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의 혁신은 사용자 경험의 혁신이지, 기술의 혁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유호현 외, ⟪실리콘밸리를 그리다⟫
며칠 전에 아내가 3년째 쓰던 아이폰SE를 길바닥에 떨어뜨렸습니다. 얼마나 세게 박았는지 액정이 가루가 날릴 만큼 박살이 났습니다.
일단 강화유리를 붙이고 테이프로 감싸서 깨진 액정이 피부에 닿지 않고 추가로 깨지지 않게 했지만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일 뿐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진 않죠.
원래 아내는 요즘 나오는 폰이 모두 대형이라 한 손에 쏙 들어오는 SE가 좋다며 앞으로도 1~2년은 더 쓸 거라고 했었지만 사고가 난 후 중고가 20만 원도 안 하는 폰의 액정 수리비가 공식 수리점에서는 16만 원, 사설에서는 5~10만 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 돈을 쓰고 고치느니 차라리 바꾸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습니다.
그래서 현재 생각 중인 기종은 아이폰8입니다. 2017년 가을에 나왔으니 지난 10일에 발표된 아이폰11 시리즈보다 2년 뒤쳐진 모델입니다.
아이폰8을 고려하는 이유는 중고가가 30만 원 내외로 저렴하고 카메라가 그럭저럭 쓸 만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최신 기종으로 가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저희는 폰에 100만 원 이상을 쓸 마음이 없습니다. 아이폰11이 그 정도 돈을 쓸 만큼 혁신적인 제품이라 생각하지도 않고요.
제가 보기에 아이폰은 8 이후로 혁신이 정체됐습니다. 그 이전 모델들은 지문 인식 도입, 아이폰 최초 대화면 탑재, 소프트웨어로 아웃포커싱을 구현하는 인물 사진 모드 추가 등 사용자를 혹하게 해서 꼭 최신 모델을 사야겠다는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변화가 항상 있었어요. 애플이 세계 최초로 그런 기술을 개발하진 않았어도 기존의 기술을 세련되게 응용해 무척 만족스러운 사용자 경험을 제공했죠.
그런데 아이폰8부터는 속도와 카메라 성능 향상에만 치우친 느낌입니다. 그 두 가지를 중시하지 않는다면 굳이 최신 모델을 살 이유가 없어요. 어차피 소프트웨어적으로 생기는 변화는 몇 년 전에 출시된 모델도 운영체제 업데이트를 통해 동일하게 적용되니까요. 곧 출시될 iOS 13에 추가되는 기능은 아이폰11만 아니라 아이폰7에서도 구현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저는 아직도 3년 전에 나온 아이폰7플러스를 쓰고 아내도 박살난 SE에서 2년 전 모델인 8로 갈아탈 생각입니다. 그러고 보니 맥북과 아이맥도 2015년 모델인데 교체 필요성을 전혀 못 느끼고 있어요. 어디까지나 저 개인의 경험을 근거로 하는 말이긴 하지만 애플이 위기는 아니라도 혁신의 정체기인 건 맞는 것 같습니다.
애 키운다고 돈을 아껴야 하는 시기에 혁신적인 제품이 나오지 않는 건 어쩌면 다행일지도 모르겠네요.
마진 쿡 씨, 혁신을 안 하려거든 가격이라도 더 낮추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