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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하이라이트 Oct 24. 2019

잘못했으면 사과를 해야 사람이지

금요일 밤, 빗길을 달렸다. 나는 야간 빗길 운전이 싫다. 도로도 차도 선명하게 보이질 않으니까 차선 한 번 바꾸려 해도 신경이 곤두선다.


갑자기 신호가 노란색으로 바뀌었다. 그냥 지나가긴 애매한 거리라 좀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았다. 룸미러를 보니 뒤에서 고속버스가 달려오고 있었다. 노란불인데도 버스는 빠른 속도로 닥쳐왔다.


차를 살짝 앞으로 빼는데 바로 뒤에서 빠아앙 경적 소리가 들렸다.


다행히 내가 선 차선은 우회전도 할 수 있는 마지막 차선이라 오른쪽에 차 한 대 더 세울 공간이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버스가 바로 옆에 급히 섰다.


“야이, 미친 새끼야! 거기서 왜 서!”


기사가 다짜고짜 욕을 했다.


“노란불이잖아요!”


야이, 개새끼야, 노란불이잖아, 니 눈은 동태눈깔이냐, 라고 받아쳤으면 속이 시원했을 텐데 나는 사람이 너무 예의 바르다.


“이, 미친 새끼.”


기사의 욕을 한쪽 귀로 흘리며 다시 신호를 보니 어느새 파란불로 바뀌었다. 기사야 욕을 하든 지랄을 하든 나는 출발했다. 옛말에 지는 게 이기는 거랬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블랙박스에서 메모리 카드를 빼서 집으로 올라왔다. 바로 영상을 돌려봤다.


“씨발.”


손이 부르르 떨렸다.


블랙박스가 구려서 버스의 번호판은 보이지 않았다. 버스 옆면의 운수회사 이름과 전화번호가 화면에 잡혔는데 앞부분은 날아간 반쪽짜리였다.


하지만 구글은 다 안다. 바로 구글에 그 반쪽 난 번호와 이름을 넣으니 어느 회사인지 나왔다. 회사 사이트에 들어가니 고객의 소리 게시판이 있었다.


이러저러한 일이 있어서 기사 연락처를 알고 싶으니 연락 달라고 글을 올렸다.




며칠이 지나도 연락이 없었다. 그래서 직접 운수회사에 전화를 걸었다. 이게 굳이 전화까지 걸 일인가 싶었지만 그냥 넘어가는 건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러저러한 일이 있어서 기사 연락처를 알고 싶댔더니 자기들은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면서 영업소로 전화를 해보란다. 어쭈, 이런 식으로 뺑뺑이 돌리시겠다? 좋아, 한번 해보자.


바로 영업소에 전화를 넣었다.


“예, OO운수입니다.


“안녕하세요. 기사님 연락처 좀 알고 싶어서 전화했습니다.”


“무슨 일이신데예?”


“제가 지난주 금요일 밤 10시 반쯤에 진주IC 삼거리쯤에서 급정거를 했어요. 그래서 뒤에 오던 기사님하고 시비가 좀 붙었거든요.”


“……예.”


“집에 와서 블랙박스로 확인해보니까……”


“…….”


“제가 신호를 잘못 봤더라고요.”


“……?”


“노란불인 줄 알고 세웠는데 아니더라고요. 그래서 기사님한테 사과를 하고 싶은데 연락처 좀 알 수 있을까 해서요.”




그렇다, 내가 미친놈이었다. 좌회전 신호가 노란불로 바뀌는 걸 보고 직진 차선에서 급정거를 한 것이다. 파란불 보고 달려오던 버스 기사님은 당연히 식겁했겠지. 욕을 태배기로 먹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그나마 차선이 넓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나는 지금 이 글을 병원에서 쓰고 있을지도 모른다.


너무 창피하고 미안해서 기사님에게 사과를 하려고 회사에 전화를 건 거였다. 하지만 회사에서는 그 시간에 그 길로 다니는 버스가 한두 대가 아니어서 기사님을 찾아줄 수는 없다고 했다.


“그래도 이래 전화해주셔서 고맙심니다. 솔직히 저희가 전화받으면 맨날 기사 교육 잘 시켜라 카는 욕 밖에 못 듣거든예. 근데 이런 전화 주시니까 어쨌든 고맙심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전화를 걸기 전에 정말로 기사님 연락처를 알려주면 어쩌나 싶었다. 괜히 기사님한테 연락했다가 미친 새끼 운전 잘하라고 또 욕을 먹으면 어쩌나 싶었다.


근데 또 그냥 넘어가긴 싫었다. 나는 잘못하고 사과 안 하는 인간들 극혐이다. 특히 도로에서 멍멍이 고추 같이 운전하고 비상 깜빡이 안 켜는 새끼들, 진짜 고추 까버리고 싶다.


다행히…… 아니, 불행히 기사님 연락처는 못 받고 엉뚱하게 고맙다는 인사를 받았다. 나는 분명히 사과하려고 했는데 회사가 협조를 안 해준 거다. 까려거든 회사 고추를 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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