나?’라고 생각하는데 무리 중 한 명이 저에게 달려옵니다.
“아저씨, 싸움 좀 말려주세요.”
‘아, 귀찮게.’
어쩌나요. 어른이 돼서 그런 부탁을 받고 그냥 지나칠 수는 없잖아요. 모르는 동네도 아니고 우리 동넨데 나중에 뒤에서 손가락질받지 않으려면요.
그래서 현장에 접근하니까 쓰러진 애 앞에 서서 씩씩거리는 친구(씩씩이라 하죠)가 눈을 부라리고 말합니다. 아기 안고 가시던 길 가시라고.
‘야, 나도 그러려고 했어! 근데 니 친구 때문에 휘말린 거라고!’
일단 자초지종을 들어봅니다. 씩씩이는 계속 끼어들지 말라고 하지만 주변 아이들이 말해줬어요.
씩씩이랑 A랑 말다툼이 있어서 분위기가 안 좋았는데 B가 씩씩이를 노려봤대요. 그래서 씩씩이가 뭐라고 농담조로 말했고 B는 그걸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패드립을 날렸고(뭔진 안 물어봤습니다, 괜히 그 말 나오면 분위기만 더 험악해질 것 같아서요) 그래서 씩씩이가 한 방 날려답니다.
씩씩이는 저보고 계속 가라면서도 사이사이에 자기 입장을 항변했어요. 종합해보면 3월부터 애들이 자기 무시하는 거 참다 참다가 폭발한 거라는군요. 그러면서 계속 하는 말이,
”아저씨, 씨바, 그냥 가던 길 가시라고요.!”
‘얻따가, 씨바래, 이 씨바새끼가.’
기분은 나쁘지만 참았습니다. 동네 꼬마랑 싸우면 또 무슨 망신이에요.
근데 보니까 씩씩이가 나쁜 애는 아닌 것 같아요. 왜냐하면 화가 나서 자기도 모르게 욕은 하지만 “가라고요”가 아니라 꼬박꼬박 “가시라고요”라고 높임말을 쓰더라고요. 옆에 있는 애들도 보니까 껄렁껄렁한 스타일은 아닙니다.
씩씩이가 가란다고 그냥 갈 수가 없었어요. 다른 애들이 제발 좀 수습해 달라는 눈으로 보고 있으니까요. 제 가슴팍에 앉아 있던 억돌이는 무슨 표정이었을지 궁금하네요.
별수 없이 씩씩이가 흥분을 좀 가라앉힐 때까지 계속 그 자리를 지켰습니다. 이쯤에서 끝내는 게 맞다, 더 때리면 니가 감당 못 할 일이 생길 수 있다, 니네가 나중에 화해하고 말고는 알아서 할 일이만 지금 그렇게 흥분해서 또 싸울지 모르는데 아저씨가 그냥 가버릴 수는 없다, 라고 뭔가 설득력이 있는지 없는지 모를 말을 반복하면서요.
뭐, 결말은 싱겁습니다. 결국엔 씩씩이도 한 풀 꺾였어요. 여전히 눈에 화가 가득했지만 눈물도 맺혀 있더라고요. 그동안 쌓인 게 많았던가 봅니다. 그 눈빛을 보니까 더 싸울 마음은 없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억돌이 내려놓고 바로 지갑 들고 나갔어요. 애들 분위기 좀 풀라고 아이스크림이라도 하나씩 사주려고요.
1층 출입구를 나서니까 씩씩이가 저 앞에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씩씩이에게 맞은 애가 따라가며 사과를 하고 있어요. 씩씩이는 아직 사과를 받아줄 마음이 없어 보였습니다.
얼른 씩씩이 옆에 따라붙어서 아저씨랑 편의점 가서 시원하게 아이스크림이나 하나 먹자니까 안 간대요. 그럼 음료수라도 먹자니까 안 간대요. 부모님이 모르는 사람한테 얻어먹지 말랬다, 나 아이스크림도 음료수도 안 좋아한다면서요. 하긴, 친구 때리고 집에 가는 길에 뭐 먹고 싶은 기분이 들 리가 없죠.
그러면서 진심인지 반어법인지 모르겠지만 자기한테 신경 끄고 집에 가서 아기랑 즐거운 시간 보내라고 톡 쏘아붙입니다. 안 되겠다 싶어서 그냥 보내줬어요. 맞은 아이도 사과를 안 받아주니까 포기하고 가리더군요.
다시 아까 싸움이 났던 현장으로 가니까 나머지 아이들이 앉아 있습니다. 어떤 사이인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고 큰 싸움 안 나게 잘 말렸다고 말해줬습니다(물론 MVP는 나지만). 그리고 때린 놈도 맞은 놈도 가버린 판국에 걔들만 뭐 사주기도 뭐해서 그냥 돌아왔어요.
그러고 보니 10년 전쯤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어요. 일요일 밤에 볼일 보고 혜화역 4번 출구로 나왔는데,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때는 거기에 큰 오락실이 있었거든요. 근데 그 앞에서 누가 주먹질을 하고 있는 겁니다. 설마 하고 가서 보니까 웬 남자가 다른 남자를 때리고 있어요. 맞는 남자는 같이 때리지 않고 왜 때리냐고 말로 응수하고 있고 그 옆에 여자 친구로 보이는 아가씨는 애간장이 타서 때리는 남자(때남이라 부르겠습니다)에게 악을 쓰고 있습니다.
그냥 지나칠까 했어요. 남들도 안 끼어들길래요.
근데 갑자기 때남이 아가씨를 때리려는 듯이 다가서는 겁니다. 그래서 별수 있나요. 끼어들었죠. 때남의 두 팔을 붙잡고 말했어요.
“에이, 여자는 때리면 안 되죠.” (남자는 때려도 된다는 건 아니지만)
그러니까 때남이 뭐랬게요?
“니가 뭔데 반말이야?”
난 분명히 존댓말 했는데 나한테 눈을 부라리며 그런 말 하니까 내가 열이 나요, 안 나요? 저도 속에서 뭐가 확 치밀어 오르는 겁니다. 그래서 눈을 똑바로 마주치며 말했어요.
“제가 언제 반말을 했다고 그러세요! 일단 좀 진정하세요!”라고. ‘요’를 강조해서 존댓말임을 확실히 보여준 게 포인트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게 스무 살에 서울 올라갈 때 어머니가 제일 당부하신 말씀이 “욱하는 성질 고쳐라”였기도 하지만 결정적으로 그 남자의 두 팔을 잡는 순간, 손바닥으로 단단한 근육이 느껴지며 내가 제압할 수 없는 상대라는 걸 직감했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제가 존댓말 공격을 날렸더니 때남도 수그러들더군요.
“알았어요. 안 때릴 게요. 그러니 이거 좀 놔요.”
그렇게 그쪽에서 높임말로 나오길래 저도 놔줄까 말까 하는데 뒤에서 누가 또 툭 튀어나오는 겁니다. ‘뭐야, 또 패거리가 있었어? 나까지 처맞는 거 아냐?’ 하고 움찔했죠.
“친굽니다. 제가 말릴게요.”
아니, 그럴 거면 진작에 말리지. 괜히 나만 싸움에 휘말려서 때남한테 숙이고 들어갔잖아!
그렇게 사태는 일단락됐습니다. 그러고서 제 갈 길을 가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이거 방송 몰카 아니야? 막 카메라랑 사회자랑 나 따라오고 있는 거 아니야?’
기대에 차서 뒤를 돌아봤는데 아무도 날 쫓아오지 않았어요. 하긴, 때남 주먹에 맞고 남자 얼굴이 옆으로 90도씩 꺾이던데 방송이면 그렇게 때릴 리가 없죠.
네, 뭐,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싸움 말린다고 방송 나오는 것도 아니고 내 손에 뭐 떨어지는 것도 아닌데, 귀찮기만 하고 그때도 오늘도 때린 놈들에게 괜히 기분 나쁜 말이나 듣고 아, 그런 일 휘말리는 거 진짜 딱 질색이에요.
다시 집에 들어오니까 억돌이는 기분이 좋아요. 당연하죠.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게 싸움 구경이니까요.
누가 싸우는 거 같으면 얼른 돌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